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43화 (443/444)

제443화. 미련 (2)

애병을 수선해줄 테니 따라나서라는 내 말에, 태공은 콧방귀를 꼈다.

“흥. 우리가 당호로를 사주겠다고 하면 쭐레쭐레 따라나서는 어린애인 줄 아느냐?”

곁에 있던 악공은 그런 태공의 말에 동조하는가 싶더니.

“그래. 우리를 산 아래로 데려가고자 하는 심산이 뻔히 보이는구만.”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어왔다.

“근데 대놓고 저러니까 궁금하기는 하네. 데려가서 뭐 하게? 그리고 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은데? 이 친구 낚싯대랑 내 칠현금이 보기엔 낡아 보여도, 엄청 비싼 재료다?”

이어진 물음에, 난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입을 열었는데.

“저 언용운인데요?”

그런 내 말에 북망산 중턱에 때아닌 정적이 내려앉기를 잠시.

“…….”

“…….”

이내 곧 태공과 악공이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풉. 푸흐흐흐흡! 그게 누군데?! 젊은 놈이 아주 기고만장하기가 이를 데 없구만!”

“으하하핳! 그럴 만하긴 하지 뭐. 스물을 갓 넘었나 싶은 놈이 저 정도 무위에 올랐으면 어디 가서 ‘내가 난데.’ 할 만도 하다! 으하하핳!”

장철한이 귓속말을 해온 건 이때였다.

“크흠. 저 두 사람은 나와는 다르게 완전히 속세와 떨어진 생활을 해왔네.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곳에 일절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은 물론, 소식지 같은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더군.”

“…그렇군요.”

“그래. 그래서 내가 외골수치고는 비교적 사교적인 축에 속한다고 했잖나.”

그 말은 즉.

나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였는데.

장철한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태공과 악공은 아주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으하하하!”

- 푸하하하.

한데,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는 이중엔 사부님도 계셨다.

- 푸하하. 용운이 녀석이 오늘 아주 임자들을 만났구만!

‘…사부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 나야 ‘언용운’이 편이지요! 푸하하하!

‘…….’

뭐, 나쁠 것은 없었다.

한바탕 웃음이 터진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풀렸으니까.

그렇게 풀린 분위기 속에서, 나는 태공과 악공의 모습을 차분히 눈에 담았다.

‘기인이사(奇人異士).’

기인은 성정과 행동이 범인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을 말했고, 이사는 비범한 재주가 있는 이들을 말했다.

‘그런 사람 중에 동도회의 뜻에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성정이든 사연이든 무언가가 맞지 않아 속세를 떠난 이들이, 순수한 목적으로 다시 강호에 발을 디뎌내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원작의 태공과 악공은 정현을 도왔었지.’

스쳐가는 인연이었기에, 그들이 정현을 구해준 정확한 동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나,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이 마인들을 적대시했고, 잠깐이지만 다시금 강호에 나오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기인이사라 불리는 재야의 무림인 중에 그런 사람은 드물다는 것.’

지금은 옆에 있지만, 장철한만 해도 원작에선 강호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움직이지 않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리 생각하면 태공과 악공을 우리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웃음거리가 될 각오가 돼 있었기에.

머릿속으로 ‘어쨌거나 관심은 끌었다.’라는 생각을 되뇌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태원상단은 아십니까?”

그런 내 말에, 악공은 어찌 그걸 모르겠냐는 듯 답했다.

“태원상단을 어찌 몰라. 모르면 간자나 다름없는데. 여기 있는 여태공은 본디 중원사람이 아닌데도 안다.”

“알다마다.”

“산서금붕, 그 늙은이도 주름살이 상당히 늘었을 텐데 꼬장꼬장한 성정은 여전한지 모르겠구만.”

그에, 나는 내가 충분히 두 사람의 애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제 외조부님 되십니다.”

악공은 그런 내 말을 곡해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코웃음을 쳐왔다.

“허.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려 하느냐? 가만 보니, 무위만 출중한 녀석이로구만. 대저 강호에 나왔으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세워야 함을 모르는가?”

그에, 나는 처음으로 정색하며 답했다.

“하산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뜻은 알아들었으니,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흠흠.”

“그런 분들을 모시고 전장(錢場)에 가서 구좌를 보여드릴 수는 없으니. 애병을 고쳐드릴 능력이 있음을 이해하기 쉬우시라고 외조부님의 이야기를 꺼냈을 뿐입니다. 한데, 이래서는 끝이 없겠군요.”

그렇게 악공의 말을 막은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을 모셔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북망산에 오른 게 맞습니다.”

“한데?”

“하지만, 사실 두 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여기 장 선배에게 친구분들이 있다 들었을 뿐인데. 어르신과 선배님이 속세의 예법으로 벗이 되신 게 아니라, 두 분에 대해 잘 모르시더라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모셔간다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거냐?”

개인적인 확신은 있었다.

하나, 이해시킬 수 없는 말은 과감하게 안 하기로 했다.

“예. 모릅니다. 그런데도 모셔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강호엔 난세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니까요. 고사리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나, 정말로 어린아이의 손을 빌릴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 운을 뗀 나는, 두 사람의 본래 행보에서 추측되는 심지를 믿고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이 난세는 힘이 있고 책임을 아는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도래하느냐 막아내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악공은 보란 듯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이냐? 우리는 그저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는 이들일 뿐이야. 강호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다. 속세에 대한 관심을 버린 지 오래야.”

“그렇다기엔 미련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그런 내 말에, 태공이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물었다.

“우리가 속세에 미련이 있다고?”

“예.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틀어박혀 계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여기 장 선배처럼 저잣거리 정도는 돌아다니는 게 일반적입니다.”

“…….”

“두 분처럼 완전히 발길을 끊지는 않죠. 그로 말미암아 예상해보건대, 과오를 짊어지셨든 정이 떨어지셨든. 어떤 형태로든 두 분 모두 속세에 미련이 있으시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말은 그게 답니다. 미련이 있으시다면 잠시라도 세상을 나와 한번 둘러보시라는 거. 애초에 어르신들쯤 되는 고수를 무슨 수로 제가 끌고 가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다 쳐도 억지로 매어두는 일은 더더욱 불가한 일입니다.”

“흠.”

“아, 별개로 무구는 정말로 고쳐 드릴 생각입니다.”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악공이 콧방귀를 끼며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흥. 이참에 칠현금 따위 버리면 그만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집착이었구만. 덕분에 깨닫게 되었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그의 태도는 처음과는 달리 한풀 꺾여있었다.

그에 난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예. 아무튼 저는 혜민각 근처에 숙소를 잡아두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면 거기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칠현금을 내버릴지, 고쳐 쓰실지 확신이 서시면 찾아오십시오.”

“…거, 요사스러운 혓바닥만큼이나 기분 나쁘게 웃는구나! 뭐냐 그 웃음은? 내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느낌인데? 그것 때문에라도 안 간다 이 녀석아!”

*    *    *

언용운과 장철한이 북망산을 떠났다.

그리하여 태공과 악공 둘만이 남은 가운데, 태공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텐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안 간다니까! 그러는 자네는 그리 묻는 저의가 뭔가?”

되돌아온 물음에 태공은 가만히, 생각을 곱씹어보았다.

“…내 저의라.”

재밌는 일이 생긴 듯하다며 북망산을 떠났던 장철한이 멀끔한 행색으로 돌아왔는데.

웬 후기지수까지 하나 달고 있는 모습에, 태공과 악공은 저들이 자신들을 속세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판단했다.

해서 호되게 혼쭐을 내서 쫓아버리려고 했는데.

지금에 와선 궁금하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대는 데 주저함이 없던 언용운이라는 녀석도, 그 녀석이 말한 난세의 조짐이라는 것도.

“나는 좀 궁금한 것 같네.”

“그래서 어쩌자고?”

“자네가 큰맘 먹고 속세에 나가면 그 녀석이 조잘댄 말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언용운이라는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인지 대번에 알 수 있잖나?”

태공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명을 버리고 악공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노인의 정체는 사실 전대 하오문주 왕선남이었으니까.

“술이 웬수지. 괜히 자네한테 소싯적 일을 이야기해서는….”

“그래서 나도 공평하게 소싯적 일을 이야기해줬잖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랑 내 이야기를 어찌 비교해.”

“허. 쓸모가 없다니. 원래라면 자네는 나랑 눈도 못 마주쳐!”

그런 왕선남 앞에서 턱을 높이는 태공의 이름은 여치수.

“그리고 남의 아픈 상처를 그리 짓밟기 있나 이 사람아.”

지금은 망국이 되어버린, 해남도보다도 훨씬 남쪽에 치우쳐있는 작은 섬나라 압파국의 수군 도독이었다.

“…속세로 나가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니 곡해하진 말고! 끙. 자네와 달리 나는 괜히 세상에 나갔다가 문도들에게 혼란을 낳을 수가 있어.”

하오문은 흑도.

흑도의 생리는 백도와 달랐다.

하오문주를 역임하며 왕선남은 때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으며,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문도들을 어쩔 수 없다며 방임하기도 했다.

그 모든 업을 짊어지고 왕선남은 이곳 북망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아. 누가 하오문주인 걸 공개하라고 그랬나? 그냥 자네가 아는 하오문의 체계를 조금만 이용해서, 범인들이 정보를 구하듯이 궁금한 것만 딱 알아보면 될 것 아닌가.”

“…….”

“자네도 내심으론 궁금하긴 하잖아. 장가 놈이 멀끔하게 나타난 것도 그렇고. 그 언용운이라는 녀석도 성은 진주언가의 것인데 검을 쓰고 말이야.”

“…무공 자체도 좀 의문이긴 했어. 분명 마공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찌 저런 녀석이 백도의 틈에 끼어있지? 이걸 세상 사람들은 아나?”

그렇게 밤새도록 이어진 고민 끝에.

왕선남과 여치수.

두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에 속세로 나아가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찾아온 이튿날.

두 사람은 은밀히 하오문의 지부를 찾았다.

“어서옵쇼! 무엇으로 드릴까요?!”

“소면 하나씩 주시고. 아 여기 이것을 좀 보아주시오.”

“으음? 아. 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오문의 체계를 너무도 잘 아는 왕선남이었기에.

언용운에 관한 정보는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두 사람의 손에 들어왔는데.

이윽고 받아들게 된 정보를 확인한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중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쪽은 왕선남이었다.

“이 일들을 정말로 그 어린 녀석이 다 했다고?”

“방금 보인 주문서대로 주문을 넣으면, 풍문은 제외하고 실체가 확인된 확실한 정보만 제공된다면서?”

“…그렇지.”

“허. 이놈이 그야말로 자수성가를 한 놈이었네. 그리고 자네는 은인에게 엿을 먹인 꼴이로구만. 이 퇴기촌의 건이나 사천의 일을 보면 말이야.”

“그러는 자네도 전혀 무관치는 않아. 자네 모국, 압파국. 은하군도에 속해 있던 곳 아냐? 나라는 망했어도 백성들은 그대로 있을 텐데?”

“…….”

“…이래서 모르는 게 약인 것인데. 이런 제기랄.”

*    *    *

북망산에서 돌아온 다음 날.

언동생들과 나는 혜민각에서 봉사를 시작했는데.

“줄을 서시오!”

예전에 와서 봉사를 했을 때와는 달리, 내 위상이 너무도 높아져 있었던데다.

천마신교 놈들을 끌어내고자 무림맹의 소환에 응한다는 소식도 뿌려댄 탓으로, 치료보다는 나를 구경하는 것이 목적인 가짜 환자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무적검!”

“손 한 번만 잡아 주십쇼! 그러면 싹 나을 것 같습니다!”

하여, 의술에 조예가 있는 녀석들이 환자를 보는 동안.

그런 이들을 돌려보내는 역할이 필요했는데.

어째서인지 그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놈들이 정작 더 시끄럽게 구는 통에,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놈들 이거 왜 이래?’

장본인은 남궁윤과 원철이었는데.

한중 땅에서 남궁윤이 복귀한 직후부터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있다 싶더니.

혜민각에 이르러서는 온갖 것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언용운의 오른편엔 내가 서겠다. 녀석과 이래저래 합을 맞춰오기도 했고, 내가 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을 듯하군.”

“글쎄요. 학관에 있은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합을 맞춘 것으로 치면 소승도 못지않을 것입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뭐하지만, 일전에 사도련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동행한 바 있습니다.”

“어이가 없군. 그건 내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나는….”

보다 못한 나는 두 녀석에게 꿀밤을 먹이며 눈을 흘겼다.

“아침을 잘못 먹었나. 댓바람부터 뭔 지랄들이야. 남궁윤. 뭐가 불만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렇게나 서. 그리고 원철 스님.”

“…옙.”

“요즘 하성이 말대로 좀 스님이 아닌 느낌이 드세요. 조만간에 님자 때고 스라고 불러야겠네 진짜.”

“…….”

그러고 있기를 잠시.

이번엔 대문을 맡겨놓은 천장호가 있는 쪽에서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는데.

“언용운이를 만나러 왔다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의원인데 왜 언용운이를 만나러 오냐고요! 여기 글자 적힌 거 안 보이십니까? 환자면 줄을 서고 아니면 돌아가라! 딱 보니 환자는 아니시구만!”

가만히 들어보니 악공과 태공의 음성이었다.

“거, 진짜로 언용운이란 놈이 여기로 오라고 해서 왔다니깐! 나 원, 환장하겠네.”

“그래. 그놈을 불러와서 대질을 시켜줘라. 아니면 장철한이 그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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