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며칠 전 그 일 때문인가? 영감이 독기가 바짝 오른 모습으로 캐삭빵을 주선했고, 메기수염도 아주 자신있어하는 모습.
메기수염이 무엇을 믿고 저리 자신만만한지 모르겠지만, 정말 저놈이 이 시대 최고 요리사의 제자라도 캐삭빵에 진심인 민족 출신으로서 결코 물러설 수는 없는 일.
내 유전자 아니, 영혼 안에 흐르는 그 무엇인가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렇게 당사자인 둘이 캐삭빵에 합의하자 독왕이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다시 좌중을 향해 말했다.
“생각해보니 아무 요리나 만들 수는 없는 일, 당문의 생일상에 내는 요리이니 당문과 제일 어울리는 요리를 만들 거라, 그리하면 오늘 모인 무림의 호걸들께서 맛을 보고 누가 이겼는지 정해주실 테니. 알겠느냐 둘 다? 어떻소 모두?”
이 자리에 모인 것은 각 방파와 세가에서 온 축하객 그리고 무림의 명망 있는 인사들.
싸움에 환장하는 분들이 모인지라, 칼과 피가 난무하는 대결이 아니더라도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비무에 다들 신이 난 표정이 되어 외쳤다.
“잔치가 아주 재미있어질 것 같소이다!”
“좋소이다!”
“이거 미녀들의 춤보다 더욱 흥미롭소이다!”
“역시 당문의 생일잔치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구려!”
손님들의 환호와 흥이 잔뜩 오른 독왕의 거침없는 질주에, 당 가주가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난처한 표정으로 나에게 전음을 날려 보냈다.
[소협 괜찮겠는가? 아버지께서 너무 지나치신 것 같은데, 혹시라도 소협의 체면이 깎인다면 내 천이를 어찌 보겠나? 내 나서서 한번 아버지께···.]
아마 의형제의 꽌시가 이런 자리에서 망신당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
사이코패스인 줄 알았는데 당문에 그래도 개념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하나쯤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걱정하지 말란 의미로 가주를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그러자 가주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곧바로 하인들을 불러 지시했다.
“요리를 만들 것이니. 식탁 두 개와 화로 그리고 둘이 필요한 것을 말하면, 모두 준비해주거라!”
기본적인 요리 준비가 되기 전에 잠시 시간이 남아 좌중을 둘러보니, 나를 보고 실실거리는 독왕.
그 모습에 얄미운 늙은이가 만든 판에 메기수염과 춤을 추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졌고. 생각해보니 잔칫집 춤판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흥이 나는 법.
더군다나 늙은이는 이 잔치의 주인공이니 같이 추어야 하지 않겠나?
독왕을 향해 아주 공손한 자세로 포권을 취해 보이며 그를 불렀다.
“독왕 어르신.”
“왜 그러느냐 인제 와서 겁이라도 나느냐?”
또다시 살살 이죽거리는 독왕, 그러나 이죽거리는 것도 지금뿐.
“아닙니다. 다만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 뭐 해보거라. 인제 와서 무를 수는 없으니. 그리 알고, 말이다.”
‘전생의 나는 캐삭빵에서 쫄이 없는 민족 출신이거늘! 어딜!.’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 말하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독왕에게 물었다.
“분명 독왕 어르신께서는 당문에 어울리는 요리를 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렇지.”
“하지만, 저는 무림인이 아닌지라 당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가 당문에 어울리는 요리를 만들려면, 먼저 제가 당문을 알아야 하는 것. 그렇다면 제게 당문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독왕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당문을 보여달라니 황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독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라? 네 녀석은 여기 도착해서 열흘도 넘게 우리 귀한 영영이를 독점 아니, 에게 당문 이곳저곳을 안내받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당문을 모르겠다고?”
‘그렇지!’ 역시나 예상대로의 반응.
나는 빙그레 웃으며 독왕을 향해 되물었다.
“당문의 정신과 기상이 한낱 전각이나 후원 따위에 녹아있단 말씀이십니까?”
“뭐라?!”
급하게 당황하는 독왕.
내 말에 그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자기 말을 정정했다.
“그, 그래 내 잠시 경솔히 대답했구나. 그, 그렇지 당문의 건물이나 후원 따위에 당문의 정신과 기상이 담겨있을 리는 만무한 일. 그래, 그럼 내가 너에게 어찌 당문을 보여주면 되겠느냐?”
급하게 독왕이 자기의 말을 정정하며 나에게 물었지만, 내가 해줄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는 무림인이 아니니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보여주실 분이 방법을 찾으셔야···.”
내가 난처한 듯 말하자, 짜증이 치솟는 얼굴이 되어버린 독왕.
그의 양쪽 관자놀이에 비를 맞아 튀어나온 듯 토룡들이 꿈틀대며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늙은이를 판에 끌어들이기 위해 무공이라도 보며 달라는 말이었지만, 무공은 친한 사이에도 쉬 보여달라 말할 수 없다는 전생의 무협지 지식이 떠올라 돌려서 말한 것인데, 답답한 노인네는 당영영의 할아비 아니랄까, 전혀 눈치를 못 챈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말해줬는데 눈치조차 못 채다니. 이런 답답한 일이.’
인성질 빼고는 잘하는 게 없는 늙은이의 모습에 속으로 한탄할 때, 좌중에서 한사람이 포권을 하며 일어나 말했다.
“역시나 제갈가에서 왔다고 하더니, 소협의 지혜가 뛰어나군. 독왕 어른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화산에서 오신 태청양 장문인.”
하와이도 아닌데 남자 새끼가 온통 꽃이 그려진 옷을 입고 다녀 누군가 싶었는데, 매화 오타쿠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던 모양, 전국구는 역시 패션부터 남달랐다.
그가 일어나 독왕을 향해 제안했다.
“모름지기 문파나 세가의 정신과 기상, 그 정수를 담아낸 것은, 각 문파나 세가의 무공이 아니겠습니까? 당가의 무공을 보여주심이 어떠신지요? 저희에게도 독왕 어르신의 무위를 견식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매화 오타쿠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주 시원하게 해주는 오타쿠 대장.
내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독왕이 화산파 장문인의 말에 그제야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내 볼을 쥐어뜯고 싶은 표정이 되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고얀 놈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게로구나! 그래, 까짓거 내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마. 허나, 그것을 보고 만들어낸 요리가 여기 무림의 명망 있는 호걸들을 납득하게 하지 못한다면, 혼이 날 줄 알 거라. 알겠느냐?”
“콜 이옵니. 아니,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호걸들께서 납득해 주시면 독왕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독왕이 이번에는 자신이 절대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네가 들어달라는 소원, 한 가지를 무조건 들어주마! 어떠냐?”
“좋습니다!”
그렇게 우리 이야기가 끝나자 옆에 있던 당영영이 걱정이 되었던지, 나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전음을 날려왔다.
[공자님 어쩌시려고 자꾸 판을 키우세요!]
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나직이 말했다.
“사나이 인생 뭐 있습니까? 올인 이지요.”
“예?”
당영영이 내가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보였는지 내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하긴 그녀가 사나이 올인을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일단 그녀는 여자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지면 요리도 못하게 되는데, 혼 좀 나는 게 대수랴? 리스크가 커질수록 리턴도 커지는 법.
이미 벌어진 판, 원래 도박은 이기는 놈이 다 먹는 것이니, 지금 상황에서는 판은 클수록 더 좋은 것이었다.
그렇게 당영영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고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독왕이 어디선가 주워온 짧은 통나무 하나를 들고 저 멀리 공터 쪽으로 걸어 나가더니, 나를 향해 이죽거리며 외쳤다.
“내 당가 무학의 정수를 보여줄 테니 잘 보거라! 누가 나를 좀 도와주겠소. 내 암기로 쓸 나무젓가락이 필요한데?”
독왕의 말에 아까 그 오타쿠 두목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독왕의 생일이시니,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허허, 그리하면 내 생일 선물로 충분하겠소. 자 받으시오!”
독왕의 말과 함께 독왕의 손에서 통나무가 공중으로 던져지고, 하와이안 패션을 입은 오타쿠 두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뽑힌 검.
-챙
‘일 검?’
단 한 번의 소리가 나고서 오타쿠 두목은 어느새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독왕이 던진 통나무도 독왕의 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러자 좌중에서 사람들이 탄성과 환호를 내뱉었다.
“허허,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저리 대단하다니, 아주 좋은 구경을 했소이다.”
“역시나 화산! 이 악양비 오늘 크게 식견을 넓혔소이다.”
사람들의 찬사에 자리에 앉아 싱긋 미소 짓는 오타쿠 대장.
그리고 그때 독왕의 외침이 들려왔다.
“잘 보거라 이것이 당문의 만천화우(滿天花雨)이니라!”
독왕이 공중으로 부양하듯 떠오르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손에 든 통나무가 분해되듯 젓가락으로 변하더니, 하늘을 날아 돌이 깔린 바닥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촤아아악 후두두두둑
‘오오! 저것이 만천화우!’
말로만 듣던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과 만천화우를 한자리에!
그러나 좌중은 환호하지만 내게 남겨진 것은 허탈함.
‘씨바! 근데 뭐가 보여야지?’
뭐가 ‘슥삭’ 하니 끝나고, ‘촤악 후두둑’ 하니 끝나니 전혀 감흥이 없었다.
무림인들은 신이 났지만, 저게 정말 보여서 저러는지 안 보이는데 안 보인다면 쪽팔려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
좌중의 환호가 끝나자 독왕이 비릿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물었다.
“어찌 잘 보았느냐?”
“예, 뭐···. 그런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뭐, 뭘 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하거라.”
아마도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을 아는지 아주 싱글벙글한 독왕.
나는 그가 만천화우를 날린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돌바닥에 손가락 한 마디만 남기고 깊숙하게 틀어박힌 나무젓가락들.
‘어휴. 노인네 기운도 좋네.’
한참을 만천화우가 쏟아진 곳을 구경하자 독왕의 약을 올리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리 오래 본다고 보이겠느냐? 크흠.”
그러나 빨라서 볼 수 없는 것은 과정이지, 결과는 눈이 있으니 볼 수 있는 것.
“이건···. 바꽃이군요?”
“아니, 네놈이 그건 어떻게?”
놀라 눈을 부릅뜨는 독왕.
무질서하게 떨어져 내린 젓가락의 빗줄기는 꽃 한 송이를 그리고 있었고, 그것은 온종일 내가 당문의 후원에서 구경하던 바꽃이 분명했다.
위의 투구 부분은 없었지만, 꽃송이만큼은 수도 없이 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던 것.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독왕을 뒤로하고 잔칫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이미 결투장은 완성되어 있었다.
당영영이 잽싸게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공자님 어떤 음식을 만드실 건가요?”
당영영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서 잠시 무엇을 만들지 생각해보았다.
‘당문에 가장 어울리는 요리라? 당문은 독. 그렇다면 뱀이나 전갈 같은 요리를 해야 하나?’
그러나 뱀탕 같은 것은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이고, 나도 별로 해본 적 없는 요리.
잠시 고민하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도착한 첫날에 있었던 일, 당영영을 따라 독물을 키우는 전각에 들렀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던 수많은 독물 중에 아주 당문과 아니, 늙은이와 어울리는 재료가 떠올랐다.
심술 맞은 늙은이를 닮은 표정의 물고기.
하돈(河豚)! 복어!
여기서는 하돈(河豚), 강돈(江豚) 따위의 이름으로 불리는 강의 돼지라 부르는 복어!
그보다 더 당문과 심통 맞은 늙은이에 어울리는 음식이 어디 있겠나?
대령숙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놈이 뭘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재료로 복어를 쓴다면 나를 넘어설 수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