제434화. 물결 (8)
곤륜의 제자들은 날듯이 무당산자락을 내려와, 단강구의 남쪽 선착장에 이르렀는데.
“무각주님 이쪽입니다!”
“일단 따라붙는 자는 없는 듯한데,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서두르자꾸나.”
그렇게 곤륜 제자들을 실은 배가 대회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에 해당하는 북쪽 선착장을 향해 물살을 갈라나가기 시작하는 때.
곤륜의 무각주이자 천하십검의 일인인 덕성자는 선수에서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우우.”
그 한숨의 근원은 덕성자의 손에 들린 자그마한 목함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목함은 대환단이라는 천고의 영약을 품고 있거니와, 천무대회의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는 물품이었으니까.
“…….”
따지고 보면 덕성자와 곤륜의 제자들은 이 목함을 쟁취하기 위해 저 멀리 청해의 끝자락에서부터 이곳 단강구까지 온 것이었다.
‘…이걸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편법도 불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늘.’
단순히 마음만 먹은 게 아니라 실천으로도 옮겼다.
걸음으로 화산을 앞지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고.
공손무결에게서 목함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도 참여치 않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지켜만 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이 목함을 손에 넣으려면 힘을 아껴 두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곤륜의 이름을 정무학관의 생도들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 이유는 언용운 때문이었다.
하나, 모순적이게도 덕성자는 언용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인사라 생각했거늘.’
시작은 예단(豫斷)이었다.
덕성자는 언용운과 정무학관의 후기지수들을 본인의 명성만을 쌓으려 하는 망종들이라 판단했다.
덕성자에게 그들의 행동은, 엎어지면 십만대산과 맞닿아있는 곤륜의 사정은 고려치 않고, 천마신교를 자극하는 행위로 비쳤으니까.
‘하여, 천무대회에서 곤륜이 우승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를 통해 알려주고 싶었다.
편법을 택해 승리를 따내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게 이런 식으로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벌어진 돌발상황에, 정무학관의 후기지수들은 대회의 승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덕성자의 손에 목함을 건네주었다.
그건 이미 언용운을 비롯한 다른 후기지수들이 무엇이 중요한지를 안다는 뜻이었다.
‘괴룡과 그 동무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가 아니라… 내가 눈과 귀를 막은 노괴였던가.’
그렇다면 이번 천무대회에서 곤륜과 덕성자가 보인 행동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동이 추태가 되어버리는데.
심지어는 천장호가 괴한을 자신들이 상대하겠다고 말하는데, 달리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곤륜이 십만대산 바로 근처에 있긴 하지만. 마인들과 싸워온 경험은 본인들이 많다라… 허허허. 허허허허.”
복마선봉(伏魔先鋒).
마를 무릎 꿇리는 일에 있어 가장 앞에 서 있다는 이 말은, 백여 년 전 검마라는 인물이 출현한 이래 줄곧 곤륜을 상징해온 기치(旗幟)였다.
하나 이제 와선 그 기치도 떳떳하게 들 수 없게 된 것이다.
“…뭐가 복마선봉이란 말인가.”
그렇게 덕성자가 자괴감에 신음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고야 만 때.
운룡검수 중 한 명이 도착을 알려왔는데.
“무각주님. 북편 선착장에 당도했습니다. 이동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 말에, 덕성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심자배의 제자들이 가서 보고 들은 사실을 전하고 오거라.”
“예? 무각주님께서는 동행을 아니 하십니까?”
“우리 전부가 이 목함을 들고 저 안에 들어가면, 곤륜이 결승점을 통과했다는 여지가 생길 수 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야말로 치욕이 될 것이다.”
“…아.”
“그리고 어차피 길 안내를 하려면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 나는 여기 있을 테니, 어서 가서 요점만 알리고 명숙들을 좀 모셔오거라.”
“예!”
그렇게 심자배 제자들이 귀빈석에 있는 안쪽을 향해 달려 들어간 지 잠시.
경혜와 제갈척을 비롯한 강호의 명숙들이 우르르 걸어 나왔는데.
그중 제갈척이 덕성자를 향해 한마디를 건넸다.
“괴룡에게 목함을 받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직접 와서 말하지 않고 어찌 여기에 계시는가?”
“혹여라도 곤륜이 우승을 하였다 해석될까 봐 조심했습니다. 그 목함의 주인들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런 덕성자의 말에, 질문을 한 제갈척을 비롯해 여러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치길 잠시.
대회의 주최자인 경혜가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는데.
“그러셨군요. 이것 참.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긴 하지만. 대회의 취지가 증명된듯해 빈니의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경혜의 태도에, 덕성자는 미간을 좁히며 언성을 높였다.
“어찌 그리 태연하십니까? 지금 난리가 났다니까요?! 어서 배에 오르십시오. 빈도가 안내하겠습니다.”
그 말에, 경혜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괜찮습니다. 약왕 어르신께서 신원 보증을 해주시기도 했고. 이미 무당오협과 하북권웅을 그쪽으로 보냈으니까요.”
* * *
랑야검(浪野劍) 장철한.
방랑자처럼 세상을 떠도는 검객이라는 별호처럼, 그는 정처 없이 천하를 배회하는 검객이었다.
그렇게 배회하다 산세가 좋은 곳에선 며칠씩 검을 가다듬기도 하고, 발을 잘못 디뎌 발견하게 된 동굴을 몇 달이나 거처로 삼은 적도 있는.
그야말로 낭인(浪人)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거듭해온 사람이 장철한 이었다.
한데, 의외로 장철한은 언용운에 관해선 제법 빠삭했다.
저잣거리가 있는 고을이라면 때마다 나붙는 청죽관발 소식지가 그런 빠삭함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언용운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약왕 오균천에 의해서였다.
“뭐야. 장철한이 이놈 이거 왜 또 혜민각에 와서 죽치고 있어? 약재 아깝게?!”
“볼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셔서, 이번엔 이렇게 제가 쓸 약초를 직접 따왔는데 아깝기는 뭐가 아깝습니까?”
“당연히 아깝지! 네놈이 안 땄으면 언젠가 다른 약초꾼이 따서 필요한 이에게 돌아갔을 텐데, 하등 쓸모도 없는 놈한테 뜯겼으니 아까움을 넘어 원통하다!”
“…만나자마자 구박이 너무 심하신데요? 뭐 안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며칠 전에 딱 너랑 반대되는 녀석을 봤는데, 그러고 나서 네놈을 보니까 절로 부아가 치민다.”
본인과 반대된다고 하니, 장철한으로서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디의 누군데요? 뭐가 어떻게 반대입니까?”
“며칠 전에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왔다 갔다. 그중에 대표로 온 녀석인데. 당장에 무공은 네 녀석에게 미치지 못할 테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다른 놈이었어.”
“정무학관? 그 비룡검인가 하는 친구 말입니까? 천하제일후기지수라는?”
“아니, 언용운이라고 있어.”
언용운.
그 시점에 이미 그 이름은 장철한이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했었다.
“엥. 가문에서 쫓겨났다던 녀석 아닙니까? 학관에서 비주류 중에 비주류일 텐데? 견학생 대표가 그 친구였다고요?”
안 좋은 쪽으로 유명했던 그 이름이 본인보다 낫다고 하는데.
심지어 무림의 배분으로 치면, 장철한에게 언용운은 까마득한 후배였다.
“아니 그래도 제가 배분으로 치면 그 녀석 삼촌뻘이 될 텐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심지어 어르신은 낭떠러지에 매달려 계시던 걸 제가 구해드려서 그렇게 침을 놓고 계시는 거고요.”
“그 인연으로 꼴 보기 싫어도 깨져서 올 때마다 고쳐주고 있잖아!”
“나 원. 은인 대접 한번 받기 힘드네.”
“정신머리 이야기를 하는데 배분은 왜 끌고 오느냐! 나이를 헛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야?”
“큼.”
“기껏 닦은 무로 제 한 몸 건사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 하는 놈이 그놈의 수련은 뭐 하러 하는지 원.”
“…….”
“너는 언용운이 발바닥이나 핥는 게 어울린다! 그 알량한 무공도 아마 금방 따라 먹힐 텐데 그날까지 잘 닦아보던지! 치료는 다 됐으니 꺼져!”
그렇게 언용운이라는 이름자가 머릿속에 남았는데.
이후로도 혜민각을 찾을 때마다 오균천이 언용운 칭찬을 하니, 자연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소식지가 나붙게 될 즈음엔 가까운 마을에 내려가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게, 장철한의 주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카아아아앙!!!
그런 나날을 보내온 끝에, 이렇게 언용운과 검을 맞대는 순간에 이르게 되니.
더욱 궁금증이 들었다.
‘신기하긴 신기하군.’
우선적으론 매난국죽 사색 무복을 입은 녀석들이 언용운의 말에 척척 따르는 광경 자체가 신기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학관을 박차고 나올 때랑 별반 차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주 수족이 따로 없군. 심지어 소림의 제자랑 남해적룡궁의 인사도 끼어있는 것 같고.’
다음으론 이제 막 약관을 지난 나이에 절대고수의 반열에 든 무위였다.
‘하나같이 무서운 재능이긴 한데 그중에서도 언용운이라는 녀석이 제일이군. 이런 걸 두고 천재라 하는가?’
그 궁금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인이라고 오해받는 상황을 모른 척 넘긴 장철한 이었는데.
‘…한데, 몸이 좀 무거워 보이는데?’
기왕지사 마인 취급 받는 거, 진면목을 한번 끌어내 보자는 생각으로 장철한은 검을 고쳐 쥐었다.
* * *
만에 하나를 대비해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그렇다고 장철한을 마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장철한이 휘두르는 검초에서 묻어나는 저의 자체도 탐색에 국한돼 있었고.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은 법이니까.’
다른 이유로 이 자리에 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여, 처음만 해도 내 목표는 어른들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목함도 옮겼겠다, 굳이 무리할 것 없이 어른들이 올 때까지만 버텨내면.
능히 장철한은 제압이 될 터였으니까.
캉! 카앙!!!
카아아앙!!!!!!
한데, 어느 순간 장철한의 검이 담고 있는 저의가 바뀌었다.
화륵-
화르르륵-
명백한 투기를 띄기 시작한 그의 검은 그저 위협용으로만 사용하던 살초를 본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해남의 제자인가? 힘은 좋은데, 검을 쥔 지 얼마 되지 못했군.”
그것도 주된 대상이 우리 중 약체들이었다.
촤악!
“장선! 괜찮냐?!”
“…예. 살짝 베였을 뿐이에요.”
“화상을 동반하는 검초에 살짝이 어딨어? 장선은 뒤로 빠지고, 옥기는 쟤 좀 봐줘!”
“알았어!”
그에 정현이 입을 열었다.
“언 소협.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우리 선에서 해결해야겠다.”
녀석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마다 결연한 표정으로 병장기를 고쳐 쥔 언동생들은 더욱 촘촘한 대형으로 장철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캉! 캉!
카카카캉!!!!
그에, 언동생들이 번갈아 덤벼드는 벌떼처럼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순식간에 수십 합이 쌓여나가는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고뇌를 거듭했다.
‘내 몸을 잡아당기는 이 무거움을 떨쳐내지 못하면… 아무런 피해 없이 장철한을 상대해낼 수가 없다.’
사부님은 그냥 되었다고 하셨지만.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라는 것인데… 가만. 그냥 되는 일은 없다고?’
어찌 보면 이는 심검을 마주하며 빠지게 된 심마였다.
그렇다면, 해답 역시 심검을 마주했던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선은 정관.’
정관을 통해 상대와 아군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고.
동시에 내려지는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찰나의 시간을 더욱더 쪼개어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판단을. 내가 검을 휘둘러 온 시간을 오롯이 믿는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결심을 세우니.
장철한의 움직임 앞에서도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화르르르-
그렇게 늘어지는 시간 속에, 언동생들과 장철한의 검이 불꽃을 튀기는 찰나 속을 헤집고 들어간 나는.
쌔애애애애애애-
전에 없이 강렬한 파천의 기운이 감긴 회한을 장철한의 검을 향해 휘둘러 냈는데.
그러자, 귀를 때리는 폭음과 함께 사부님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콰콰콰콰콰콰오오오-
- 파천분해(破天奮海). 하늘을 깨는 검은 대해마저 떨쳐 버릴 수 있으니, 남악의 염화 따위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될 뿐이지.
모든 것을 사를 듯이 넘실거리던 장철한의 검에 붙은 염화가 촛불처럼 꺼져버렸고.
회한을 비롯해 언동생들이 쥔 병장기들이 일제히 장철한의 목에 닿았다.
채채채채채챙!
그러자 장철한이 허탈하게 웃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것 참… 이래서야 진짜 발바닥을 핥아야 하는 인간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