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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 (31/344)

독왕

나는 당문의 근거지가 사천의 성도인 줄 알았으나 당영영을 따라 도착한 곳은, 면양을 조금 못 간 한 마을.

뒤로 기이한 열대림이 무성한 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현판.

사천당가(四川唐家)

“당 소저 그런데 당문의 위치는 성도가 아니었습니까?”

내 물음에 당영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성도는 사천에서 제일 큰 도시니 편의를 위해 운영하는 곳이고, 진짜 당가의 본거지는 이곳 당가산(唐家山)이지요.”

산에 자신들의 성인 당을 붙이는 저 광오(狂傲) 한 모습이라니.

사천은 대한민국의 4배 정도의 크기. 

그러니 지역구 조폭이지만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당문은 전국구를 넘어서는 조직, 규모가 엄청났다.

나는 세가(世家)라는 것이 좀 큰 대감집 정도를 생각했는데, 이건 그냥 뭐 마을 하나 정도의 크기인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현판(懸板)이 걸려있던 입구에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서야 당영영과 가주의 가족들이 생활한다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고, 그리고 또 한 전각까지 이르러서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가주가 기거하는 전작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근처에 마당을 쓸고 있는 시비가 허겁지겁 달려와 당영영이 도착했음을 가주에게 알렸다.

“가주님, 아가씨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그래? 들라 하거라.”

당영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가주가 기거하는 곳임에도 상당히 단출한 모습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우리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는 중년의 사내.

아마 저 사람이 당영영의 아버지인, 내가 당영영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여 불렀던, 딸인 당영영을 눈치 없게 키운 장본인 독우(毒雨) 당지운(唐沚雲) 가주 본인 이리라.

특이하게 아직 사오십 대인 것 같은데, 귀밑머리만 하얀 모습, 숯 검댕이 눈썹의 인상이 강해 보이는 남자였다.

“아버지 이쪽이 류청운 공자님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류청운이라고 합니다. 경사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포권의 예를 공손하게 취하며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그는 내 앞까지 다가와 내 손을 따듯하게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오, 그래 자네였구만 천(天)이가 그리 자랑하더니 이리 영민하고 훤칠하다니. 우리 영영이가 실수는 하지 않았나 모르겠구만. 그래 오는데 별고는 없었나?”

내가 당영영을 힐끗 바라보자 그녀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딸이 눈치도 없고 배빵도 놓았다고 일러바치는 머저리가 될 수는 없는 법.

더군다나 눈치 없는 당영영의 성격을 보았을 때 나는 당 가주를 처음 보는 순간 제갈 가주를 떠올릴 수 있었다.

눈치가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살피지 못한다는 것, 결국 얼마나 오냐오냐 길렀는지 알 수 있는 것이랄까?

그리고 제갈 가주와 둘이 의기투합해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둘의 성향이 비슷하다는 소리.

결국, 이 사람도 딸바보일 확률이 아주 높은 것이었다.

“아닙니다. 당 소저의 영민함과 아름다움을 대하니, 당문의 가주님을 꼭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영영이의 영민함과 아름다움을 대하니, 어찌 나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었단 말인가?”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대충 내 입에서 어떤 칭찬이 들려올지 알 것 같은데, 굳이 내 입으로 다시 자세하게 읊어달라는 당 가주. 

당 가주는 생각보다 음흉한 중년이었다.

‘그래도 뭐 이제 내 꽌시가 될 분이니 기분 정도야···.’

나는 그의 음습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했다. 

“당 소저께서 저희 객잔에 흑도인들이 난입해 소동을 벌이는 것도 막아주시고, 예까지 오는데 도적들과 녹림의 무리에게서도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인명의 귀함을 알고 난처한 사람을 돕는 아가씨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곧 협(俠)이요. 악한 무리를 보고도 물러나지 않는 강함은 곧 절개(節槪)이니. 협이나 절개는 홀로 터득할 수 없고 가르침이 필요한 것, 당연히 가주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버지인 당 가주님을 만나 뵙고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다시금 포권의 예를 아주 공손하게 취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등줄기에 닭살이 돋아나고 눈치 없는 당영영에게 빼앗긴 환병 생각하면 속이 쓰렸지만, 원래 맹수들이 사는 세계에서 초식 동물로 살아가려면 주둥이라도 잘 털어야 하는 법.

별주부 전에서 토끼도 입을 잘 털어 살아남지 않았던가.

‘제 간은 밖에 빼두고 다닌답니다.’

나도 그러니 간 쓸개 다 빼놓고 다니기로 했다.

뭐, 그러다 보니 자꾸 무력이 아닌 언변, 재주 같은 스텟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으니.

그렇게 내가 감사함을 표하자마자, 잘 익은 수박을 톡 내려치면 쫙 갈라져 속살을 드러나는 것처럼, 가주의 입이 쫙하고 벌어지며, 가주가 수박의 붉은 속살 같은 잇몸을 크게 드러내고는 웃어대기 시작했다.

“뭐라? 크하하핫” 

신이 나게 웃어 재끼는 가주.

옆을 보니 당영영은 내가 영민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자기를 칭찬하는지 알고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여튼 눈치 없긴.’

당영영은 정말 문제가 심각했다. 

선천적 눈치 결핍이라고나 할까?

대체 얼마나 오냐오냐 키우면 저럴까? 하는 걱정의 눈빛으로 두 부녀를 바라보는데, 신나게 웃고 나에게 덕담까지 몇 마디 한 가주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안색을 싹 바꾸고는 당영영에게 물었다.

“영아, 그런데 녹림의 무리가 나타났더냐?”

나와 당영영을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이 아닌 암흑가 보스의 눈빛으로 묻는 가주.

일반인인 나는 기저귀 없이는 대화할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예, 아버지 이틀거리쯤 관도에서 통행세를 걷고 있었습니다. 산채를 옮기느라 지나가는 길이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얼마 안 있으면 아버님의 산수(傘壽)로 중원 여기저기에서 손님들이 오실 텐데, 관도를 한번 살필 필요가 있겠구나.”

살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그냥 슬쩍 보고 온다는 것이 아닌 것같은 분위기.

가주는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로 당영영과 이야기를 끝내더니, 다시 아주 인자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아, 여독으로 피곤할 테니 쉬다가 저녁이나 같이하세, 류 소협”

‘무슨 사이코패스냐고···.’

순식간에 변하는 그의 표정과 분위기에 섬뜩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예, 아, 알겠습니다. 어르신.”

제갈 가주는 그래도 딸바보에 호르몬 불균형 정도의 점잖은 보스였는데, 여기 보스는 독을 만져서 그런지 음험한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다.

그렇게 음험한 당가의 보스와 대화를 나누고, 시비의 안내를 받아 따듯한 물에 목욕까지 하고 안내된 방에서 쉬고 있자,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다시금 눈치 없는 당영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 공자! 류 공자! 주무시나요?”

“아니요. 잠들지 않았소.”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자 목욕을 하고 분이라도 칠했는지, 말끔한 모습의 당영영이 문밖에서 뭔가 사고를 치기 직전의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영영의 얼굴을 보자 왠지 불안한 느낌.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리며 뜬금없는 관광 제안이 들려왔다.

“자, 제가 당가를 구경시켜 드릴 테니 가요.”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당가를 구경시켜준다는 당영영.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옷소매를 잡아채더니 나를 곧장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여인이라도 무공을 익힌 몸이라 그런지, 아무리 힘을 줘도 복날 앞마당 누렁이 마냥 속절없이 끌려가는 몸뚱어리.

“아니, 당 소저 나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몸이라 푹 쉬어 줘야 하는데···.”

“남자가 허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되죠!”

“아니, 그래도 저는 내공도 없는데···”

“남자가 무슨 말이 그리 많아요. 대체!”

그렇게 그녀에게 질질 끌려 도착한 곳은 후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열대 화초들이 만발하고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기이한 정원.

강제로 끌려왔지만, 생각보다 이건 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절로 나오는 감탄사.

“오··· 이건···”

“어때요? 대단하죠?”

파리처럼 앵앵거리는 당영영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늘어진 가지에 만발한 이름 모를 꽃과 그 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깔린 판석(板石). 홀린 듯 그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판석이 깔린 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한편에 모여 피어있는 보라색의 아름다운 꽃이 보였고, 이끌리듯 그 향기를 조심스레 코로 들이켜 보았다.

향긋하게 콧속으로 퍼지는 꽃의 달콤한 향.

‘정말 별천지구나.’

한창 꽃향기를 들이키며 감상에 빠져있는데 들려오는 당당영의 목소리.

“그거 독초인데···.”

“예?!”

파리처럼 앵앵거리던 당영영의 목소리가 뇌에 천둥처럼 내리꽂히고, 나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숨을 뱉어내려 했으나 먹은 것도 아니고 향을 맡은 것인데, 숨을 어찌 뱉어낼 도리가 없는 것.

캑캑거리며 주저앉아 어쩔 줄 몰라 하자 꺄르르 웃어 재끼는 당영영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아하하하! 먹어야 독이 되죠!”

내 모습을 비웃으며 배를 잡고 웃는 당영영. 

‘하아···.’ 

현기증이 몰려왔다.

잡아 죽일 것같은 표정으로 째려보자, 눈치가 없어 그런지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진 못한 당영영이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오두(烏頭)라서 먹지 않으면 안 죽어요.”

오두라면 투구꽃, 바꽃, 바곳 이라고도 부르는 사약의 재료!

당문답게 후원에도 독초를 심은 모양.

“설마 여기 있는 것들 모두?”

“네, 전부요. 그래도 여기 피어있는 것들은 먹지 않으면 죽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보시고 즐기세요.”

그러나 이미 흥이 확 깨어버린 상황.

왠지 다시 다가가기가 꺼림직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자 들려오는 당영영의 목소리.

“아니, 대체 남자가 무슨 겁이 그리 많아요?”

“당 소저 독을 다루는 사람이 어찌 그런 말씀을.”

나는 그녀를 꾸짖었다.

그러자 토끼같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묻는 그녀.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그녀에게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설명했다.

“독이 얼마나 공평하고 무서운 것인 줄 아십니까? 절대 고수도 어른, 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걸리면 그냥 뒈지는 것입니다. 남자라고 독이 피해 가지 않소이다!”

그러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

“거 허여멀건한 놈이 말은 아주 잘하는구나. 허허허”

당영영과 내가 뒤를 바라보자 웬 노인 하나가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날듯이 달려가 품 안으로 뛰어드는 당영영.

당영영의 할아버지라면 전대 보스? 독왕(毒王) 당비령(唐飛靈)이 분명했다.

“아이고 우리 영영이 아버지 심부름은 잘 다녀왔느냐?”

“네, 할아버지 독물(毒物)은 많이 잡아 오셨나요?”

“그래 아주 많이 잡아 왔지, 그런데 저놈은 누군 게냐? 네 짝으로 데릴사위를 들인다는 소리는 내 아직 못 들었는데?”

끔찍한 소리를 하는 노인.

자고로 여자는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인데, 당영영이 여우같이 이쁘긴 해도 눈치가 제로인데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여우라도 티벳 여우는 사양이고,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는 정말 곤란했다.

“하, 할아버지도 참. 제, 제갈가에서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려고 온 분이에요.”

당영영이 내가 누군지를 설명하고 나도 바로 독왕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류청운이라고 합니다. 무림에서 명망 높은 독왕 어르신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인사에 치우라는 듯, 한 손을 슬쩍 흔드는 독왕.

그는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당영영에게 말했다.

“영영아 저런 허여멀건한 놈은 조심해야 하는 게다 알겠지? 딱 봐도 양상군자(梁上君子)처럼 생기지 않았느냐.”

“할아버지, 그래도 제갈가의 손님이신데···.”

가만 보니 당영영을 저리 눈치 없게 키운 것은, 아비의 잘못만은 아닌 모양, 여기 진짜 당사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가 끝나고.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인 꼰대 짓을 하는 노인네 그리고 당영영과 다음으로 향한 곳은 늙은이가 잡아 왔다는 독물들이 있다는 곳, 독물을 구경하러 그곳으로 향했다. 

당영영과 노인을 따라 어느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당문답게 전갈, 뱀, 지네등 갖가지 독물들이 나무통 여기저기 가득 들어있고, 심지어 물이 담긴 큰 통에는 복어들도 헤엄치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내가 감탄하듯 말하자, 당영영이 옆에서 설명했다.

“그렇죠? 다 할아버지가 잡아 오신 건데 대단하죠?”

“그렇네요, 그러니까···.”

“됐느니라! 무공도 익히지 않고 딱히 재주도 없어 보이는 허여멀건한 놈에게 칭찬 들어봤자···”

노인의 꼰대 짓에 다시 한번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당영영이 자기 할아버지의 무례에 미안했던지 갑자기 내 칭찬을 해왔다.

“류 공자가 얼마나 재주가 뛰어난데요. 무공은 익히지 못했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신다고요. 할아버지도 드시면 깜짝 놀랄걸요?”

“뭐 제깟 놈이 만들어봤자···.”

‘당문의 독 공이란 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당영영의 눈치 없음도, 사이코패스인 당문의 가주도 그리고 독왕의 노망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했다.

초기, 중기, 말기로 이어지는 독공을 익힘으로 인한 가문의 업.

그러나 환자라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지는 않는 법.

요리인의 요리를 무시하는 것은 무림인으로서 실력을 무시당하는 것과 같은 수치!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 요리를 먹어보지도 않고!

“어르신 그러면 제가 만든 음식을 드시고 어르신이 맛있다고 하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뭐라? 이놈이? 그래도 영영이는 못 준다! 이놈아!”

‘아니, 그거 아니라니까!’

내, 저 노망난 노인의 입에서 맛있다는 소리가 반드시 나오게 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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