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이럴 때가 제일 난감했다.
분명 나도 이제는 이 세계 사람인지라 이쪽의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내 기억이 아닌 느낌이라는 것.
아니, 내 기억은 맞았다.
현생의 나와 전생의 나의 기억이 완벽히 어우러진 느낌이 아니라.
이쪽의 몸에 나의 영혼만 깃들어, 이곳에서의 기억이 마치 영화 한 편 시청한 느낌으로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문제지.
그러니 저렇게 뭔가 잘 모르는 이야기가 던져지면 바로바로 반응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우선 먼저 떠오르는 건 대한민국 건아일 때의 기억이 먼저니까 말이다.
그러니 머릿속을 뒤적여야 했다.
그렇게 내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머릿속을 뒤적이자 집중되는 시선.
가주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고 아가씨도 당황하는 모습.
시비들도 손을 들었다 내렸다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가주가 참지 못하고 뭔가를 설명하려 할 때.
“그러니까···”
‘식이라···. 아!’
식이 뭔지 떠올랐다.
“식! 그렇죠. 식! 그, 그런데 저를 위해 식까지···. 혹시 제 신분이 어르신의 체면에 누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저는 일개 객잔 주인이고···”
내가 식까지 치러주겠다는 가주의 말에 아무래도 신분 차이나 이런 문제로 가주께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투로 말하자, 가주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라듯 말했다.
“자네 그 무슨 섭섭한 소린가! 나를 어찌 보고! 이제 우리 식구라는 내 말은 어디로 들은 게야!”
가주가 서운하다는 투로 자기 인성을 의심하냐는 듯 말했지만, 그의 입꼬리가 귀에 걸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 립서비스에 만족한 모양.
역시 겸손은 미덕이라는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기분이 좋고 나도 기분이 좋고, 가주의 마음 씀씀이에 절로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식은 곧 정식으로 관계를 맺고 우리 사이를 공식적으로 알리겠다는 것.
그냥 단순히 입으로만‘너 이제부터 우리 식구야’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것은 확실히 식까지 치러 공식적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알릴 정도로 사회적으로 못을 박겠다는 것이었다.
공인된 관계로 만들어 입으로만 챙기는 게 아니라 확실히 챙겨준다는 것.
주먹 쓰는 사람들은 순수한 면이 있다더니. 어느 세계에나 그것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식까지 치러준다니!’
감격에 젖어 그가 언급했던 식을 치르자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처음에 그의 식이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내 기억과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떠오른 몇 가지 식 중에, 우리가 식구가 될 수 있는 식은 딱 한 가지.
다른 건 우리 사이에 할 수 없는 식이고, 그것이 우리 사이에 가능한 유일한 식이니, 그것일 확률이 백 프로였다.
그것은 바로 의형제 결의‘식’.
딸을 살려주었다고 의형제를 맺자는 의미인 것이 확실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桃園結義) 이래 중국에는 이 의형제 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렸는데, 내가 살았던 전생에 이르러서는 얼마나 심각했는지, 중국의 관료들이 의형제를 맺고 집단으로 부패 관료가 되는 것이 신문 칼럼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러니 중국 사람들은 뻑 하면 의형제를 맺는데, 단둘이 대충 술잔을 기울이며 호형호제하기도 하지만 좀 괜찮은 가문에서는 식까지 치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식까지 치를 정도면 보통 양가가 으리으리해서, 우리가 의형제가 되었음을 과시하는 느낌이 보통인데, 일개 객잔 주인인 나와 식까지 치러준다니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감동의 쓰나미가 거칠게 몰아쳤다.
‘이 나이에 아버지뻘 되는 형님이 생기다니.’
차라리 의형제가 아니라 내가 그의 양자가 되는 것이 어울릴 나이였지만, 중국에서 나이 차이가 나는 관계는 보통 의형제가 일반적이니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제안에 진짜 그의 큰 통과 일 처리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을 때, 머릿속 한편에 작은 걱정이 떠올랐다.
‘잠깐!’
생각해보니 마냥 좋아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가주에게 꼭 확인해야 했다.
나는 행복한 기분에 빠져나와 다급히 사실을 확인을 위해 가주에게 물었다.
“어르신 그 식이라면 그 붉은··· 그것에 술을 나눠 마시는 그것이 맞겠지요?”
피를 먹는다는 사실에 피라는 단어만 뱉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내 질문에 호쾌하게 웃으며 무슨 당연한 소릴 하느냐며 웃는 가주.
“붉은?! 술? 그렇지! 이 친구! 그게 아니면 무엇이겠나! 하하하!”
‘역시나··· 문제가 심각한데?.’
보통 주먹 쓰는 친구들은 의형제 결의식에 술잔에 피를 타 나눠 마시기에 물어본 것인데, 역시나 당연하다고 말하는 가주.
난 생각보다 비위가 좀 약한데 걱정이었다. 의형제 결의식에서 술잔을 받아들고 구역질하면 그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생각만 해도 비릿한 느낌에 인상을 쓰자 가주가 내 표정을 읽고 물어왔다.
“왜? 걱정되는 것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부족한 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부터 의형제 결의식까지 비위 단련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허 이 사람 참. 너무 겸손한 것도 좋은 것은 아니네.”
너무 겸양을 떤다며 나무라듯 말했지만, 노력한다는 단어가 들어가 그런지 어르신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자기 학우선을 천천히 부치며 지그시 눈을 감는 액션을 취했다.
며칠 전 같았으면 꼰대 같은 모습이라 했겠지만, 오늘은 왜 저리 내 꽌시가 멋져 보이는지.
그의 멋진 모습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멋들어진 액션을 취한 가주를 하염없이 바라볼 때, 가주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자기 딸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아 참. 청아, 그것을 드려야지?”
뭔가를 또 나에게 주라는 제갈가주.
역시 그분의 후예···.
‘아니, 줄 것이 또 남았다고?’
대체 이분들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할 것인지 뭔가를 자꾸만 준다고 난리였다.
지금도 받은 것이 적지 않은데, 뭘 자꾸 준다는 것인지.
똘똘한 꽌시 하나 백 꽌시 안 부러운 상황.
가주의 지시를 받은 아가씨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흠칫 떨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무엇인가를 품속에서 조심조심 꺼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붓기가 어느 정도 빠진 손을 품에 넣어, 무엇인가를 조심스레 꺼내 시비에게 건네는 그녀.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까운가?’
무엇인가 엄청나게 귀한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리 흥분해서 손까지 떨어대지 않겠는가?
역시 아비만 한 자식 없다더니, 아비는 저리 통이 큰데 딸은 저리 간이 조망만 해서야.
자기 목숨보다 귀한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이제 나는 그녀의 작은아버지나 마찬가지이니, 윗사람으로서 너그러운 마음을 품기로 했다.
뭐 일단 아까워해도 주긴 주니까 말이다.
“도련님 여기.”
시비는 그녀에게 물건을 받아 곧장 내게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는데, 그것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귀하길래 주는 게 아까워 손까지 떨까 싶었는데?
내 손 위에 올려진 것은 작은 옥 패.
한쪽에는 제갈이라는 글자가 다른 한쪽에는 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습의 작은 옥 패였다.
‘오오···. 설마 이것은? 보은패(報恩牌)!’
무림에서 높은 가문 사람을 구해주었을 때 아주 희귀한 확률로만 드랍 된다는 유니크 아이템.
보은패가 있냐 없느냐로 그 가문의 싹수와 역량을 평가할 수 있다는 잇템.
평생 쓸 운 여기서 다 쓰는 느낌. 오늘 템 드랍율이 미쳐버린 상황이었다.
그녀가 떤 것처럼 내 손도 떨려왔다.
‘이 정도면 떨릴만하지, 암 암.’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잇템 이라도 냉큼 한 번에 받을 수 없는 일.
‘정말 중국식 예의 힘들다 힘들어.’
예의상 또 한 번 거절해야 하나 싶어, 내가 테이블에 옥 패를 천천히 내리며 아가씨 쪽을 바라보자. 주먹만 하게 변하는 그녀의 눈.
그리고 그녀의 좌우에 선 시비들이 고개를 맹렬하게 저으며 나에게 눈치를 주시 시작했다.
‘이거 아니야?’
눈빛으로 그녀들에게 묻자 그녀들이 간절하게 손짓, 발짓, 눈빛으로 나에게 신호를 주었다.
‘절대 아니야!’
나는 그 신호에 화급히 테이블로 내려놓던 손을 급격히 꺾어 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주! 아주!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목숨보다 더 귀하게!”
그리고 그제야 시비들의 눈빛으로 흡족한 말을 전해왔다.
‘그래, 그거야!’
그렇게 마지막 선물을 받고 나자 가주가 내가 받은 패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가문의 은인이라 내 패를 내어주는 것이 맞겠지만, 이젠 가족이고 아무래도 청이의 패를 주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 내어주라 명했네. 자네도 그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내 꽌시인 가주는 슬프긴 하지만 결국 나보다 빨리 떠날 사람.
뭐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세월은 어쩔 수 없으니까.
결국 보다 젊은 우리가 긴 인연을 이어갈 것이 뻔하니 직접 도움을 받은 그녀가 평생 나에게 갚으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젊은 사람끼리 친해지면 좋지 뭐.’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선물 증정이 다 끝나고, 이제 그들이 슬슬 떠나려 하나 싶었는데, 가주가 요구를 하나 해왔다.
“자네는 혹시 청이에게 줄 것이 없겠는가?”
‘아. 마니또!’
선물교환. 하긴 긴 인연을 이어가려면 첫인상이 중요하고, 첫 교류에서 일방적으로 나만 선물을 받을 수는 없는 일.
더군다나 가주가 저리 엮어주는데 아가씨를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귀한 패까지 내어줬으니 나도 뭔가 귀중한 것을 내줘야 했다.
그녀의 몸을 돌보는데 필요한 내용을 글로 적어 편지로 하나 써두긴 했지만, 편지만 달랑 보낼 수는 없는 일.
그런데 객잔 하나가 달랑인 나에게 그녀에게 건넬만한 무엇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한참을 생각해도 뭔가 줄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주도 내가 난처해 보이는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차피 우리 식구니 괜찮네, 내 자네 처지를 생각 못했구만. 미안하네”
무척이나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는 가주. 아마 내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방적으로 시작되는 관계는 절대 좋지 않으니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들을 두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엌 찬장 한쪽 편에서 천에 곱게 싸두었던 칼을 한 자루 꺼냈다.
내가 꺼냈으니 일반 칼은 아니었다.
중국식 요리 칼 채도(菜刀).
직사각형 모양의 손도끼 같은 모양의 중국집 주방에서 많이 쓰는 그 칼.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무공을 배운다며 여행하다가 산 첫 번째 칼이었다.
사용한 적은 없지만 험한 중원을 여행하기 위해서, 호신 겸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샀던 첫 번째 요리 칼.
두려울 때면 품에 넣고 만지작거려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친구 같은 녀석.
나는 칼과 편지를 집어 들고 제갈가의 식구들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근데, 아가씨한테 부엌칼 괜찮나?’
걱정이 조금 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