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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금(億萬金) (49/344)

억만금(億萬金)

나와 제갈청이 얼마나 많은 자손을 보는지까지 점을 치고 나자, 다시 축문 같은 것이 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긴 축문이 끝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곡식과 튀긴 과자 같은 간식거리를 신부와 나를 향해 한 움큼씩 뿌려주었고, 그 과정이 끝나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것으로 모든 결혼식이 끝이 났다.

“아이고 죽겠네.”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난 인사.

지친 몸으로 제갈청과 휘장이 쳐진 신방에 들어와 식은 차를 한잔 따라 간신히 갈증을 달래고 제갈청에게도 물었다.

“혹시 목이 마르지는 않소? 어? 처, 청 소저? 뭐라고 부, 불러야 하나···.”

호칭에 대해서 당황스러워 혼잣말하듯 말하자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노공(老公).”

“아, 그, 그렇구려. 부, 부인.”

생전 처음 하는 결혼인지라 어색하기가 그지없었고, 더군다나 연애 결혼도 아니고 강제 결혼이니 우리 둘의 사이는 더욱 어색했다.

뭔가 단둘이 있는 상황은 이게 처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어색한 목소리로 제갈청에게 다시 물었다.

“그, 그래. 부, 부인, 차라도 한잔하시겠소?”

그러자 제갈청이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공께서 봉황관을 벗겨주셔야 합니다.”

‘차 한잔 마시는 것조차 이리 복잡해서야.’

뭔 놈의 결혼식 절차가 이리도 많고 복잡한지.

나는 침대에 앉은 제갈청에게 다가가 머리에 쓴 관을 벗겨 옆에 탁자에 올려두며 말했다.

“이러면 되었소?”

그러자 다시금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

“며, 면사도···”

그녀의 말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전에 한번 보았던 오리주둥이와 밀가루 반죽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무 문제 없이 인공호흡도 하고 얼굴도 볼 수 있었잖아?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제갈청을 살린다 그 느낌으로. 절대 놀란 척, 싫은 척, 기분 나쁜 척, 같은 것은 하지 말자. 절대! 절대!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내가 놀라거나 실망한 표정을 지어 제갈청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

마피아 게임의 마피아가 아니라 진짜 중원 마피아가 신방으로 들이닥치고, 오늘 밤 죽을 사람으로 나를 선택할 것이 분명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밤 죽은 사람은 류청운입니다.’

사회자의 설명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렇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제갈청이 상처받게 하지 말자고 되뇌며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가까이 앉자 느껴지는 그녀의 뜨거운 체온과 면사 너머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숨결.

이리 긴장된 상황에서도 향긋한 체향에 뭔가 야릇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란 놈 진짜···’

“크흠···”

헛기침을 하며 한 손을 그녀의 귀로 가져갔다.

그러다 그녀의 차가운 귀에 손가락이 닿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읏···”

그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며 물었다.

“미, 미안하오···”

“아, 아니옵니다, 자, 잠깐 놀라서.”

이번에는 귀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해서 한쪽 귀에 걸려있는 면사를 고정하던 끈을 풀어내고 다른 한쪽마저 풀어내려 했는데···

-툭

한쪽 손에 잡고 있던 면사를 고정하던 끈이 내 손에서 슥 하고 빠져나갔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

멍한 얼굴로 제갈청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한참을···

“노, 노공? 노, 노공?”

당황한 제갈청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반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면사를 고정한 한쪽 끈이 벌려져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어?! 자, 장르가 다른데?’

나는 분명히 전생에서 죽어 중원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무림 문파들이 즐비한 것으로 봐서는 여기는 분명히 무협의 세계.

그런데 춘장으로 버무려진 이 세계에 제갈청만이 전혀 다른 장르였다.

그녀의 장르는 판타지.

그리고 그녀의 종족은 엘프.

엘프녀!

인간들의 미모 정도는 쌍 따귀를 올려붙인다는 그 전설의 종족이 내 눈앞에 있었다.

‘아니, 왜 중원에 엘프가?!’

인지를 넘어서는 외모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흑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와 깊은 눈 골, 호수같이 빛나는 푸른 눈동자, 볼록한 이마. 눈같이 흰 피부, 강남의 위대한 전문의들이 심혈을 기울여 깎아 만든 듯한 콧날 그리고 갸름한 턱.

완전무결(完全無缺)!

그녀의 외모에 마비라도 걸린 듯 굳어버리자, 그녀는 내가 자기의 외모를 보고 실망한 줄 알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소, 소녀의 외모가 이래서 노, 놀라셨습니까? 아무래도 핏기 하나 없는 흰 피부와 중원인 같지 않은 모습에, 죽은 자 같다고 다들 무서워하긴 하는데···.”

-철렁

가슴에서 뭔가가 발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자, 내 심장에 땅바닥으로 패대기쳐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크흑···’

그제야 움직여지는 입과 전신.

나는 그녀의 말을 급하게 부정하며 외쳤다.

“아, 아니오! 저, 절대 아니오!

그러자 그녀가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다시 물어왔다.

”그, 그럼 어째서?“

“어, 얼굴이? 어찌?”

예전과 달라진 아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얼굴이 어찌 된 연유인지를 묻자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얼굴은 야서(野鼠) 아니, 노공께서 일러주신 대로 음식을 조심해서 먹었더니, 부은 것도 사라지고 흉한 것들도 사라져 금방 예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다 노공 덕분입니다. 그래도 이 피부는 원래 타고난 것이라 보, 보기 좀 흉하지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인공호흡 할 때는 피부가 울긋불긋해 알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피부라니.

‘중원 놈들 흰 피부를 좋아해도 백인의 흰 피부는 꺼린다는 것인가?’

하긴 생각해보니 중원 놈들 빙기옥골(氷肌玉骨)이니 뭐니 하면서 흰 피부를 칭송해도 그것은 동양인 중에 흰 피부를 좋아한다는 것이지, 이렇게 진짜 백인의 흰 피부를 보면 위화감을 느낄 만도 할 것 같았다.

색감 자체가 전혀 다르니까 말이다.

보기 흉하냐고 묻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물었다.

“백설(白雪)이라는 뜻을 아시오?”

“흰 눈이라는 뜻 아니 옵니까?”

내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대답하는 그녀.

심장에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그러면 흰 눈을 왜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지 아시오?”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노공.”

“움켜쥐면 녹아 사라져 버리니 소유할 수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라오. 그러나 내 이리 손에 움켜쥐어도 사라지지 않은 백설이 있는데, 어찌 흉하다 하겠소.”

슬그머니 그녀의 한 손을 내 양손으로 붙잡자 어떤 모피보다 부드럽고 가녀린 손과 손목이 내 손아귀 안에서 살짝 떨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흰 얼굴이 등롱 아래서 그녀의 옷과 같은 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부, 부인···”

“노, 노공···”

우리의 식을 주관했던 도사 놈 아니, 도사님은 도력이 대단한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를 점치는 능력이 있으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갈가의 자손이 번성할 때까지 이 한 몸 불사르기로 작정할 것을 어찌 미리 아시고···.

그렇게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와 나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벌컥

우리 신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아주 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그녀와 나는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지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순간 마음속에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역시나.’

신혼 방으로 무례하게 뛰어 들어온 사람은 딸바보 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인이 문을 열고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계셨다.

저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진짜 첫날밤에 뛰어 들어오다니.

그래도 아내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다도 절한다고 했던가?

나는 오늘만큼은 아주 관대한 남자, 아니, 앞으로 장인에게는 무한하게 관대해지기로 했다.

밀가루 반죽을 웨딩케이크로 구워낸 분이 바로 저분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의 모든 걸 관대함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장인을 웃으며 맞이했다.

밤은 아직 기니까.

우리의 밤은 잠시 유예된 것뿐이니까 말이다.

“아이고 장인어른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장인어른!”

“이 사람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먼, 혼례식 내내 좀 얼굴이 어두워서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장인의 말에 급하게 변명했다.

그걸 따지러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장인은 예상과 다르게 전혀 다른 말을 해왔다.

“모, 몸이 좋지 않았는데, 아름다운 부인의 얼굴을 보니. 전부 나, 나았습니다.”

불치병이라도 아니, 죽기 직전이라도 병석에서 일으킬 그녀의 미모는, 강제 혼인 암이라는 희대의 불치의 병에 강력한 항암 효과를 내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이제 가세.”

“예?! 어, 어딜? 아직 첫날밤이···”

아직 첫날밤도 치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딜 가자는 장인의 말에 당황해 되묻자, 장인의 입에서 묘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이 친구 우리가 좀 식을 급하게 진행하느라 잠시 잊은 듯하구먼, 자네는 데릴사위 아닌가?”

“그, 그렇지요?”

“데릴사위가 무엇인가?”

내가 결혼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지 데릴사위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기에 장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몸의 기억 속에 있는 아주 정석적인 대답을 골라내서.

“데릴사위는 그, 신부의 몸값을 지급하지 못해서 처가에서 일해 몸값을 대신하는···.”

‘!!!’

“잘 알고 있구먼. 아, 그렇지. 내가 생각해보니 자네의 처지를 생각해 우리 청이의 몸값을 정확하게 정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 자네는 우리 청이 몸값을 얼마나 쳐줄 작정인가?”

장인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제갈청을 바라보자, 제갈청이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꿀꺽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빨려들 것 같은 제갈청의 두 눈을 바라보며 멍하니 장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어, 억만금(億萬金)···.”

내 대답에 걱정으로 가득했던 제갈청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방안에 켜진 모든 등잔의 빛보다 더욱 밝게 타오르고, 장인이 신이 난 목소리로 대소(大笑)했다.

한 냥이라고 말하고, 품에서 꺼낸 은자 한 냥을 장인에게 냅다 던져 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랬으면 내 아름다운 아내의 영혼은 영영 죽어버렸을 터.

천금매소(千金買笑) 나는 아내의 미소를 지키는 것과 나의 삶을 맞바꾸고 말았다.

제갈가의 노예 확정이었다.

***

노예가 확정된 날 아침, 손님들 사이에 끼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제의 아침은 자유인의 아침이었으나, 오늘은 아침은 노예의 아침, 모든 것이 나를 옥죄는 느낌이었다.

데릴사위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를 띠는데, 대표적인 것은 두세 가지.

내가 아예 제갈가로 들어가 여기서 평생 살며 여기 가문의 대를 이어주는 것과 신부의 몸값만큼 처가에 일해서 돈을 지불하고 제갈청을 데리고 나가는 것. 그리고 처가에서 아들을 낳고 아들이 장성하면 본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협상의 여지는 아직 남아있고, 장인이 돈을 지급하면 분가를 해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전부 장인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장인이 전부 계획한 걸까? 더군다나 야무지게 부려 먹으려고 일부러 분가시켜줄 것처럼 희망 고문을 하는 것이겠지?’

앞으로 제갈가의 머슴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 인생과 대체 뭐로 제갈청의 몸값을 대신해야 하는가 하는 걱정으로 가득한 아침, 만두는 모래 같았고 갱은 소금물 같았다.

그렇게 모래 같은 만두를 씹으며 소금물 같은 갱을 들이키는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름진 음식이 많았지만, 아침부터 다들 기름진 것을 먹는 취미는 없는지, 나와 비슷하게 다들 차려진 음식 중에 만두와 갱 정도로 아침을 때우고 있었는데.

당영영의 할아버지인 독왕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꽤 많았던지라, 자연스럽게 나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하의 진미를 맛봤다거나 다시금 맛보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말이다.

그리고 식룡(食龍)이라는 내 별호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제갈 가주, 여기 사위가 그렇게나 훌륭한 요리실력이 있다는데 마침 모인 무림의 호걸들에게도 맛을 볼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떻겠소?”

“맞소이다! 아주 기대가 되오. 이왕 이리 모였고 보름이나 잔치가 계속될 텐데 사위의 실력을 한번 보여주시오!”

“보여주시오. 보여주시오.”

장인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다가와 의향을 물었다.

“사위 어찌 괜찮겠는가? 손님들이 저리 원하는데 내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도 난처하네만.”

결혼식 피로연은 보름이나 계속될 것이고, 음식을 한번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그냥 넘어가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식룡은 시구를 짓는 것처럼 주제대로 음식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는데, 그냥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주제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저 사마세가의 사마결이 아주 재미난 주제가 생각났는데 말입니다.”

“그거 좋겠구려! 하하하. 오늘 또 식룡의 실력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목소리의 의견에 사람들이 다들 환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그리고 짜증이 가득 담긴 장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잉! 사마세가 놈들 아무튼!]

‘응? 지금 누구라고?’

“사위 그냥 내 거절하겠네, 아무튼 사마세가 놈들은···.”

장인이 입을 열어 축하객들의 요구를 거절하려고 할 때, 장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장인어른 저도 이제 제갈세가 사람이 아닙니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내 눈빛을 본 장인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 그렇지···”

“제갈세가가 어찌 사마세가의 도전을 피하겠습니까?! 저희는 제갈인데!”

이건 강제로든 어쨌든 제갈의 이름을 단 순간 물러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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