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뭐가 남습니까 (1)
나는 회랑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며 공손무결에게 물었다.
“장 선배의 일로 저를 데리러 오셨다는 건… 그 양반이 볼일 다 봤으니 떠나겠다. 뭐 그런 태도를 보였나 보군요?”
“맞다. 후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두(爆豆)같은 성정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정도 고수는 어쨌거나 큰 전력 아니냐?”
“한 사람의 전력으로서도 그렇지만, 외에도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죠.”
“그렇지. 우선은 학관을 박차고 나갔던 친구니까.”
“재야의 무림인이기도 하시고요. 어떻게 매듭을 짓느냐에 따라 다른 기인이사들이 무림맹이나 정무학관의 문을 두드리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오냐. 사무국에 있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다. 해서, 무림맹이든 학관이든 눌러 앉히려 했는데… 일단은 설득에 실패했다. 고집이 쇠심줄이야.”
“누구누구 계셨는데요?”
“나와 동도회주님에, 총장님. 아, 그리고 랑야검의 조사를 거들었던 명태성 각주. 이렇게 있었지.”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며 후원의 회랑을 벗어난 우리는 다시금 본관 안으로 들어섰는데.
공손무결이 계단이 아닌 연회장 쪽으로 향했기에, 나는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맹주님? 사무국은 위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약왕 어르신도 모시고 갈까 해서 말이야.”
나는 잠시 오균천의 성정을 상기해보았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그냥 저희끼리 가보시죠.”
“음? 도움이 되지 않겠나?”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약왕 어르신이 장 선배한테 오 년 동안 나름대로 세상에 나오라고 조언을 하신 모양인데도. 자기 고집을 관철한 게 장 선배 아닙니까?”
그런 내 말에 공손무결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야 그렇지.”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약왕 어르신이 본심과는 달리 말씀을 거칠게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지금 상황에선 역효과일 것 같습니다. 또 우르르 몰려가면 괜히 장 선배의 반골 심리를 찌를 수도 있을 듯하고요.”
“흠.”
“약왕 어르신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최후의 보루라… 하기야, 이야기가 잘 안 풀려서 랑야검이 다시금 방랑생활을 시작한다면, 오늘 우리 패를 다 쏟아내는 것보다는 비빌 언덕을 하나쯤 남겨 놓는 게 좋겠군.”
“그럼 위로 가실까요?”
“거, 녀석 참. 든든하다고 해야 할지… 가만 생각해 보면 검황 선배가 새롭게 붙인 무적검이라는 별호가 딱 들어맞아.”
* * *
공손무결과 나는 사무국이 위치한 층으로 이동했다.
달칵-
회의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갈척과 경혜 그리고 명태성이 눈인사를 해왔는데.
동시에 장철한이 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왔구만! 무적검!”
“예. 선배님.”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갈 때 가더라도 이번 일의 당사자와 앙금은 풀고 가라고 하셔서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러겠다 했네. 그… 미안하게 됐네. 내가 원래 어딘가에 꽂히면 그것만 생각하지, 전후좌우 다른 걸 잘 살피지를 못해.”
“더러 그런 사람이 있죠.”
“그래. 흠흠. 뭐, 그래도 결과적으로 자네들이 우승도 했고. 멋들어진 별호에, 뭇사람들이 새로운 천하십검이 섰다고 칭송하고 있잖나? 이번 일은 이해를 좀 해줘.”
“예, 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선 장철한의 말에 동의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장철한은 됐냐는 듯 다른 어른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됐지요? 이러면 제 볼일은 끝 아닙니까?”
그 시선을 받은 어른들은 나를 향해 눈과 코를 찡그려가며, 왜 그렇게 쉽게 인정하냐는 듯한 의사를 표해왔는데.
“허흠.”
“으음.”
나는 그분들보단 장철한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장철한은 결코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섭섭한 기색이 있었는데.
혹여라도 혼자만의 억측으로 일을 그르칠 순 없었기에, 나는 사부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뭔가 아쉬워 보이지 않습니까?’
- 그래 보이긴 하는구나? 묘하게 풀 죽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흠. 자리하고 계신 어른들을 향한 섭섭함은 아닐 테고.’
그야말로 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장철한의 성정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럴 리 없었다.
‘그렇다고 저한테 섭섭함을 느낄 사이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본인이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여, 난 일부러 그 점을 후벼파는 말을 던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고 가시면 선배님의 인생에는 뭐가 남습니까?”
그런 내 말에, 잠시 뜨끔한 표정을 짓던 장철한은 이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름자나 들어봤을 뿐이고. 학관을 박차고 나가셨다는 이야기 정도만 알뿐이죠. 해서 이런 식으로 찾아오실 줄도 몰랐고요.”
“한데 그런 말을 해?”
“그래도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대회 중에 합을 섞으며 얼마만큼 검에 진심이셨는지를 알게 되었고. 당장에 처한 상황이 선배님께 당혹스럽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뭘 안다고.”
“저희에게 제압당하시던 순간. 본인 입으로 그러셨지 않습니까. ‘이래서야 진짜 발바닥을 핥아야 한다고.’ 그 대상이 저 아닙니까?”
“그, 그건 그 순간에 약왕 어르신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그냥….”
“하필이면 그 말이 생각나셨다는 것 자체가. 선배님의 마음을 관통했다는 거로 생각합니다.”
“…….”
“제 입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럽지만. 일층의 연회장에선 제 이름과 무적검 소리가 연호되고 있습니다. 뭐, 무적검이야. 정말로 제가 천하제일검이라는 뜻으로 붙은 말은 아니니 그러려니 합니다만. 천하십검 소리는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장철한의 말문을 막은 나는 계속해 이야기를 잇기 시작했다.
“사실 천무대회에서의 싸움은 저랑 선배님 둘이서 자웅을 겨룬 건 아니지 않습니까?”
“…….”
“하지만 이렇게 장 선배가 다시금 초야로 돌아가고, 몇 달만 지나면 사람들은 저를 천하십검의 일인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내 말을 축약하면, ‘꼬우면 남아서 증명하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외골수라도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장철한은 고민에 들어갔다.
좁혀진 장철한의 미간을 확인한 나는, 그가 방랑생활을 고집하는 원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학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마침 여기 명태성 각주님이 계시네요.”
“…응? 나 말인가?”
“예. 각주님께선 제가 입관 시험을 치려고 할 때. 말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내 말에, 명태성은 경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타격대에 인력난이 있던 시절이라….”
“괜찮습니다. 빈니도 사정을 모르지는 않으니.”
“흠흠. 무적검의 말이 맞습니다. 안에서 패거리가 극명하게 갈린다고, 명문대파의 정명한 후기지수가 아니면 불리한 환경이라 검을 꺾는 이가 부지기수니. 시험에 응시치 말고 바로 무림맹으로 가자고 했었죠. 선배님께서도 정무학관 참가조의 면면을 보셨겠지만. 지금의 정무학관은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 이야기에 힘입어 나는 본론을 시작했다.
“지금의 정무학관은 선배님이 무언가를 남기시기에 적당할 겁니다.”
그러자 장철한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무언가를 남긴다?”
“감히 짐작해보건대, 선배님께서는 정무학관을 박차고 나온 본인의 선택과 남악검파의 이름을 어떻게든 천하에 새기고자 검을 벼르는데 열중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거든요.”
“자네도 그렇다고? 하지만 자네는 진주언가의 후계자가 아닌가?”
“검수로서의 저 말입니다. 몸에 흐르는 피야 진주언가에서 왔지만, 제 별호는 무적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묻는 장철한을 향해 가볍게 답한 뒤.
나는 파천검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도회주님, 총장님, 맹주님. 이렇게 세 분은 제 사문에 대해 짐작하고 계실 텐데. 제 검은 위철진이라는 분에게서 기인했습니다.”
“…검마 위철진?”
“예. 제겐 사부님이 되신다고 보면 되는데. 그분의 삶과 작금의 현실을 보며 저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름은 천마신교에서 추존되며 금언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름만 덜렁 남기면 잊히고 왜곡되며 마모됩니다. 하니, 사람을 함께 남겨야 합니다. 평생을 바쳐 벼려낸 의지와 검을 이어갈 사람을요.”
내가 말을 마치자, 좌중엔 묘한 정적이 흘렀는데.
그러길 잠시, 경혜가 그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어떤가요? 랑야검이 원한다면, 절차는 빈니가 어떻게든 해주겠습니다. 자퇴생이긴 하나 강호에서 쌓은 명성과 협행의 행적들을 고려하면 교수직을 맡기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
“괜찮지 않습니까? 학관에 남아 있다 보면 마땅한 후인도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거고… 때마다 언 회장이랑 승부도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
장철한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확실하게 하자! 달에 한번은 붙기로!”
이것으로 끝이었다.
내가 던진 이야기들은 일단 물은 이상 뱉을 수 없는 미끼였으니까.
“저 바쁩니다.”
“그, 그럼 분기에 한번?”
“반기에 한 번. 그것도 무조건은 어렵고 붙을 수도 있다 정도로 하시죠.”
“뭐야 그거. 내 쪽이 영 손해인 거 같은데?”
“그냥 가시려던 분이 손해가 어디 있습니까? 손해는 선배님께서 갑자기 대회 중에 난입하시는 바람에 관객들에게 팔지 못해 쌓여있는 학관의 특산품들이 손해죠. 그것도 계산할까요?”
“큼. 커흠.”
그런 내 말에, 장철한은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고.
제갈척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수염을 쓸었다.
“껄껄껄. 그래. 이래야 언용운이지.”
그런 제갈척을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따로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종남이 가버리긴 했지만. 기왕 이렇게 무인들이 모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천무대회를 통해 심신을 수양하는 것과 적을 상대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고요? 저희보다 나은 신법을 가진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졌고. 익숙지 않은 지형에선 본 실력들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밝혀졌고요?”
“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이렇게 하시죠.”
* * *
동도회주와 정무학관의 총장 그리고 무림맹주 앞에서 내가 한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하여, 후야제가 끝난 다음 날.
“언 형.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모였어요.”
화산의 매화검수와 곤륜의 운룡검수, 그리고 소림의 제자들을 비롯한 천무대회의 참가자들은 각자의 문파로 돌아가는 대신 정무학관의 대연무장에 모여 서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모여선 각양각색의 무복들을 응시하며 손에 든 빨간 모자를 눌러썼다.
푸욱-
그러자, 매화검수들의 고개가 창량을 향해 돌아갔다.
알음알음 빨간모자에 관한 풍문들을 들은 모양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왜 이 자리에 서 있느냐는 표정들이었다.
하나, 창량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대, 대사백!”
그에, 화산파의 제자들 중 한사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배신감을 표출하는 때.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던 장철한이 대놓고 입을 열었다.
“나, 나는 교수직을 수락했는데… 어째서?”
동시에 웅성이기 시작한 좌중에, 나는 쿵! 하고 발을 구르며 고함성을 내질렀다.
“지금부터 이 연무장엔 배분도 연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교관과 교육생 그리고 정무학관의 정신으로 거듭나느냐 아니냐만 존재합니다!”
“…….”
“당연히 어째서란 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나를 겪어본 소림의 제자들이 절도있게 입을 열었고.
“악!”
이어 다른 교육생들도 눈치를 보며 답했다.
“…옙!”
“복명복창을 제외한 대답은 악! 으로 통일합니다! 다시 대답!”
“악!”
“교육생들 개개인은 고수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지 모르나. 이대로는 마인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그 점을 천무대회에서 십분 느꼈을 텐데. 낮에는 수련을, 밤에는 마인들에 대한 수업을 듣는 기간을 거쳐 올빼미들과 대머리독수리들은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악!”
“알겠으면 무당산 해검지까지 뛰어간다, 실시!”
“시, 실시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