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뭐가 남습니까 (3)
나는 사부님께 파천검문의 전인이 나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재차 물었다.
‘사부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 나야 괜찮고 말고가 없지. 증오스럽던 상대는 물론이고 내 육신도 세월 속에 바스러졌는데.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것이냐?
사부님께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을 하셨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괜찮고 말고가 없죠. 사부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으니까요.’
그에, 나도 같은 마음이라는 말을 전하니.
사부님께서는 헛기침을 해오셨다.
- 크흠! 만날 나더러 그리 살아서 좋냐는 소리를 하던 녀석이, 뜬금없이 낯 간지러운 소리를 하는구나! 닭살 돋는다 인석아!
‘그건 그냥 하는 소리고요. 제 취향과는 방식이 조금 달라서 따라 하지 않을 뿐. 사부님의 인생 자체는 존경합니다. 거짓말 아닌데요?’
- 큼! 크흐흠! 내 말은 네 녀석이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었느니라.
‘그럼요?’
- 그냥 뭐… 아무튼! 어쨌거나 네 녀석이 내 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일대에 파란이 일어날 성싶은데? 알음알음 짐작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만, 그래도 완전히 밝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아니냐?
‘그렇겠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래저래 논의를 좀 해봐야죠.’
사부님의 허락은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언동생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천마신교 녀석들을 끌어낼 방도가 있을 것도 같다.”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은하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고.
“당분간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자들을 끌어내려면 평범한 방법은 아닐 것 같은데… 일이 산더미 같이 쌓일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긴 하지만, 물을게요. 뭔데요, 그 방도라는 거?”
“내 정체를 밝히는 거요.”
가만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영과 장선이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정체를 밝힌다고요? 천하에 용운 선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그러게? 저 멀리 은하군도 사람들까지 다 알 텐데요?”
“정확히는 내 사문을 밝히겠다는 거다. 이중에도 제대로 아는 녀석이 드물 텐데. 내 검은 사실 천마신교와 뿌리가 같다. 검마 위철진. 그분에게서 출발한 거니까.”
내가 녀석들의 물음에 답하자.
독고철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니. 단순히 혈교의 일파라고 하시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긴 했습니다. 혈교의 일파셨던 게 아니라… 검마의 후인이셨군요.”
그동안 다른 언동생들은 저마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
“용운이가 검마의 후인이었다고? 나는 전혀 몰랐는걸?!”
“소천 형이 아는 게 뭐 얼마나 된다고. 당연히 몰랐겠죠. 우리도 몰랐는데!”
물론 내 사문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녀석도 그중에 끼어있었다.
소림과 파천검문의 앙금을 매듭짓던 날, 신승의 제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원철이 바로 그 장본인이었는데.
녀석은 어째선지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흠흠. 다들 모르셨습니까? 무적검의 곁을 오래 지켜오신 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것 참. 소승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자, 천장호가 불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고.
“죄송하다는 사람치곤 입을 흐물거리시는 게. 은근히 열받는 표정이네. 안 그런가 하성이?”
“은근? 대놓고 속세에 물든 웃음인데? 자기가 용운 형님의 오른팔은 아니라도 왼팔 정도는 된다는 듯한 그런 표정이야… 저 사람도 누구 따라서 점점 스님이 아니게 되어가는 거 같네.”
그런 은하성의 말에, 정현이 한마디를 하는 때.
“은 소협? 혹시 누구 따라서의 누구가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당옥기가 각탁을 팡팡 두드리며 입을 열더니.
“캭!!! 바보들아!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
잠시 옆으로 샜던 이야기를 원래 궤도에 얹어 놓았다.
“언용운. 그거 그렇게 말해도 괜찮아? 마방연의 연구자료에서 본 바로는 곤륜논검에다가 개방의 제자들까지 얽히고설키고 복잡하던데? 그치, 설지야?”
“응. 그치만 지금에 와서 개방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야. 강골개 어르신도 그렇고 노삼 교수님도 그렇고 옛일에 연연하실 분들이 아니니까. 같은 이유로 우리 가문도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소림과 무당이 어찌 나올지….”
나는 그렇게 이어지는 제갈설지의 말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소림이랑은 공덕대사님을 통해 나름대로 매듭을 지었소. 그래서 원철 스님도 알고 있는 거고.”
“아? 그런가요?”
“그렇소. 풀었다고 하긴 뭐하지만, 무당도 명영 선배님을 통해 이야기가 끝났고.”
곁에 있던 팽소진이 한마디를 더한 건 이때였는데.
“그 두 문파하고 이야기가 됐다면야… 문제 될 것 없지 않나? 곤륜논검의 마지막 당사자는 우리 팽가의 선조님인 단천도제 할아버지신데. 우리 아버지가 그 일로 용운이를 괴롭히시지는 않을 테고?”
은하연은 그 말은 틀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가 싶더니.
“꼭 그 일과 관련 있는 사람들만 언 공자를 괴롭히라는 법은 없죠. 전혀 관계없는 이들도 이때다 싶어 음해를 해올 수도 있잖아요?”
이내 곧 이채를 띄는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그런데 언 공자가 그런 인간들 신경 쓰는 성정도 아니고. 아무리 천마신교가 잠자코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손 치더라도… 언 공자가 나서서 본인이 진짜고 너희들은 가짜라고 한다면? 솔직히 마인들 중에 이거 참을 수 있는 사람 있을까 싶네요? 저는 찬성이요.”
* * *
언동생들의 의견은 전원 찬성이었다.
하나, 내가 파천검문의 후인임을 밝히는 일은 나와 언동생들의 뜻만 가지고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선조치 후보고의 수법은 이번엔 못 쓴다.’
만천하에 내 정체를 밝히려면 소식지를 사용해야 할 텐데, 그리하면 어차피 곧바로 알게 될 일이었거니와.
‘사부님과 은 소저의 말이 맞아.’
그 사실을 실은 소식지를 날리는 즉시 강호의 일대에 파란이 일어날 게 자명했다.
‘백도와 흑도에서 평소 나를 탐탁지 않아 하던 이들은 고개를 쳐들 것이고.’
천마신교는 그야말로 이를 갈며 십만대산 밖으로 나올 터였다.
하여, 내겐 동도회의 간부들과 정무학관의 운영위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었는데.
그를 위해 모여달라 청을 드리니, 아직 학관에 남아 계시던 동도회의 어른들이 금세 모여주셨다.
“말학의 요청에 흔쾌히 모여주셔서 감사… 음. 약왕 어르신도 계시네요?”
한데, 그 틈바구니에 약왕 오균천도 끼어있었다.
“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냐?”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이런 일은 질색하셨던 것 같아서요.”
“질색이기는 하다만, 동도회의 뜻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만한 무인들이 모이면 피바람이 부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여 끼여 앉았다.”
나쁠 것은 없었다.
앞으로의 싸움은 피가 흐를 수밖에 없었으니, 오균천의 조력은 꼭 필요했으니까.
그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언동생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쭉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가장 먼저 아버지가 무거운 입술을 떼어냈다.
“가문에서 쫓겨나던 시기에 그런 연을 맺었구나.”
그러자, 곁에 있던 명영이 한마디를 더했는데.
“마인들이 그를 본인들의 시조로 추존하여 백도에선 금언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의 생은 정도의 무인들에게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정도란 무엇인지를 고민케 했으니까요.”
듣고 있던 공손무결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확실히 마인들이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이야기이긴 하구나. 하나, 누가 됐든 독이 바짝 오른 상태일 거다. 함부로 결정한 일은 아닌 듯하구나.”
“예. 저도 무작정 실행에 옮기겠다는 건 아닙니다. 이 계획을 바탕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를 토대로 충분히 계산해봐야죠. 마인들이 움직인다면 누가 어떻게 움직일지 같은 걸요. 그런 뒤에 타당하다 생각되면 추진할 생각입니다.”
뒤를 이어.
남궁원도 한마디를 더했다.
“마인들도 마인들이지만, 내부의 화살도 따를 것일세. 예컨대 종남만 해도 씩씩거리면서 단강구를 떠났네. 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나는 그 점은 충분히 고려했는지를 묻고 싶은데?”
그에 나는 남궁원을 향해 되물음을 던졌다.
“어르신, 제게 검을 가르쳐주실 때. 제 무학의 내력을 얼추 짐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하나 얼추 짐작하는 것과 본인이 자복하는 것은 천지 차이 아닌가?”
“제 말은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저를 기꺼워하시는 분들이니, 제 검에 의문이 드실 때 덮어두셨지만. 저를 힐난하고자 하는 무리는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파고들 것입니다.”
“…일단 계속해보게나.”
“언젠가 밝혀질 일이라면, 저희 쪽에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 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제갈척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백도무림 내부의 화살이 무서워서 시기를 놓치는 것은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않는 일이야. 하여, 이 계획을 실천한다 치면 어떤 방식으로 알리려는 것이냐?”
“소식지를 사용할 생각입니다.”
“소식지에 언용운이가 실은 검마의 후인이다는 이야기를 싣는다라…. 흐음. 금세 퍼지기야 하겠다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겠느냐? 내가 마뇌라면 허튼수작을 부린다고 치부할성싶은데?”
“그건 제가 사부님의 의발을 이은 장소를 공개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마인들은 근 백 년간 그곳의 위치를 찾아 헤매고 있었으니까요.”
“검마의 무덤! 오호라. 그거라면 확실히 미끼가 되겠구나. 가만있자 그간의 네 행적을 생각하면 설마 그곳이 태호의….”
“예. 퇴기촌입니다. 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려면… 맹주님께 말씀드린 계산도 필요하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옮기는 일과 하오문에 미리 기별도 넣는 일들도 필요할 성싶네요.”
그런 내 말에 자리한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왔는데.
그중 약왕 오균천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어왔다.
“랑야검 그 망종이 학관에 남겠다 했지. 어찌 그런 결정을 했냐 물으니. ‘본인의 인생에 무엇이 남느냐를 고민했다.’ 하는 소리를 하기에. 네놈 대가리에서 나올 생각이 아니라 책하니, 용운이 녀석에게 물어보라는 소리를 하더니만… 이런 이야기였나.”
그렇게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린 오균천은 경혜를 응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도 당분간 학관에 머무는 게 좋을성싶은데. 경혜사태. 이 늙은이에게 연구실 한 칸 내어주실 수 있겠소이까?”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무엇을 하시려고요?”
“그 인생에 무엇이 남느냐는 말을 한 게 용운이 저 녀석 아니오?”
“맞습니다.”
“나도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일을 해봐야겠소이다.”
“하나, 약왕 어르신은 이미 혜민각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계시지 않는지요?”
“보아하니, 천마신교와의 골이 저절로 아물 것은 아닌 모양이고. 그럼 의원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소?”
“단기간에 의원을 기를 수는 없을 텐데요?”
“그야 그렇소만. 저 녀석이 주도하는 화생방훈련이란 것도 독에 조예가 있는 이를 길러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급한 상황에서 무인들이 스스로 제 몸을 다스릴 대처법을 써넣은 훈련 과목 하나 만들어 놓고 가리다.”
* * *
그렇게 동도회에서 논의되던 안건은 정확히 한 달 뒤.
청죽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에 실려 천하 곳곳에 나붙었다.
그에 모두가 예상한 대로 강호에 파란이 일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발칵 뒤집힌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십만대산이었다.
말단의 졸개부터 마(魔)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대마두까지, 만마전에 적을 둔 모든 이를 경악하게 만든 이 소식은.
마침내 만마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이름을 올린 혁련강이 들어앉아 있는 천마동에 도달했는데.
“교주님!”
본디 혁련강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자, 천마동의 초입에서 기별을 넣고 기다리던 광명좌사 변철영이 다급히 뛰어 들어와 입을 열자.
근 백 년 안에 천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사내, 혁련강이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좌사. 답지 않게 곧바로 연공실을 찾아오다니. 본좌를 찾은 이유가 뭐야?”
“추존 천마님의 무덤의 위치가 밝혀졌기로, 무례를 무릅쓰고. 교주님을 뵙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변철영의 말에.
혁련강으로서는 드물게 격한 감정을 내보였다.
“거기가 어디야? 우사를 보냈나? 지금 당장 오행기를 소집해! 내가 직접 갈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말입니다.”
한데, 변철영의 태도엔 머뭇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에 혁련강이 미간을 좁히며 재차 입을 열었다.
“초대 천마의 유지이자, 추존천마님의 일이며, 천마신공을 완벽하게 만들 일이거늘 뭘 그렇게 주저하고 있어? 할 말이 있으면 해!”
“…언용운이 자신이 그곳을 찾았으며, 그곳에서 추존천마님의 의발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