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나무
제갈청과 자매나 마찬가지라는 당영영의 편지와 당 가주의 편지가 제갈가로 보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새파랗게 질린 한 남자가 경공의 고수들이 나르는 가마인 유교자(有轎子)에 실려 당문의 입구에 패대기쳐지듯 당도했다.
“꾸에에엑···”
도착하자마자 유교자에서 굴러 나와 몸 안에 모든 것을 게워낸 남자는 중국 영화에서나 보던 도사 같은 모습이었는데, 남자는 내장까지 게워내듯 한참을 마당에서 빈대떡을 구워대더니, 곧 기절해 한나절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신속 배달을 위해서 경공 고수들의 유교자에 실려 온 모양인데 멀미가 장난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멀미로 한나절이나 기절해있던 도사는 정신을 차리자 나를 찾아와 이름을 묻고, 제갈가의 가족관계를 읊어대더니, 당문의 사람들을 다 끌고 사당으로 가서 뭔가 점을 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팔괘 같은 것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갑자기 소리치는 남자.
“좋습니다. 더할 나위 할 것 없이 좋습니다!”
사짜 냄새가 풀풀 나며 내가 쓴 부적만도 못한 듯해 보이는 영험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당 가주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오오, 그렇게나 좋단 말인가?”
남자의 좋다는 말에 당문의 가주인 의부가 신이나 은자를 몇 냥 건네자, 점쟁이는 더욱더 신이 나서 입을 털어대었고, 결국 그의 주둥이는 의부의 주머니에 은자 몇 냥을 더 꺼내게 만들고 나서야 멈췄다.
그리고 그와 제갈가에서 온 무사들은 당가에서 준비한 몇 가지 선물이 담긴 상자를 가지고 다시 재빨리 제갈가로 되돌아갔다.
이쪽에서 보낸 선물은 별것은 아니었다.
아마 제갈 가주가 준비하라고 줬던 돈으로 사야 했던 물품인 모양인데, 녹색과 붉은색의 비단과 몇 가지 제갈청을 위한 비녀 같은 것이 포함된 선물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보름쯤 지났을까?
예의 가마에 실려 옷과 부채 하나가 도착했다.
옷은 이쪽에서 보냈던 녹색 비단으로 만든 관복 같은 모습, 부채는 제갈가의 상징인 학우선 이었다.
‘옷을 지어서 보낸다고? 이것은 마치···.’
그런데 학우선은 둘째치고 옷을 지어 보낸 것에 뭔가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비단을 보내고 옷을 지어 보내는 건 혼례식에서나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녹색 옷을 보면 그것은 또 아닌 것 같고··· 뭔가 조금 긴가민가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원래 혼례에 입는 옷은 당연히 중원사람들이 길하다고 생각하는 붉은색이기에, 혼례라면 붉은 옷을 지어 보낼 것인데 내게 도착한 것은 녹색 옷이었기 때문이다.
녹색은 혼례와는 전혀 상관없는 색.
‘그냥 내가 옷이 없으니, 식에 입으라고 한벌 만들어 주신 거겠지?’
당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독을 사용하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알리고 싶은지, 녹색 아니면 붉은색 옷을 입는 걸 선호했는데, 당문의 나의 가족임을 자처하니 당문의 색에 맞춘 것 싶기도 하고···
-피식
제갈청이나 당영영과 결혼한다고 한번 상상해보았다.
‘여보, 들어오실 때 진법 조심해서 들어오세요. 발을 헛디디면 혼이 빠져나가 버릴 수도 있답니다?’
‘여보 아침에 기운 내시라고 하돈의 독과 전갈 그리고 뱀독을 섞어 건강 주스로 준비했어요. 어서 한잔 쭉 들이키세요.’
하루하루 목숨이 오가는 삶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갑자기 혼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딸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딸은 준다는 건, 판타지 동화에나 나오는 스토리고, 제갈가쯤 되는 지역구 탑 조폭이 하찮은 객잔 주인에게 딸을 준다?
망상도 그 정도면 병인 것.
요즘 일이 잘 풀려 당가나 제갈가와 꽌시가 되니 내가 간이 좀 커지긴 커진 모양이었다.
저런 쓸데없는 망상도 하고.
망상에서 빠져나오며 피식 웃는데 제갈가에서 온 장로라는 분이 나를 향해 무엇인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류 공자 길일(吉日)이 두 개가 나왔는데 어느 때가 좋으시겠습니까? 빠른 일이 있고 늦은 일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빠른 일로 하시지요. 제가 좀 급해서.”
“허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저희가 당연히 서둘러야겠군요.”
장로의 물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생각해볼 여지도 없는 말, 당연히 빠른 날짜가 좋았다.
나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객잔의 수리도 이제는 끝났을 것이니 영업도 다시 시작해야 했고 가련이 월급도 다시 챙겨줘야 했으니까.
마냥 여기서 몇 달씩 비비다가, 또 제갈가까지 가서 한두 달, 아주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내 대답을 듣자 미소를 머금고 다시 물어오는 제갈가의 장로.
“아, 그리고 가주께서 식을 너무 저희 쪽에서 원하는 대로 하는 것도 공자님의 체면을 너무 생각하지 않는 일이니, 혹시 어떤 바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혹시 생각해둔 것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었다.
의형제 결의식이라는 건 삼국지 마니아들에게는 로망의 결정체 같은 것, 그러니 당연히 나도 로망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고 있었고, 남자는 로망을 찾아 불로 뛰어드는 생물.
나는 제갈가의 장로를 향해 물었다.
“혹시, 제갈가에 큰 복숭아나무가 있습니까?”
내 물음에 제갈가의 장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제갈 가문은 촉한의 왕이셨던 유 선주(先主 유현덕)님의 도원결의를 잊지 않는 바, 후원에 아주 오래된 큰 복숭아나무들이 있지요. 마침 한 달 후쯤이면 꽃이 만개할 때이군요.”
장로의 대답에 나는 눈을 지긋이 내리감고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뭔가 아련한 무엇에 잠긴 듯한 듯이.
“그럼, 식은 아무래도 그곳에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뭔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물어오는 제갈가의 장로.
내 입에서 어떤 이유가 나올지 무척이나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어, 어째서?”
“촉한의 왕께서는 동생분들과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를 맹세하고 평생을 함께하며 대업을 이루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촉한의 왕 유 선주(先主) 이래 복숭아나무 아래서 하는 맹세는 유 선주(先主)와 그 형제분들께서 굽어 보살피실 것이니. 저도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맹세하고 싶군요··· 평생, 이 마음이 변치 않기를 말이죠···”
말을 끝마치고 열린 창밖을 아련히 바라보자 들려오는 환성.
“오오오오오!”
“그, 그런···”
장로를 따라왔던 제갈가의 무사들과 당문의 식구들도 나의 말에 뻑이 가버렸는지 흥분해서 나를 향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록스타라도 강림한 것처럼 끓어오르는 분위기,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여, 역시 계자서를 줄줄 왼다고 가주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런 분이 저희 식구로!”
“역시 청운이는 생각이 깊구나. 복숭아나무 아래서 올리는 식이라. 그런 의미를 담는다면 제갈가의 가주도 좋아하겠지.”
장로의 극찬과 의부의 칭찬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 아쉬운 점이 있긴 했다.
도원결의는 원래 3인 큐가 정석이라 당영영까지 셋이 한 번에 흩날리는 복숭아 꽃잎을 맞으며 식을 하면 딱 맞는데, 일단은 듀오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하달까?
나중에 당영영한테 말해서 당문에서 할 때는 셋이서 해보자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문에도 복숭아나무가 있나?’
환호 속에 이야기를 끝내고 3인큐에 대한 흐뭇한 상상을 하며 처소로 향하는데, 나를 쪼르르 따라 나온 당영영이 질문을 해왔다.
뭔가 좀 기운 빠진 목소리로.
“가가, 그렇게 좋으신가요?”
“그럼 당연하지 않겠느냐. 제갈가의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식이라니. 모든 남자의 꿈 아니겠느냐.”
발걸음을 옮기며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런데 이게 원래 둘이서 하는 것보다···.”
한참 신이 나서 떠드는데 사라진 인기척.
주위를 둘러보자 당영영이 보이지 않았고, 아까 그 자리에서 당영영이 뭔가 기운 빠진 얼굴로 말했다.
“내일 봐요. 가가.”
그리고는 기운 빠진 발걸음으로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애가 풀이 확 죽은 모습이었기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영영의 저 기운 빠진 증상이 시작된 것은 사기꾼 같은 점쟁이 놈이 다녀가고 나서부터.
‘혹시 잡귀신이라도 들러붙었나? 十, 卍 뭘 써줘야 하지?’
어느 분께 부탁해야 영험한지 고민이 깊어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卍 이분도 여기가 본진은 아니었던 것.
‘둘 다?’
***
류청운과 헤어져 멍하니 후원을 걷다 방으로 들어온 당영영은 마음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처음에는 몸을 치료하기 위해 당문에 도착한 제갈청이 시장통에서 주워온 것같은 채도 한 자루를 꺼내며, 야서(野鼠)처럼 못생긴 자신에게도 정혼자가 생겼다며 기뻐할 때는 조금 놀라웠다.
“언니, 이것 보세요. 이게 그분의 입문(入門)도라고 해요. 이런 걸 저에게 주셨어요.”
“입문도라고? 이게?”
무슨 부엌칼을 입문도로 사용하는 신비한 문파가 있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 그것도 요리사.
“입문도라는 건 보통 문파의 식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 부족한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의미를 담아 주셔서 무척이나 기뻤어요. 아무래도 이런 몸인데···.”
“그래, 네가 좋다면 이 언니도 기쁘구나.”
제갈청이 있는 자리에서는 축복해주었지만, 제갈청이 떠나고 나지 당영영의 마음속에서는 근심이 솟아올랐다.
‘청이가 제갈가라니 그 후광을 원해서, 우리 청이의 얼굴이 저런데도 혼인을 하겠다는 것이 분명해. 어떤 놈인지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때마침 할아버지의 생일잔치에 놈을 초대한다니, 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음식을 잘한다니 맛도 한번 보고 싶어 놈을 맞으러 가는 것을 자청한 것까지는 좋았다.
여행하며 놈에게 딱 붙어 제갈청의 남편 될 놈이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험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일부터 류청운의 기분을 상하게 해보기도 하고, 무시해보기도 하고, 얄밉게 행동하거나 좀 친밀해져 어떤 행동을 드러내나 보려고, 친해진 척을 해보기도 했는데. 문제는 척만 하려 했던 친한 척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척을 넘어서 버리고 말았던 것.
그것을 알아채 버렸을 때는 이미 터진 둑처럼 마음은 흘러넘치고 있었다.
무공을 익혀본 적도 없는 평범한 남자가 독왕인 할아버지에게 지지 않으려고 매운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패기.
할아버지의 생일잔치에 선보인 뛰어난 실력.
아버지를 구해낸 엄청난 지혜.
그리고 항상 뭔가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유쾌함.
쓸데없는 격식을 따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은 이상한 남자.
더군다나 하돈을 손질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는 ‘설마 이 사람도 나를?’ 같은 상상을 했었지만.
자꾸만 오해하게 하고 슬쩍 마음을 내비치면 자기는 전혀 모르는 척 반응해 대체 왜 그러나 싶었는데.
아, 이놈 알고 보니, 눈치가 더럽게 없는 놈이었다.
자기보고 눈치 없냐고 묻더니 제가 눈치가 없었던 것.
속상함과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에 미쳐버릴 것 같은 밤이었다.
‘어쩌지···?’
내일 떠나는 제갈가의 장로의 손에 들려 청이에게로 보내야 하는 서찰의 내용이 고민되는 밤이었다.
***
옷을 가져왔던 장로 일행이 떠나고 스무날쯤 지나 우리도 제갈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의부인 당 가주와, 당영영, 당영영의 고모, 그리고 무사 십여 명.
경공을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당가에서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도 준비해주었고, 급 안에는 당영영에게 배가 터지게 먹여줄 만큼의 환병도 하나 가득 준비했다.
사천에서 섬서를 거쳐 호북까지 식을 위한 한 달이 조금 넘는 긴 여정.
여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등에 당이라고 쓰여 있는 옷을 입은 십여 명의 무사들이 호위하는데, 간 크게 덤빌 놈이 누가 있으랴.
그렇게 한 달이 조금 안 돼 호북의 죽산(竹山)에 도착하자 우리를 기다리던 제갈가의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유비의 호칭에 대한것은 송나라 기준으로 바로잡았습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가장 흔한 표현인 한중왕 유비 라고
기록하였는데 북송시대 유비를 부르던 호칭인 유 선주(先主)로 변경하였습니다.
촉한의 왕인 유비를 유 선주(先主).
유비의 아들인 유선을 후주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있는 문건이 있더라고요.
의견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