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
아침나절 내내 끙끙대고서야 간신히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포식자의 살기 맞은 초식 동물들이 이런 느낌일까?
뭔가 온몸 근육이 야들야들해진 느낌이었다.
시비들이 떠온 세숫물로 간신히 얼굴을 씻고, 후달달 떨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원치 않는 개다리춤이 절로 나오는 상황.
앞으로 한걸음 좌우로 두 걸음.
머리는 앞으로 갈 것을 명령하는데 몸은 좌우로 움직였다.
몸은 조금 더 누워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마냥 누워있을 수도 없는 것이.
일단은 손님을 받은 상황, 더군다나 그가 이제 나의 꽌시이니 잘 챙겨야 했다.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다.
나와 제갈세가 가주가 맺은 꽌시 관계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 그는 높은 사람 나는 일개 기초 자원.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게 당연하다고 넙죽넙죽 받기만 하면 그 관계는 백 프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나는 중소기업 다니는 일반인, 친구는 기업가의 아들이라고, 친구가 만날 때마다 ‘야 내가 살게, 네 형편 아는데 내가 네가 사준 걸 어떻게 먹냐?’라면서 식사비나 이런 걸 항상 내준다?
처음에는 고맙고 베푸는 처지에서도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이게 장기간 지속되면.
한쪽에서는 ‘돈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형편 알지만 어떻게 차 한잔을 안 사냐?’라는 파국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관계에서는 부족한 쪽이 마음을 잘 써야 한다.
뭐 별건 없다.
항상 베풀기만 하는 처지인 친구에게 반대로 베풀어주는 것, 얘들은 항상 베푸는 처지라서 뭔가 받는 것에 익숙지 않고, 그렇기에 뭔가를 받으면 그게 사소한 것이라도 무척이나 감동한다.
그러니 내 처지에 베풀 수 있는 사소한 것을 베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 내 상황에서는 맛있는 식사라든지.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식당 건물 앞에 도착해 쪽문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들어 문지방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객잔의 식당 내부를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편으로 하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말끔히 치워진 식당.
어제의 난장판을 떠올리며 이런 몸을 끌고 어떻게 치워야 하지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어제 얼룩덜룩 피로 물든 벽은 깨끗하게 닦여있고, 부서진 의자는 모두 사라지고 쓸만한 의자와 테이블이 적당히 놓여 있었다.
바닥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냈는지 반들반들한 모습.
완벽히 정리된 나의 객잔.
“어라?!”
말끔한 객잔의 모습에 절로 어리둥절한 음성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 부엌 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던지.
앞치마를 두른 시비 하나가 물에 젖은 손을 훔치며 헐레벌떡 뛰어나와 인사했다.
차를 가져왔던 시비가 아닌 다른 시비.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크, 도련님. 이 집 꽌시 대우 확실하네?’
도련님이라면 집안에 결혼 안 한 남자를 지칭하는 말.
가족이라더니 가주가 은공 같은 남 같은 느낌의 호칭보다, 호칭까지 뭔가 가족 같은 느낌으로 정해준 듯했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진짜 뭔가 가족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일단 시비에게 객잔을 청소한 것이 그녀들이냐고 물었다.
“크흠. 그, 식당은 소저들이 치우셨소이까?”
“도련님 소저들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어르신이 계실 때 그렇게 부르시면 저희가 혼쭐이 날 겁니다. 그냥 하대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한 표정의 시비, 단호박이라는 드립이 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주인을 닮아 살기라도 쏠 것 같은 그녀의 눈빛에 나는 어색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아, 알겠구나.”
‘시비의 눈빛에도 밀리는 기초 자원의 신세라니.’
내 확답을 들은 시비는 그제야 내 물음에 대해 대답했다.
“예, 도련님 저희가 치웠습니다.”
“그래, 이리 깨끗하게 치우다니.”
“저희야 매번 하는 일이 그런 것인데요. 뭘”
하긴 시비들은 정리 정돈, 청소, 가사 일의 전문가.
전생으로 치면 가사 도우미 선생님들.
전문가가 손을 댔으니 완벽할 수밖에 없는 것.
나는 그녀의 노고를 칭찬했다.
“수, 수고들 했구나.”
그런데 전생이나 현생이나 매번 을로만 살아봐서 그런지, 갑으로 하대하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해 말투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고, 내 말투가 웃긴 지 시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급하게 사과를 해왔다.
“풉···. 아,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리고 아닙니다. 원래 저희의 일인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왠지 어색해져 버린 상황. 뭔가 말을 떠올려야 했는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위치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상황이 이어지는데 그녀가 내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고 있다는 것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 안에서 무,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이냐?”
“아, 요깃거리를 좀 만들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뭔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는 시비. 아프다고 브런치 먹을 때쯤 일어났으니, 새벽같이 활동하는 이쪽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배가 고플 수밖에 없는 상황.
아마도 나를 기다리다 못해 부엌에서 요깃거리를 찾아 뭔가를 만들고 있었던 듯했다.
이유가 어쨌든, 손님인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런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난 듯하구나.”
자책하는 듯 말하자 황급히 대답하는 시비.
“아닙니다. 어르신의 살기를 맞으셔서···. 그나저나 도련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직 일어나시기 힘드실 텐데요?”
무가의 시비라서 뭔가 많이 아는 것같은 시비는 내 초라한 몸을 걱정했다.
솔직히 뒤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리가 풀려서 개다리춤이 절로 나온다고는 할 수 없는 일.
“어떻게든 살살 움직일 만하구나. 내 식사를 준비하러 나왔는데, 이거 참···.”
“아닙니다. 도련님 좀 더 쉬시지요.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아무튼 지금은 내 손님이 아니냐. 손님에게 대접받을 수는 없는 일이지.”
“손님이라뇨 당치도 않으십니다.”
그렇게 시비와 옥신각신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시비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리 마음이 불편하시면, 아가씨의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아가씨의 병환을 아는 것은 도련님뿐인지라. 식사를 어찌 준비할지를 몰라, 그렇지 않아도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생각해보니. 어제 절대 땅콩은 먹으면 안 된다고 말했고.
볶음이나 기름을 사용한 음식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겁이 나서 그녀에게 아무런 음식도 먹이고 있지 못한 상태인 듯했다.
그녀는 어제저녁부터 면발 몇 젓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 더군다나 쇼크로 쓰러졌다 일어났으니 몸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저런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내 몸만 생각하다니. 이런 낭패가 있나. 어서 서두르자꾸나!”
“어머!”
입을 가리고 왠지 부끄러워하는 시비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나를 기다린 것은 잘한 것이다. 아가씨와 붙어 다니는 시비이니 내 음식을 만들면서 일러두는 것을 잘 기억해두거라 알겠느냐?”
“예, 도련님 쇤네 명심하겠습니다.”
땅콩 알레르기라는 것이 무조건 땅콩에만 그럴 수도 있지만, 콩이나 다른 견과류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직접 섭취가 아닌, 아가씨가 못 먹는 식품을 다루는 데 썼던 주방 조리도구에 남아있는 성분만으로도 잘못하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했다.
전생에 식품 설명서에 ‘이 식품은 콩과 무슨 음식을 조리하는 시설에서 같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는 설명이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
해당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조심하라는 경고인 것이다.
일단 쌀을 물에 불리며 시비에게 주의할 사항을 당부했다.
“아가씨가 드시는 음식은 모두 직접 조리해야 하네 칼, 도마, 냄비, 그릇, 숟가락과 젓가락 모두 따로 사용해야 함은 물론이요. 혹시라도 땅콩기름이나 콩, 또 다른 견과류 그러니까 개암이나 그런 것을 자르거나 혹시 만진 손으로 아가씨의 음식을 절대 만들어선 안 되네 알겠는가?”
“예, 도련님!”
시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의 설명을 경청했다.
높은 가문의 사용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충성심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불린 쌀을 맷돌로 곱게 갈아 미음을 끓였다.
세 번이나 곱게 간 쌀가루로 끓인 미음.
냄비에 죽보다는 풀에 가까운 느낌의 죽이 조심스레 끓어오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죽을 휘저으며 시비가 말했다.
“쇤네는 이렇게 곱게 간 죽은 처음 봅니다.”
환자에게 죽을 먹이는 것은 원래 소화를 돕기 위한 것인데 아가씨의 죽은 소화뿐만 아니라 부어오른 그녀의 목과 혀 때문.
나는 연유를 시비에게 설명했다.
“아가씨의 혀와 목이 많이 부은 상태이니 아주 곱게 갈아서 준비한 것이다. 혹시라도 삼키시기 힘들까 싶어서 말이다.”
“그, 그렇군요, 어머나 다정하셔라.”
부끄러운 듯 말하는 시비.
높은 분만 모셔서 그런지 시비가 감이 없지만, 원래 제갈 가주 정도의 꽌시면 자동으로 다정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불치병인 딸바보.
그의 딸을 귀하게 대접하면 할수록 나에 대한 평가가 올라갈 것은 뻔한 일.
뭐 약간 속물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나 원래 사회생활이라는 건 다 그런 것이다.
***
제갈가의 가주 일행이 객잔에 묵은지 5일째 아가씨는 이제 일어나 돌아다니실 만큼 기운을 차리셨다. 나도 살기의 영향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말이다.
아가씨야 알레르기 반응을 제외하면 크게 아픈 상황은 아니었으니 당연했지만, 그동안 식사가 두려워 끼니 해결을 제대로 못 해서 기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나의 말에 경기를 일으킨 그의 아버지 덕분에 그녀의 회복은 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몸을 빨리 회복할 방법은 없겠는가?”
나를 숫제 의원 대하듯 하는 제갈 가주의 물음.
몸을 회복시킬 방법은 없느냐는 가주의 물음에 내가 인삼(人蔘)과 대추와 닭이라도 있으면 보양식을 준비해볼 수 있다고 하자.
그는 내 생전 처음 보는 경공을 이용 청천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인삼과 대추 닭을 사 왔다.
그리고 아가씨는 사흘 내내 질리게 삼계탕을 드셔야 했다.
근처에만 가도 닭 냄새를 풍길 지경.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몸을 추스르자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른 아침 테이블에 둘러앉자 제갈가주의 말이 시작되었다.
“내 원래 딸아이의 괴질을 고치고자 사천당문(四川唐門)으로 향하는 길이었네, 당문의 현재 가주가 무림맹에 있을 때 같이 수련한 내 지기(知己)라서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인데, 자네 덕분에 괴질의 원인을 찾았으니, 이제 도움은 필요 없지만 찾아가기로 약조했으니, 가서 얼굴을 비춰야 해서 말이야.”
“아, 그러시군요. 그쪽에서도 언제 도착하나 한참을 기다리고 있겠군요. 어서 가봐야 하시겠습니다.”
내가 약간 아쉬운 투로 말하자 그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달리 챙겨줄 것은 없지만, 일단 이걸 받아두게.”
그가 자기 품속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종이 한 장.
내밀기에 엉겁결에 받아 테이블에 올려진 것을 주어서 드니 그것은 전표였다.
‘가만 보자 오, 다섯에 다음 글자가 배, 백? 오백 냥!?’
역시 클라스가 달랐다.
지방 탑 조폭다운 큼지 막한 씀씀이. 마음이 무척이나 넉넉해졌지만, 냉큼 받으면 속이 보일 수도 있는 상황.
나는 다급히 전표를 다시 그에게로 밀며 말했다.
“이, 이건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금액이···.”
너무 큰 액수에 내가 그에게 난처함을 표하자 그가 다시 자기 체면을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체면 진짜···
“어허! 내 체면이 있지 넣어두게. 그리고 내 사람을 보낼 것이니, 그것으로 필요한 것을 준비하게, 알겠나? 식은 우리 쪽에서 준비할 테니 말이야.”
‘식?’ 뭔가 이상한 말을 하는 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