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뭐가 남습니까 (4)
천마신교의 광명좌사 변철영.
그는 눈앞의 혁련강을 제외하면 십만대산에서 비할 자가 없는 지위와 무위를 갖춘 이였다.
하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그조차 ‘언용운이 위철진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순간.
혁련강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투기를 감당하기 버거워져 버렸다.
“좌사. 방금 뭐라고 그랬어? 언용운이 뭐가 어째?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그에, 변철영은 혁련강이 달이라면 자신은 그저 반딧불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는데.
“…예. 언용운이, 본인이 추존천마님의 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녀석이 지금까지 보여온 행보를 생각해 보면. 그 주장을 얌전하게 했을 리는 없을 듯한데?”
“예. 정확하게는… 본인이 검마의 후인이며. 본교가….”
변철영으로서는 함부로 아뢰기 참담한 주제가 계속되는지라, 할 말을 고르고 있자니.
혁련강이 수라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변철영을 질책했다.
“좌사. 자꾸 말을 머금지 마. 내 인내심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그대라도 말이야.”
그에 변철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강호에 떠돌고 있는 소식지의 내용을 간추려 말했다.
“…언용운은 자신이 정명한 전인이며, 본교는 초대천마의 말을 왜곡한 사이비(似而非) 집단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그 소식지라는 것을 통해서 말인가?”
“예. 여기.”
그리고 소매춤에 넣어온 소식지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혁련강은 문구(文句)들을 붉고 푸른 안료로 요란하게 강조해놓은 소식지를 읽어 나갔다.
『충격 발표! 상상도 못 한 정체!! 언용운, 검마의 후인이었다?!!
언용운曰
-검마는 그저 스승의 일에 분노했던 외로운 검수일뿐, 절대 혹세무민을 하려던 분이 아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신봉하는 사이비 집단 천마신교가 그 뜻을 입맛대로 곡해했을 뿐.
반드시 바로 잡을 것.
추신.
천마신교에 적을 두고 있었던 초개회(草芥會) 회원들의 증언, 다음호에서 대공개!!!』
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혁련강의 손아귀에선 한 줄기 삼매진화가 일었다.
화륵-
그렇게 소식지를 단숨에 태워버린 혁련강은 이를 갈며 변철영을 응시했다.
“이거 신빙성이 있긴 한 건가?”
“세작을 통해 검증한 바로는 전혀 없는 소리는 아닌 듯합니다.”
“영감은?”
“마뇌도 추존천마님이 남기신 무공을 언용운이 약탈했다면 놈의 행적에서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풀린다고 했습니다.”
“맞다는 소리구만.”
“…정확한 확인을 위해 광명우사가 태호로 향했습니다.”
“속을 마저 고른 뒤. 만마전으로 갈 것이다. 다들 모여있으라고 해.”
“천마재림! 만마앙복!”
혁련강의 말에 이마를 땅에 찧어보인 변철영은 흩어지듯 천마동을 빠져나갔다.
* * *
천마신교의 교주 혁련강.
근 백 년 내 천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이 사내는 천마신교의 존엄이자 공포였다.
누구의 명이라고 어물쩍거릴까.
평소 광명좌사와 마뇌가 주도하던 만마전의 출석요구에 콧방귀를 끼던 이들도, 혁련강이 만마전에 친림한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대공자님께서 드십니다!”
“막내공자님께서 드십니다!”
그중엔 소교주 자리를 놓고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살아남은 두 용혈(龍血)도 있었고.
교주의 친위전력인 오행기의 수장도 있었으며.
“오행기주(五行旗主)께서 드십니다!”
“역천괴마님과 혼돈마녀님께서 드십니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본인의 왕부들을 보전해낸 두 명의 호교법왕들.
그리고 십만대산에서 군림하는 여덟 귀족 가문의 수장들까지.
“귀성팔족의 가주님들께서 드십니다!”
그렇게 천마신교를 떠받치고 있는 집단을 이끄는 대마두들이 모두 만마전에 모여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침내, 새카만 용포를 걸친 혁련강이 만마전에 들어섰다.
저벅저벅.
천마신교의 대마두들은 들어선 절대자를 향해 하나 되어 이마를 조아렸다.
“신교불패! 만마앙복!”
하나, 혁련강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지나치고는.
가장 상석에 놓인 태사의에 앉으며 말했다.
“근래 내 귀에 들려온 소식이라곤 ‘어디서 깨졌다.’ ‘뭐가 어그러졌다.’ 하는 이야기들 뿐이었던 것 같은데… 뚫린 입이라고 신교불패란 말을 잘도 지껄이는군.”
“…….”
그런 혁련강의 말에.
머리를 조아린 대마두들이 쥐죽은 듯한 침묵으로 사죄를 대신하길 잠시.
“지금까지는 어떤 이야기가 날아들든 그러려니 했어. 천마재림의 날에 이르기 전까지는 응당 고난이 따르는 법이라 생각했으니까.”
혁련강이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지금 중원에서 무슨 소리가 떠돌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
“고개들 들어. 그리고 땅에 떨어진 본좌의 체면을 어찌 되돌려 놓을지. 각자 생각들을 말해봐.”
그 말에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이는 현재 십만대산에서 가장 궁지에 몰려있는 진씨 일가의 가주 진흠량이었다.
“그래, 진가의 가주.”
혈마 진괴량이 저지른 반역의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그간 납작 엎드려있던 진흠량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혁련강과 동족들의 노여움이 조금이라도 가시길 바라며 가장 먼저 운을 뗐다.
“추존천마님의 존함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자들의 혓바닥을 도려내고, 그 원흉인 언용운을 잡아 오체분시를 해야 하고 정무학관을 불살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새어 나온 이야기는 방도라기엔 부족했다.
그저 의지를 표현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나, 논의를 시작하는 효시로 삼기엔 나쁘지 않았기에 혁련강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진흠량에게 교주의 진노가 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자, 자리한 이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진 가주. 현실적으로 언용운을 잡아 오체분시를 하는 게 가능하겠소이까? 동도회의 연락소다 뭐다, 백도의 대응이 예전과 달리 기민해졌소이다. 그 때문에 만마전에서도 장기전의 뜻을 세운 것이 아니겠소?”
“제 생각도 연 가의 가주님과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본보기를 삼자면 곤륜이나 서녕(西寧) 정도가 적당하지, 그 이상 중원으로 파고 들어가서는 정작 얻는 것 없이 실만 안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마전의 회의는 금세 진흙탕 같은 갑론을박으로 치달았다.
“그리 안온한 태도로 대산 밖으로 나갈 수 있겠소?”
“맞습니다! 평생 이 척박한 땅을 파먹으며 귀족입네 거드름을 피우고자 하는 게 저치들의 속내이니 저런 생각밖엔 못 하는 것이지요!”
교주에게 절대복종한다는 점만 같을 뿐.
십만대산의 마두들 역시 제 잇속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속한 집단의 전력을 온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십만대산에서 쌓아온 앙금들이 있었다.
특히 그 같은 마음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소교주위 쟁탈전의 여파로 더욱 심화가 된 듯했는데.
이 와중에 가장 기세등등한 사람은, 언용운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마옥군주 연옥란이었다.
“깔깔깔! 정작 그러는 다른 가주님들도 일선에 나가본 적이라곤 없으시면서, 잘도 그런 소리들을 하시네요?”
그렇게 연옥란은 누구에게서 떼어 붙였는지 모를 새파란 섬섬옥수를 꼼지락거리며 자리한 이들을 쏘아붙였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그랬나요? 언용운이 본교 행사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그랬지요? 힝. 원래 내 손이 훨씬 예뻤는데.”
그 말을 듣고 있던 귀성팔족의 일원 중 한 명은, 지금 만마전에 누가 와있는지를 일순 망각하고 노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는데.
“마옥군주! 지금 만마전과 귀성팔족의 결정을 능멸하는 것이냐?!”
이때.
만마전 안의 대기가 빨려들 듯 혁련강 쪽으로 모여드는가 싶더니.
그가 앞에 놓인 각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콰아아앙!!!!!!!!!!!
그러자 모두가 둘러앉아 있던 각탁이 한순간에 먼지로 바뀌어버렸고.
그에 자리한 대마두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
“!!!”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마전에 놓인 각탁은 단단하기가 강철과 같다 하여 동금석(同金石)이라 불리는 석재로 만든 각탁이었다.
어느 누가 전력을 다해 친다고 해도, 단숨에 가루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한데 혁련강은 금이 가는 순간조차 없이 각탁을 단숨에 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누구도 그 힘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절까지 해냈다.
“…교주님의 천마신공이 마침내 팔성에 이르셨구나!”
그에 어떤 이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는데.
이때, 천마신교에서 크고 작은 그림을 그려내는 역할을 맡고있는 마뇌 갈효봉이 입을 열었다.
“…백도놈들이 동도회의 연락소를 곳곳에 박아두었습니다만, 틈이라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장성(長城)을 둘러놓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운을 뗀 갈효봉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물론 대군을 밀어 넣는 것은 백도 놈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중원으로의 진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가 심어 놓은 간자들이 왕래도 하고 있고, 광명우사도 그들과 함께 태호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에 연옥란이 대들 듯 입을 열려는 때.
“그거랑 언용운을 잡는 거는 전혀 다른….”
그녀의 스승이자 괴왕부의 주인인 역천괴마 구천서가 남은 말을 대신했다.
“…간자들이야 적게는 십수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비단길을 왕래하는 일을 해왔기에 드나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치매가 온 것은 아니로구만. 그들은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이들이야. 그렇다고 광명우사 홀로 언용운이를 잡아 올 수 있겠는가?”
“불가한 일이겠지요.”
그렇게 구천서의 의문이 계속되길 잠시.
“그래. 나를 포함해 여기 앉은 늙은이들 중 누구라도 홀로는 가능한 일이 아닐세. 물론, 교주님이야 가능하시겠지만… 그 미꾸라지 같은 놈이 물을 흐려댄다고 교주님이 친림하실 수도 없는 일이고.”
갈효봉이 뒤에선 시동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시동들이 촤르륵- 지도를 펼쳤고.
갈효봉은 본인의 심중에 있는 계략을 본격적으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무학관이 있는 단강구까지는 무리겠지요. 동도회의 연락소와 개방 그리고 하오문의 지부들을 감안하면 중간에 들통이 날 수밖에 없으니 거기까지 전력을 보내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한데?”
“하나, 서안(西安)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대파산맥의 천 길 낭떠러지에 설치된 잔도(棧道)와 그 아래 무저곡을 통하면 거의 직통이니까요.”
그런 갈효봉의 말에.
만마전에 들어선 이래, 회의장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고고히 지켜보고만 있던 혼돈마녀 경설란이 한마디를 더했다.
“…한고조 유방이 몰래 중원으로 나아갈 때 사용한, 암도진창의 계를 말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이 방법을 택하면 대군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정예대를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장안까지 가기만 하면 거기서 무림맹이 있는 낙양까지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입니다.”
“으음. 무림맹을 불사를 수만 있다면, 본교의 자존심이 조금은 회복되겠지요. 그 생각이신 겁니까?”
“거기에 더해, 천운이 맞으면 언용운도 노릴 수 있을겝니다. 지금 천하에 돌아다니고 있는 소식지는 우리로서도 충격이지만… 백도 내에 언용운을 탐탁지 않아 하는 자들이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입니다. 제가 그 시기를 한번 조율해 보겠습니다.”
혁련강이 재차 입을 연 건 이때였다.
“마뇌 영감이 적기(適期)를 읽어보겠다고 하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시기가 왔을 땐 누가 나설 것인가?”
바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침투하기가 힘든 만큼 다시 나오는 일도 쉽지 않은 길이었고.
적기가 도래하는 것과 일의 성패는 또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
하지만 이 자리엔 벼랑 끝에 몰린 자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소교주 쟁탈전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혁련강의 막내아들, 혁련소의 세력이었다.
대공자가 십만대산의 세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지금,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고사하다 끝내 숙청을 맞게 될 그들에게 이번 일은 도리어 기회였다.
“소자가 나서보겠습니다.”
극도로 위험하긴 했으나.
성공하기만 하면 지금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고 소교주 위에 올라 천마신공의 계승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 * *
한편, 근래 녹림산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던 노삼과 남궁윤은 도중광과 함께 대파산맥의 북편에 위치한 대도시 한중(漢中)의 어느 외딴 골목길에 내려와 있었다.
“소식지 구해왔습니다.”
“나도 기별을 넣어놨다. 조금 있으면 거지 하나가 이리로 올 거다. 너는?”
“내가 나이가 몇 갠데 하오문에 연통 하나 제대로 못 넣을까! 뭔 그런 걸 묻소?!”
“그 폭죽을 삶아 먹은 목소리를 보면 안 묻게 생겼냐? 목소리 좀 줄여 이 새끼야!”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정기 소식지가 나붙을 때가 되었는데.
천무대회에서 언용운이 무언가를 꾀한다는 낌새를 느낀 터라,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조금 더 구체적인 정보를 구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는데.
촤륵-
남궁윤이 가져온 소식지를 펼쳐 들자마자 세 사람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예 선배가 아주 작정하고 붓을 놀렸군요.”
남궁윤은 소식지에 적힌 글귀에서 묻어나는 천마신교를 끌어내겠다는 의지에 입을 벌렸고.
노삼과 도중광은 언용운의 내력에 입을 벌렸는데.
“허, 용운이 이 녀석. 대충 예상은 했다만. 검마… 그랬군. 그랬어.”
“그래! 어쩐지 혈교 놈들이 척척 따른다 했소! 하여간에, 참 별종이야. 어찌 당신들 틈바구니에서 그런 녀석이 나왔지?”
이때.
죽립을 쓴 흑의인 하나가 세 사람이 서 있던 골목에 입구를 막고서 입을 열었다.
“분위기 좋은데?”
그에, 세 사람이 저마다 임전태세를 취하려는 때.
검지를 세운 흑의인이 쓰고 있던 죽립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에, 남궁윤이 다시 한번 입을 벌렸고.
“…언용운?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언용운은 씩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무림맹으로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