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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新婚旅行) (54/344)

신혼여행(新婚旅行)

사회 초년생이 연봉협상을 하는 기분이랄까?

따듯한 차를 마시고 있지만 찻잔은 서늘한 느낌을 나에게 전달했다.

목으로 넘겨지는 서릿발 같은 찻물.

-꿀꺽

긴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협상으로 제갈청과 언제 단둘이 소룡포를 빚을지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식룡(食龍)이니 나의 Jr. 은 곧 소룡(小龍).

어서 빚고 싶었다.

하지만 사심은 없었다, 모두 제갈가의 종사와 존경하는 제갈 형님의 가문 부흥을 위해서.

이등병 같은 자세로 앉아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의 속을 다 안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장인이 나를 바라봤다.

-탁

그리고 잠시 음미하던 찻잔을 식탁 위에 내려두고는 나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마세가 녀석에게 우리 가문의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다니, 자네의 실력에 감탄했네. 나는 자네가 의술에 좀 더 조예가 깊은 줄 알았더니 요리실력도 그에 못지않구먼.”

의술에 관련된 것은 아마 제갈청을 구하고 당 가주를 구한 것 때문에 생긴 오해인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해야 했지만, 그러면 첫날밤이 혹시라도 좀 더 연기될까 싶어 일단 입을 꾹 다물었다.

“과, 과찬이십니다.”

장인에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장인이 미소를 지었다.

“내 딸아이인 청이가 어미를 닮아 중원인보다는 색목인에 가까워 내 좀 걱정했는데, 자네의 안달하는 모습을 보니 내 걱정도 좀 놓이고··· 다만 자네가 청이의 몸값으로 억만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그 모든 빚을 제하여 주면 청이가 좀 서운해하지 않겠나?”

오늘따라 얄밉게 맞는 말만 골라 하는 장인.

하긴 좀 더 가치 있는 일이면 모르겠지만, 사마결 따위의 입천장을 거둔 일로 억만금을 제하기에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사마결 놈이 무협 세계관에 단골 악당으로 등장하는 4대 악인 중 하나이거나 혈마나 색마 같은 좀 더 거물이라면 모를까.

사마결 같은 잔챙이 따위를 혼내준 일에 가치를 크게 둔다면 반대로 아내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니까.

그래, 생각해보니 장인과의 딜은 내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중원에서 손꼽는 조직이라는 것은 대기업 총수나 마찬가지.

얼마나 많은 연봉협상과 거래를 해왔겠나?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면 사마결 따위 젖혔다고 기고만장해서 사천왕 밑에 군단장급에 들이박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인의 말에 내가 뜨거운 물에 데쳐진 나물처럼 급격하게 숨이 죽어버리자, 장인이 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나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1할”

“예?!”

갑자기 1할이라고 말하는 장인의 말에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었는데, 장인이 내 표정을 보고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억만금에서 1할을 제해주겠네.”

사마결 같은 잔챙이에 10퍼센트나 빚을 까준다는 장인의 패기.

계산해보니 사마결 같은 놈 9놈만 더 잡으면, 제갈청과 소룡포를 빚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얼른 장인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포권을 하며 장인의 큰 통에 감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감사합니다!”

“허허허, 그리 좋은가?”

“무, 물론입니다!”

장인과 이야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새벽부터 일어나 소롱포를 빚느라 잠을 자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기쁜 맘을 안고 내 숙소로 향했다.

대마두급은 찾기 힘들지만 사마결 같은 잔챙이는 중원에 널렸을 텐데, 적당히 혼내주면 내가 고대하는 그 날이 금방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을 안고 폴짝폴짝 뛰며 숙소로 향하는데, 저 멀리 정자에서 여자 둘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조금 다가가 잘 살펴보니 당영영과 아내인 제갈청이 정자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아주 정답게 나누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으나 왠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조금 궁금해졌다.

혹시 당영영이 내 험담을 하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결혼한 내 아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것들이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멀리 정자 뒤쪽으로 돌아 둘의 이야기가 들릴만한 곳으로 조금씩 다가가자 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요즘 너무 달라붙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럴 때는 조금씩 뭔가를 주면서, 다른데 정신이 팔리게 해주는 거야. 자기가 길들고 있다는 걸 모르게 말이야.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좀 덜하니까 말이지. 우리 집에서는 독물도 많이 기르니까, 단순한 짐승들은 내가 좀 잘 알지.”

제갈청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내가 너무 달라붙었나?’

믿을 수 없는 제갈청의 말과 나를 단순한 짐승으로 취급하는 당영영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둘 다 나를 저렇게 생각했다니.’

“아, 조금씩 말이군요?”

“응, 네 품이 그리워서 그러는 것이니까. 살살 다른 것으로 달래는 거지.”

제갈청의 품이 그리운 것은 맞는데, 나를 마치 동물 훈련하듯 해야 한다고 말하는 당영영의 말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당영영이 제갈청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스라이팅이었으니까 말이다.

배신감에 떨며 급하게 뛰어나가며 당영영을 제지했다.

“당매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대체···”

그런데 급하게 둘의 앞으로 뛰어나가자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 망망!”

개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니 제갈청의 품에 안긴 작은 똥개 새끼 한 마리.

나는 둘의 이야기를 엿들은 모양이 된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강아지 훈련사로 빙의한 것같은 모습으로 강아지 훈련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한참이나 펼쳐야 했다.

“견주님, 세상에 나쁜 개는 없어요······”

***

손님들은 소롱포를 맛본 이후 아침마다 질리지도 않는지, 소롱포를 내놓으라는 통에 몇 번이나 대접해야 했다.

또 소롱포를 먹는 법을 알려주었지만, 손님들은 이상하게도 내가 알려준 방법으로는 먹지 않았다.

그것은 한 손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는데.

“처음 먹을 때 입천장이 벗겨져 힘이 들었는데, 식룡이 가르쳐준 방법이면 맛있게 먹을 수 있구먼.”

“허허··· 이 사람. 이것이 식룡의 무공 초식이라면, 그것을 견식 하는데 팔 한 개도 아니고 입천장 정도면 거저인데, 무림인으로서 당연히 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나?”

손님의 말 한마디에 아침 식사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다들 잠시 후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롱포를 원샷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 그래, 그런 의미라면 내 당연히 값을 치러야지!”

‘아니, 미친놈들아, 입천장을 왜 지불하냐고 안 받는다고!“

손님들은 내 요리 초식(招式)을 견식(見食) 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입천장을 지불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좋은 음식 처먹고 쓸데없는걸 지불하는 손님들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만족한 손님들의 모습에 장인에게 추가 점수를 땄으니 아주 행복했다.

내가 추가로 획득한 점수는 1푼.

현재 총합산 점수 1할 1푼.

못해도 어서 3할대 타자가 되어야 하는데, 아내인 제갈청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울적했다.

그렇게 보름이나 이어진 결혼 잔치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축하객으로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되돌아갔다.

남은 사람이라고 해봐야 당가에서 온 당영영의 식구 정도.

당가야 가주끼리 꽌시인 의형제 간이라 손님이라기 보다는 한 식구에 가까우니 손님 대부분이 되돌아갔다고 보면 된다.

마지막까지 당가에서 남은 것도, 장인이 의부에게 온 김에 좀 더 있다가 가라고 사정을 했기 때문.

제갈청은 당영영이 좀 더 남아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렇게 한가해진 어느 날 아침을 먹고 제갈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장인이 나와 제갈청을 동시에 호출했다.

평소라면 아침에 문안 인사를 나눌 때나, 아침 식사 시간에 필요한 이야기를 했을 텐데.

어째서 둘을 같이 불렀나 궁금한 마음으로 가주의 집무실로 찾아가니, 테이블 위에 편지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고 가주가 손에 들린 편지를 읽으며 우리를 맞았다.

“부르셨습니까? 장인어른.”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 인사를 하자 장인이 편지를 내려놓고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청아 네 숙부가 결국 못 오게 되어 미안하다고 서찰을 보냈구나.”

그러자 제갈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숙부께서 결국 못 오시는 모양이군요?”

중원의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또는 명절 기간이 긴 이유는 쓸데없이 큰 땅덩어리 때문인데, 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은 뭔가 일이 있다는 것.

더군다나 제찰청의 숙부라면 포대륜 형님의 노붕우(老朋友)인 제갈각이라는 분.

장인어른의 동생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었다.

못 오신 이유는 대충 짐작은 할 수 있다.

관직에 올랐으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송나라의 공무원 군기는 좀 세다고 들었으니까.

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장인이 나를 향해 물어왔다.

“청이의 하나밖에 없는 숙부이고 내 동생이니 아무래도 인사는 꼭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쪽에서 오기 힘들다면 결국 이쪽에서 가야 하는데···. 자네, 동경(東京)에 있는 청이의 숙부에게 인사하러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나?”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

장인어른이 말한 동경이라면 북송의 수도 개봉(开封)을 말하는 것일 텐데, 몇 달이나 걸리는 그 거리를 신혼부부인 우리를 생이별시켜놓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억만금에서 8할 9푼이 남아있어도 그것은 곤란했다.

나는 이미 강하게 중독된 상태, 아내를 보지 못하면 금단증상(禁斷症狀)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티벳여우 같은 표정으로 장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 혼자 말입니까? 몇 달 동안 부인과 생이별해야 한단 말입니까?”

짜게 식은 내 표정을 보더니 장인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이, 이 사람 내 진짜 혼자 보낸다고 했으면 출수(出手)라도 할 얼굴이구먼. 내 아무리 혼인까지 한둘을 갈라놓겠는가?”

“그, 그럼?”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자 장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이 같이 다녀오게 장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올라가다 수로를 타고 올라가면, 더욱 일찍 도착할 수 있을 테니 오고 갈 때는 배편을 이용하도록 하고.”

‘이, 이것은 설마? 유, 유람선 신혼여행?!’

나는 감히 장인에게 무례했던 내 티벳여우 같은 표정을, 주인 맞은 애완견 같은 표정으로 바꾸어 장인을 향해 물었다.

“다, 단둘이 말입니까?”

화색이 도는 내 표정을 보고 장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청이도 무공이 그리 고강하지 않고, 자네는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니. 호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배편을 이용하면 수적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악주(鄂州 무한)에서 뜨는 배편에는 무장한 무사들이 있을 테지만, 안전은 중요하니까 말이야.”

아무튼 도적놈의 새끼들이 문제였다!

단둘만의 신혼여행에 객을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살려면 끌고 가야지.

“알겠습니다. 제가 천천히 다녀. 아니, 빨리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고급 유람선을 타고 북송 최대의 도시 개봉으로의 신혼여행이 이렇게 결정되었다.

***

신혼여행은 당가의 식구들이 되돌아 갈 때를 맞춰 제갈청과 같이 호위들을 끌고 이동하기로 했다.

장인의 말대로 악주(鄂州), 그러니까 북송 시대의 무한으로 가서 배편을 이용해서 가기로 한 것이다.

제갈청은 배를 타고 나와 개봉으로 간다는 말에 마음이 설레는지, 당영영에게 차를 마시며 자기의 기대감을 한껏 드러냈다.

“언니, 저는 배 처음 타봐요.”

“저런, 혹시라도 속이 불편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단다.”

‘하긴 나도 설레는데 제갈청은 오죽하겠나.’

그렇게 당영영과 제갈청과 차를 마시며 배를 타고 하는 여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뭔가를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뭘 잊고 있는 거지?’

뭔가 화장실을 다녀와서 뒤처리를 안 한 찜찜한 느낌.

내가 둘과 재미나게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생각에 잠기자 제갈청과 당영영이 나를 향해 물어왔다.

“노공? 갑자기 무슨 고민이라도?”

“가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생각에 잠겨있다 둘의 질문에 정신이 들어 곧바로 대답했다.

“아, 아니 뭔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겨 들고 말았다.

‘뭘까? 중요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푸우

갑자기 얼굴에 찻물이 뿜어져 왔고, 벼락같은 찻물을 맞고 소매로 얼굴을 훔치며 물이 뿜어진 쪽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안 봐도 당영영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당영영은 가끔 식도가 아닌 기도로 물을 마시는 버릇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붕어같이 입술을 내밀고 물방울을 흘리고 있는 입술은 당영영의 입술이 아니라 제갈청의 입술.

믿을 수 없는 현실.

‘아니, 고, 고맙긴 한데 대체 왜?’

대체 무슨 일인지를 설명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제갈청이 설명했다.

“어, 언니가 이러면 생각이 나실 거라고···”

고개를 돌려 당영영을 바라보자, 당영영이 자기 잘했지 않냐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영영이 집으로 되돌아가고 나서 제갈청과 단둘이 되면 꼭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았다.

당영영과 계속 친하게 지내야 하냐고 말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것은 생각만으로 참아야 했다.

이상하게도 진짜 찻물을 맞으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객잔! 가련이!’

생각해보니 약속했던 기간이 지나버리고, 내 객잔과 가련이가 방치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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