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자서
아무 의미 없는, 한편의 경극 같은 행위가 끝나고서야 남자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체 말로 하는 사과가 무슨 의미란 건지···. 알다가도 모를 문화였다.
하긴 전생이나 지금이나 중국 애들을 이해는 건 무리였지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은 나도 중국 사람일세? 내 몸에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놀라 황망한 얼굴로 내 전신을 내려다볼 때.
적당한 체면치레에 금세 실실거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정식으로 인사하지. 나 제갈세가 가주 제갈천이라고 하네. 우리 딸의 목숨을 구해준 소협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가주?’
나는 그가 제갈세가의 가주라는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7대 세가의 가주란 지역구 탑 조폭 급의 인물.
더군다나 제갈세가라면 호북의 패자.
같은 호북에 위치한 무당파가 전국구 조폭이라면, 제갈세가는 호북의 지역구 탑 조폭.
지역구 조폭 두목을 면전에서 개망신을 주었다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제 살아난 것이 용한 상황.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더니.
하룻 무협 세계인인 나의 명백한 실수였다.
힘없으면 입 꾹닫이 최고이거늘.
원래 무협 세계에서 양민이라는 포지션이 그렇다.
관아에 수탈당하고 혈마나, 색마 같은 애들에게 피와 정기 빨리고, 사람이라기보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곡식 같은 기초 자원의 느낌.
양민은 무슨 일은 당해도 닥치는 게 답인데 급 후회가 밀려왔다.
그나마 명망 높은 무가의 가주라서 쉽게 손을 쓰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흑도의 인물이었으면 정말 요단강을 건너갈 뻔했던 것.
-꿀꺽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리고 조금 짜증도 났다.
조폭 두목이라면 원한 관계도 많을 텐데, 왜 딸과 시비 둘만 데리고 여행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지.
‘보통 무가의 가주라면 호위무사들을 줄줄 끌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그러나 높은 분들의 사정을 내가 어찌 알리오.
내가 운이 없었던 것일 뿐.
앞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고 친절하게 대해야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상대가 지역구 조폭 두목이라는 사실에, 최대한 공손한 모습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류청운이라고 합니다. 대인.”
“오오! 청운? 푸른 구름이라는 뜻인가? 내 딸아이 이름은 제갈 청이라네. 이름이 잘 어울···. 아니, 좋구만! 그래 자네 나이는 몇 살인가?”
설마 했는데 역시나 꼰대 같은 질문을 시작하는 제갈천 가주.
아마 그는 이제 나이를 시작으로 양친과 출신, 집안의 위치 같은 것을 물을 것이 뻔했다.
본인이 인구 조사원도 아닌데, 왜 저 나이대 사람들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호구조사에 연연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소를 띠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마도 내 모든 것을 다 들어야 직성이 풀릴 테니 말이다.
“예, 올해 스물둘이옵니다.”
이쪽은 남자 나이 21세를 성인으로 치고 여자는 16세를 성인으로 친다.
내가 작년에 성인이 되어 본가에서 쫓겨나 일 년 가까이 무공을 배운다며 떠돌다, 한 달 전쯤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올해 스물둘인 것이다.
내 나이를 들은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오오. 그래 작년에 성인이 되었구만, 우리 딸은 방년(芳年) 18세라네.”
그는 딸바보를 나에게 인증이라도 받겠다는 듯 말끝마다 딸딸거리며 자기 딸을 끼워넣기 시작했다.
‘어휴 딸바보 아니랄까 봐.’
자꾸만 자기 딸을 언급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딸바보를 이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
일단 무조건 그의 딸을 칭찬하기로 했다.
너무 과도한 칭찬은 딸바보에게 ‘자네 설마 우리 딸을?’ 같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딸바보를 기분 좋게 하는 데는 딸 칭찬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칭찬의 미묘한 완급 조절이 힘들긴 했지만 일단 모험을 걸어보는 것.
“그, 그러시군요. 저는 아가씨께서 워낙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계셔서, 파과지년(破瓜之年) 정도인 줄 알았습니다. 하하···. 하···.”
“이런 이 친구 내 딸이 좀 예쁘고 동안이긴 하지만 파과지년은 넘어 보일 것인데, 하하··· 이 친구!”
‘18살이라고요? 저는 16밖에 안되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자 신이 난 목소리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제갈가의 가주.
솔직히 얼굴은 찐빵이요. 입은 오리주둥이인데.
사람 살리려고 인공호흡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한 거지만, 맨정신으로는 절대 불가한 얼굴이었다.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니 말이다.
뭐 푸른 눈은 내 타입이긴 하지만.
하지만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는 속담처럼 그는 내 말에 한참을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립서비스에 아주 만족하는 모습.
‘뭐 업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자.’
따지고 보면 객잔도 서비스업이긴 했다.
그는 내 딸 칭찬에 한참을 기분을 좋아하더니, 아주 정석적인 호구조사의 순서대로 대화를 진행해갔다.
이름과 나이를 물었으니 양친과 고향 순서로. 이 나이대 사람들에게는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지 왜 레퍼토리가 달라지지 않는지.
“양친은 무탈하시고? 어린 나이에 이런 객잔을 혼자 하는 것을 보면 집이 대대로 객잔을 했던 것인가?”
“아닙니다. 대인. 원래 복건성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온데 조실부모한 지는 좀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으로 객잔 장사에 뜻이 있던지라···”
나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솔직히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부모이기에 슬플 이유가 없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부모인지라, 영화 속의 등장인물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의 그런 표정은 제갈가의 가주에게 먹혀들어 간 것 같았다.
“저런···. 조실부모하고 혼자란 말인가? 저런 딱한 일이.”
그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더 좋군!’ 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뭔가 다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험한 세상 혼자 살아가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나, 내 자네가 저지른 일은 다 내 딸을 구한 일이니, 책망하지는 않겠네. 그래서 내 하는 이야기인데. 자네, 우리 식구가 되는 것은 어떻겠나? 뭐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이것도 다 인연 아닌가?”
‘오오···. 딸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식구로 받아들여 팍팍 밀어주겠다, 그런 건가?’
그는 조폭답게 아주 화끈한 남자였던 모양이다.
약간 호르몬 불균형으로 기분이 왔다 갔다 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 좋은 모양.
그는 통 크게 나를 팍팍 밀어주겠다고 호언 했다.
그러나 냉큼 오케이 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예의상 거절하는 시늉을 하기로 했다.
원래 적당히 겸손을 떨어주는 것이 이쪽의 예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만···.”
“어허! 대가라니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인가?!”
단호박 같은 가주의 목소리.
“혹시라도 거절하는 뜻을 보였다가는 내 화를 낼 것이네! 나도 체면이 있지 않겠는가?”
정말 화가 난 듯 버럭거리는 가주.
자기가 신분이 높은데, 도움을 받고도 갚지 않으면 자기 체면이 안 선다는 설명이었다.
하긴 백도 무림 사람들은 인이니, 협이니 그러면서 도움을 받고 갚지 않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그리고 피카피카 거리며 살기라도 쏘아내겠다는 그의 인상에 나는 그의 제안을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면 대인만 믿겠습니다.”
“그래, 당연하지! 이제 자네는 우리 식구일세!”
딸의 목숨을 구해주어 식구가 되었다는 말에 나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나 몇 푼 쥐여주거나 적당한 이득을 취하게 해주는 정도일지 알았는데.
조폭 두목 클라스가 있지,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식구를 언급하는 그.
그의 말에 내 인생도 이제 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도 양친도 없이 솔직히 혈혈단신 고아 같은 몸이었는데 식구를 삼아준다니.
그것도 제갈세가, 제갈세가는 전생으로 치면 지역구 조폭.
조폭들은 자기 식구 챙기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림에서 식구라면?
식구. 곧 꽌시를 의미하는 것.
꽌시라는 게 그렇다.
얼굴을 아는 정도로는 꽌시가 될 수 없고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어야 꽌시가 될 수 있는 것.
그러니 내가 제갈세가의 가주의 꽌시가 될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딸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그가 나에게 꽌시에 넣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크. 무림 7대 세가 제갈가의 꽌시라니!’
내가 그동안 꽌시가 없어서 얼마나 박한 취급을 당해야 했던가?
무림 문파에 무공 좀 배워보겠다고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객잔을 알아보겠다고 했다가 거간꾼들의 농간에 얼마나 쓴물을 삼켜야 했던가?
더럽더라도 중국 대륙에서 살려면 꽌시는 필수일 수밖에 없는데, 조그만 객잔 주인에 외지인 출신으로는 누군가 나의 꽌시가 되어줄 확률이 거의 없는 것.
그런데 한방에 지역구 조폭 두목의 꽌시?
내가 꽌시를 극도로 혐오하긴 해도 내가 또 수혜 대상이 된다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세가의 본거지가 호북성이라서 이곳과 거리는 좀 있어 입김이 좀 멀다지만, 사천에 아미, 청성, 당문이 존재하니.
같은 조폭끼리 교류가 있을 것은 분명할 터.
‘내 꽌시가 객잔을 하고 있어서 말이야···.’라고 언질을 주기만 한다면 그들이 손님으로 올 수도 있는 것.
행복한 상상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렇기에 일련의 호구조사가 끝난 다음에도 제갈가 가주의 꽌시가 된 기분으로 나는 그에게 팍팍 립서비를 넣어주었다.
그가 하는 딸 자랑을 들으며 말이다.
“──내 딸이 그리 똑똑하단 말일세.”
“영민하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피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오. 자네, 무후에 대해 잘 아는가?”
‘잘 아냐고? 이 시대에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걸?’
그의 질문에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이 아니라 다른 말을 시작했다.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나의 말에 놀란 눈을 부릅뜨는 가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서, 설마 계자서(季子書)를 수학했는가?”
“예, 제가 무후를 가장 존경하는지라···”
“와하하하핫! 자넨 우리 가족이 분명하네! 무후를 그렇게나 존경해 계자서를 달달 외우고 다닐 줄이야. 혹시 다음 구절도 아는가?”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담백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기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내가 다음 구절을 시작으로 계자서를 끝까지 낭독하자 그는 까무러칠 듯 좋아했다.
“우리 집안 녀석들도 못 외는 녀석들 천지이거늘! 껄껄껄!”
삼국지 게임 마니아로서 제갈량빠의 필수인 계자서 암기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무협 세계 뭐 별거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