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35화 (435/444)

제435화. 물결 (9)

장철한을 제압해 낸 직후.

나와 언동생들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안위를 확인했다.

“하아. 하아. 다들 괜찮냐?”

“후우우. 빈도는 괜찮습니다.”

“원철 스님은 입에 핏자국이 있는데?”

“저도 괜찮습니다. 내상으로 인한 토혈은 아니고. 랑야검이 내지른 주먹을 정통으로 맞아 입술이 좀 터졌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숨을 돌리고 있은 지 잠시.

“누가 달려오는 것 같은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기에 고개를 돌리니.

때마침 우소릉이 입을 열었다.

“언 가주님이랑 무당 오협 선배님들이신데요?!”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명한 도사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목청을 높였다.

“멈춰! 멈추시게! 랑야검은 적이 아닐세!”

그런 명한의 말에, 천장호는 장철한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적이 아니면 뭔데요? 저희는 이래저래 터지고 베이고! 특히나 우리 막내 장선이는 핏줄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

그런 천장호의 말에, 장철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흠. 이렇게 꼼짝없이 제압을 당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내가 검 한 자루 다루는 솜씨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몸일세, 그 힘 좋은 친구는 멀쩡할 거야. 피가 촥 하고 튀긴 했지만 그게 또 기술이거든.”

그런 장철한의 말에, 당옥기는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어… 저 말이 맞긴 해. 나도 놀라서 살펴봤는데, 선이가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어서 몰린 피가 뿜어져 나왔을 뿐. 상처 자체는 얕더라.”

그러자, 천장호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언성을 높였고.

“아니 그래서 왜 이런 짓을 한 건데요? 적이 아니라니까 더 이해가 안 가는데요?”

장철한은 다시금 멋쩍게 입을 열었는데.

“괴룡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천하에 파다하기에 궁금증이 좀 도져서 말이야. 내가 또 궁금한 건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하성이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연통을 하시죠! 용운 형님이고 저희고 그런 연통을 마다하는 사람도 아닌데!”

“자네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학관이랑 불편한 사이라서 말이야.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뭐, 놀랐다면 미안하네.”

“놀랐기도 놀랐지만 지금 이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 대횐데! 무림공적 되고 싶으세요? 궁금하다고 이런 짓을 벌이시다니 어른 맞습니까?!”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 많이 듣네.”

“으아악! 이 사람 진짠가 봐요. 우승 직전이었는데!”

그런 은하성의 말에, 천장호는 격하게 동조했다.

“이보십쇼 장철한 선배님. 차라리 마교의 제안에 잠시 혹했다고 하십쇼! 그럼 보람이라도 있지!”

“내 말이! 고생만 진탕하고 이게 뭐야!”

나는 그런 녀석들을 다독였다.

“됐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냐.”

물론, 내가 초연할 수 있었던 데는 천무대회의 목적 자체는 달성이 됐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는데.

‘곤륜과 화산의 내심도 확인했고… 이번 일을 빌미 삼아 장철한을 어떻게든 눌러 앉히기만 하면 천무대회를 개최한 보람은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던 모양인지.

남궁영이 은하연을 향해 소곤거렸다.

“용운 선배 입꼬리가 묘하게 말려있는데요?”

“그러게. 보통 언 공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누굴 굴려야겠다고 생각을 할 때인데… 랑야검 선배님은 지금 본인이 어떤 인간한테 코가 꿰인 건지 알긴 알까?”

그런 은하연을 향해 내가 한마디를 하려는 때.

제갈설지가 아버지와 무당오협을 향해 눈을 흘기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근데 좀 이상하네요. 곤륜의 연락을 받고 오신 거라기엔 그들이 보이질 않고, 신발도 전혀 젖어 있으시지 않은 게… 어디 망루 같은 곳에서 저희가 곤경에 처한 걸 지켜보고 계셨나요?”

그런 제갈설지의 말에, 장철한을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던 언동생들의 눈빛이 일제히 아버지와 무당오협 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이들이 저마다 뜨끔한 표정을 지어 보이길 잠시.

“으음. 그, 그게 말일세.”

“큼. 크흠.”

여태 숨을 고르고 있던 명영이 마지막 숨을 몰아내곤 입을 열었다.

“후우. 제갈설지 생도의 말이 모두 맞아. 내가 그러자고 했지.”

“지켜보고 계셨다고요? 언제부터요?”

“거의 처음부터일걸세, 목함을 곤륜에게 넘기는 것도 보았으니까.”

“…왜?”

“…왜 지켜만 보고 있었냐 하면. 자네들이라면 랑야검과의 대결에서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괴룡이 요즘 수렁에 좀 빠져있는 것 같아서, 어쩌면 그걸 벗어날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주님과 사제들을 내가 말렸다네.”

명영은 그렇게 제갈설지에게 답을 하고는, 언동생들을 한 명 한 명 응시하며 사과를 전했다.

“놀랐다면 미안하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지긋이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괴룡은 수렁을 빠져나온 듯하구만.”

그런 명영을 향해 나는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평생의 공력을 전해주셨음에도 후배가 아둔해서 걱정을 끼친 듯합니다.”

그런 내 말에, 무당의 무각을 책임지는 명일이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는데.

“보아하니 심검을 마주하는 경지에 완전히 올라선 것 같은데. 자네가 아둔하면, 강호인 중 대부분이 칼을 빼 물거나 쥐구멍에 들어가야 할 걸세.”

그 말에 아버지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입꼬리를 씰룩이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테니 웃고 싶으면 크게 웃으면 될 일인데… 네 아비는 꼭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저게 체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    *    *

나와 언동생들은, 조우한 어른들과 함께 단강구의 북편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본디 결승점에 해당했던 곳에 도착해보니.

대회 운영위원을 맡은 교수님을 필두로 다른 무림명숙들이 모두 선착장에 나와 있었는데, 그들 중 우리를 향해 말을 건넨 이는 뜻밖에도 곤륜의 덕성자였다.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는 아니었던 모양이더군.”

“예.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후배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나는 정중히 포권을 돌려주었는데.

그러자, 덕성자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우리를 향해 깍듯이 포권을 해왔다.

“감사는 무슨. 되레 내가 자네들에게 사과해야 하네.”

“어르신. 갑자기 이게 무슨….”

“미안허이. 편협한 생각으로 자네들의 의기를 폄하했고, 그로 말미암아 추태를 보였네.”

“…….”

“말 몇 마디로 이미 뱉은 말과 보인 행동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으나. 이 사과는 진심으로 하는 것일세.”

그리고는 우리가 맡겼던 목함을 다시 내밀어왔다.

“이 목함의 주인은 자네들일세.”

그 목함을 내가 받아 들자.

경혜가 빙그레 웃으며 대회의 우승자를 선언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우승조가 정해진 듯하군요. 그럼 대회 주최자로서 선언토록 하겠습니다. 천무대회의 우승자는….”

그런데 이때.

모여있는 인파를 가르고 나오며, 누군가가 고함을 내왔다.

“잠까아아안!!!”

그 소리가 터져 나온 곳엔, 종남의 장문인 황백월과 휘하의 유운검수들이 거지꼴을 하고 서 있었고.

유일하게 멀쩡한 차림인 백본회의 부회주 장손립이 그 옆에 서 있었는데.

장손립이 황백월에게 무언가 전음을 전하는구나 싶더니.

황백월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인정 못 합니다! 이는 잘못된 대회입니다! 대회를 다시 열든! 이번 대회를 무효로 돌리든 해야 합니다!”

그런 황백월의 말에, 제갈척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대회를 치르는 중에 뜻밖의 소란이 있긴 했네만. 목함을 손에 넣었던 두 참가조의 동의하에 양보가 이루어진 것이거늘… 진즉에 대회에서 이탈한 자네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러자 황백월이 나를 가리키며 격한 목소리를 내왔다.

“언용운 저 녀석이 입관시험을 치를 적에 받았던 시험 과제가 이번 천무대회 과제와 비슷했다지요?”

“…….”

“당시 저 녀석이 한 말이 아직도 입관시험을 준비하는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음을 압니다. 마인에게서 영단을 지켜냈더니 그 영단에 눈이 돌아가 동료의 등에 검을 꽂으려 드는 이들은 호서배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확히 뭔가?”

“언용운이 이끄는 조는 최초에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만인혈을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아군을 공격한 행동은 뭡니까?! 네가 직접 설명해봐라 언용운!”

그런 황백월의 말에, 나는 엷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명분을 말씀드리자면, 어제부터 계속 잡아먹을 듯이 구시기에. 애초에 아군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뭐라?”

“이는 종남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

“사실 제가 의심이 좀 많습니다. 이렇게 목함을 돌려주신 곤륜의 제자분들께도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 목함을 맡길 때도 장호에게 두 가지 지시를 내렸었죠. 안 그러냐? 천장호?”

“예. 곤륜의 제자들이 랑야검 선배가 공격해온 상황을 걱정하면 목함을 맡기고, 그렇지 않다면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요.”

“종남의 배를 가라앉혔을 때도 비슷했습니다. 전날 밤부터 저희를 탐탁지 않아하시기에, 여기 있는 정원해 생도하고 신호는 맞춰놓았지만. 노골적으로 살기를 보내오지 않으셨다면 공격 신호를 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내 말에.

유운검수 중 몇몇이 황백월의 소매를 붙들며 입을 벙긋거렸는데.

“장문인. 이만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 실제로 저희가….”

황백월은 그런 제자들의 손길을 뿌리치더니.

“시끄럽다!”

사방을 향해 삿대질을 시작했다.

“하!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알겠구만! 화산의 창량 교수도 언용운을 싸고돈 지가 오래되었지요?!”

“싸고돌다니요. 장문인 말씀이 심하십니다.”

“아니면 매화검수들이 목함을 왜 양보합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론 큰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중단하는 게 맞는 대회를 계속 강행하더니만. 이렇게 언용운을 우승자로 세우려고 하십니다그려! 백도의 젊은 영웅을 만들어 내려고 다들 작당을 하셨소이다!”

그런 황백월을 향해 남궁원은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황 장문.”

하나, 황백월은 남은 말이 있다는 듯 손바닥을 내보이며 계속해 말을 이은 뒤에야 남궁원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런 억지에 휘말려 장강의 앞 물결처럼 밀려 사라지라는 것입니까?!”

그런 황백월의 말에, 남궁원은 긴 한숨과 함께 재차 입을 열었다.

“장강의 앞 물결과 뒷물결은 결국 대해에서 만나기 마련인데, 어찌 보듬어 합쳐질 생각은 하지 않고 밀려날 생각만 하시는가? 그리 벽을 세우니 밀고 밀려남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자네일세. 하나, 나는 사람은 억지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네. 믿기지 않아서, 체면이 상해서 부끄러워서 순간을 모면하고자 등등 갖은 이유로 억지를 부릴 수 있지. 그러나 본인이 부린 억지에 세상을 맞추고자 한다면 더 큰 억지를 부려야 하네.”

“…검황 선배도 괴룡을 감싸시려는 겁니까?”

“이건 괴룡을 감싸려는 게 아니라, 자네가 심마에 빠지는 것을 걱정하는 충고일세. 그렇게 크고 작은 것을 뒤틀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잃게 된다네. 그쯤 하시게,”

“…….”

“내 말이 크게 와닿지는 않는 모양이군. 그럼 달리 말하지. 자신 있는가?”

“…무슨 자신 말씀입니까?”

“괴룡의 적이 될 자신이 있냐고. 나날이 강해지는 새파랗게 젊은 재능을 적으로 돌리고. 이 녀석을 아끼는 이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고. 자네의 억지를 기어이 관철시킬 자신이 있는가?”

“…….”

“세상엔 자존심보다 중요한 게 많네. 어린 제자들과 도동들의 숟가락에 오를 양곡일 수도 있고, 민초들의 삶일 수도 있지. 자네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가?”

“…….”

그렇게 황백월의 입을 다물게 만든 남궁원은 이윽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전례를 찾기 힘든 재능이나, 아직 너는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짊어지기엔 무위가 부족하다.”

“…알고 있습니다.”

“성정 역시 모난 구석이 있다. 너를 위해서라면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이도 있지만, 네 방식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이도 많다.”

“…그것도요.”

어쩐지 꾸중하시는 듯하여 조심스럽게 대꾸하고 있기를 잠시.

남궁원은 내 어깨에 턱하고 손을 올리며 어조를 바꿨다.

“하나 적이 된다 생각하면 두렵기 그지없다. 눈썹이 하얗게 셀 동안 강호에서 버텨낸 덕에, 적수로 여길만한 이가 몇 없게 된 나지만. 이 젊은 검수가 내 적이 된다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하여, 나는 여기 있는 이 젊은이를 무적검(無敵劍)이라 부르면 어떨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신가?”

그러자, 무적검을 연호하는 소리가 사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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