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왕(乞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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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의 정자 너머로 흐드러지게 활짝 핀 꽃들.
그중 가장 화려한 꽃이 핀 나뭇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고운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짹짹 짹”
그렇게 새의 지저귐이 잠시 이어지자 곧바로 다른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고 둘은 어우러져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이는 한 쌍의 새.
가지 위를 팔딱거리며 서로를 쫓기도 하고 서로의 깃을 골라주기도 하는 아주 다정한 모습.
그러나 그 모습은 오래 가지 못했다.
-휙
-따악
어디선가 날아든 돌이 두 새가 앉은 나뭇가지를 큰 소리를 때며 때렸고, 그에 놀란 한 쌍의 새는 어디론가 곧장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들이 날아가 버린 적막한 후원에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한숨 소리가 낮게 깔렸다.
“칫···. 하아···”
하지만 곧 긴 한숨 소리 사이로 어딘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나타난 한 쌍의 다람쥐가 새들이 떠난 후원의 풀밭을 구르며 장난을 시작했다.
정답게 어우러진 다람쥐 한 쌍을 보고 다시금 고운 손이 바닥의 돌을 주어둘 때쯤.
후원으로 뛰어 들어온 시비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놀란 다람쥐들이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달려온 시비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헤엑헤엑··· 아가씨, 식사 시간입니다.”
시비를 한번 슬쩍 본 당영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꽃을 한번 바라보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시비에게 대답했다.
“별로 생각이 없구나···”
“아가씨 어디 아픈 것은 아니세요? 요즘 입맛이 없으신가? 잘 드셔야죠. 부엌에 뭐 다른 걸 준비해보라 할까요?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아니, 그냥 좀 쉬고 싶구나···”
그런 당영영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시비가 놀란 음성으로 되물었지만, 정신없이 쏟아지는 시비의 물음에 당영영은 그냥 방에서 쉬겠다면 대꾸해 준 후, 곧장 자기의 방으로 향했다.
그냥 기운이 없고 귀찮았다.
길게 잠들고만 싶은 상태.
그렇게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선 당영영은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불에 곧장 얼굴을 파묻었다.
친자매 같은 제갈청의 혼례에 다녀온 후 왠지 기운이 빠져버린 당영영.
며칠 전에는 할아버지께 무공을 배우는 중에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암기에 손을 찔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했었다.
독이 발리지 않은 암기였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며···
‘내가 왜 이러지···’
원인을 모른다는 듯 자신에게 물었지만, 당영영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그렇게 몸을 비틀며 침상에 깔린 이불에 한참 얼굴을 비비던 당영영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침상 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기 시작했고, 침상 안쪽으로 손을 넣어 한참을 더듬다가 침상 속 은밀한 공간에 있던 물건을 하나 꺼내 손에 들었다.
당영영의 손에 들린 것은 천으로 만든 주머니 한 개.
기름이 먹어 여기저기 얼룩얼룩 기름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머니였다.
꺼내든 주머니를 조심스레 열자 당영영의 눈에 나타난 것은 여러 개의 환병.
당영영은 그중 부서진 한 개의 환병 조각을 조심스레 꺼내 손에 쥐었다.
몸에 지니고 있을 것을 주었으면 좋았는데, 바보같이 눈치 없는 가가는 먹으면 이내 사라져 버릴 것을 선물로 남겼다.
자기는 나비를 보며 자신을 떠올리라며 독접(毒蝶)인 자신을 상징하는 독침을 드렸는데, 환병 이라니···
서운한 마음이 흘러넘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가는 눈치 없는 바보니까.
분명 아니라고 했지만 청이와의 혼례도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청이가 걱정되었지만, 혼례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청이를 아껴주는 듯해서 그냥 의혹으로만 남기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리 눈치가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남녀 사이에만 눈먼 봉사랄까?
뭔가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아니, 생각해보니 눈치가 없는 봉사인 게 다행이었다.
마음을 들켜버렸으면 더욱 힘들었을 테니까.
손에 쥔 환병을 보자 당영영의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청이의 짝이 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뭔가 동생의 것을 빼앗거나 탐내는 느낌에 마음이 너무나 불편한 것.
당영영은 천천히 손에 쥔 환병 조각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러자 입안에서 튀긴 환병의 밀가루 조각이 풀려가며 은은한 단맛을 당영영의 혀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혀에 느껴지는 달콤한 맛을 느끼며 가가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을 천천히 떠올리려 했는데···
‘그런데 달콤했던 순간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조금 의문이 들긴 했다.
***
“괜찮느냐?”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유?”
동경 외곽의 한적한 숲길.
걱정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 어린 남자의 물음에 말벌 침처럼 쏘아지는 대답.
걸륜의 걱정 어린 물음에 초팔랑이 입을 삐쭉거리며 쏘아붙인 것.
이렇게 쏘아붙인 것은 개에게 물린 자국이 선명한 초팔랑의 팔과 다리 때문이었다.
둘은 제갈가를 나서며 아쉬운 마음에, 혹시 몰라 개밥으로 줬다는 닭고기가 남아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제갈가에서 키우는 개들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제갈가는 제갈가인 모양인지, 개새끼들도 잘 처먹어 배가 불러 닭고기가 그대로 개밥그릇 위에 남겨져 있었던 것.
개밥그릇에 그대로 올려진 잘 삶아진 닭 한 마리를 확인한 순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고, 서로의 눈빛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렇게 둘은 닭고기를 확인하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은밀하게 전음을 주고받은 둘은 걸륜이 시비의 시선을 돌리고, 초팔랑이 개밥그릇 제일 위에 올려져 있는 삶은 닭을 가지고 오기로 결정 했는데, 닭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제갈가에서 키우는 콩알만 한 개새끼가 어찌나 사납던지, 닭고기에 손을 대자 갑자기 달려들어 초팔랑이 몇 번이나 물려버리고 만 것.
그런 초팔랑을 돕다가 걸륜도 몇 번 물리긴 했는데, 물린 곳이 바지춤인지라 초팔랑처럼 이빨 자국은 남지 않은 상태였다.
초팔랑이 분한 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분명 제갈가는 개새끼에게도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오.”
“개에 물려서 그런가? 미친놈아 그게 무슨 개소리냐?”
“아니. 타구봉을 피하는 게 말이 되오? 개를 잡으려고 만든 무공으로 작대기를 휘둘렀는데, 어찌 그리 잘 피하는지···”
“개를 팬다고 다 타구봉인 줄 아느냐? 그래도 뭐 닭고기는 건지지 않았느냐?”
“죽으면 닭고기가 무슨 소용이요! 미친개에 물리면 뒈진다는데, 나 죽는 거 아니오?”
개에게 물린 자리를 문지르며 초팔랑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들려오는 것은 걸륜의 신이 난 목소리.
“닭고기를 먹으면 다 나을 테니 걱정 말거라.”
“먹긴 뭘 먹는단 말입니까? 아까 갱을 하도 처마셨더니 한 조각도 입에 못 넣겠는데···”
초팔랑이 더욱 분한 것은 욕심이 나서 닭고기를 훔치긴 했지만, 둘의 배는 괜찮다는데도 류청운이 자꾸만 갱을 퍼주는 통에 가득 차버려, 피를 흘리며 구한 닭고기를 한 점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이 배를 부여잡고 출렁거리며 총단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닭고기 냄새가 나는구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야 하는 존재.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에 초팔랑이 인상을 쓰며 사방을 살피고, 걸륜도 인상을 쓰며 조심스레 목소리의 주인을 불렀다.
“바, 방주님?”
그러나 들려온 것은, 대답이 아닌 찰진 타구봉의 타격 소리.
-빡! 빠악!
“어이쿠 나 죽네!”
“크아악! 아니, 왜 또 다짜고짜 타구 봉을 휘두르는 거요!”
초팔랑이 머리를 움켜쥐고 산길을 뒹굴고, 걸륜도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이놈들아, 네놈들끼리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모르는지 아느냐?!”
“아니, 어딜 다녀왔다고 그러시오. 대체!”
-빠악
“아이고, 머리야! 말로 하시오. 말로!”
-빠아악
“끄허업!”
“내 너희 놈들이 제갈가에 구걸을 갔다는 사실을 들었는데 어디서 발뺌이란 말이냐!”
걸왕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늙은이가 화난 이유는 아마도 고리타분한 계율 때문인 듯했다.
구파와 칠대세가에는 구걸하지 않는다는 계율.
여러 가지 개방의 계율 중 하나인데, 몸을 씻어서는 안 되고, 구걸하거나 주인이 버린 음식이 아니고서는 먹어도 안 되는 것 같은 고리타분한 계율.
‘요즘 그딴 걸 누가 지킨다고.’
늙은이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니 걸륜이 머리통을 가리며 방주인 걸왕을 향해 변명했다.
“아, 아닙니다! 방주. 구걸을 간 것이 아니라.”
-빠악
-빡
“아이고!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까!”
“아니, 저는 대체 왜 자꾸 때리십니까?!”
걸륜은 변명하느라 맞는다지만, 자신은 왜 맞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초팔랑이 외치자 걸왕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놔야 할 것 아니냐!”
“예?! 무엇을?”
-빠악
“끄아아아악!”
초팔랑이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머리통에 바로 강한 일격이 날아왔고, 초팔랑이 머리에 구멍이 뚫린 것같은 충격에 다시금 산길을 뒹굴자 귓가에 걸륜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닭고기를 어서 넘겨주거라! 그러다 머리에 구멍 나겠다 멍청한 놈아!]
초팔랑이 화급히 품에서 닭고기를 꺼내 내밀자 그제야 멈춘 타구봉.
-츄르릅
부드럽게 익은 닭 다리를 입으로 훑어 우물거리며 걸왕이 얄미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이리 닭고기도 구걸해와 놓고, 거지새끼가 구걸이 아니면 제갈각의 집에는 무엇 하러 간 것이냐? 거짓말이면 너희 두 놈 다 개처럼 맞을 테니 그리 알거라!”
개방은 구파와 칠대세가와는 친구 같은 관계, 은인과 친구의 집에서는 구걸하지 않는다는 개방의 계율을 어겼으니 각오하라는 으름장이었다.
그렇게 걸왕이 어느새 훑어 올린 닭 다리의 뼈를 걸륜의 머리통을 향해 던지며 눈을 부라리자, 걸륜은 걸왕을 향해 자조 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확인차 방문한 것입니다.”
“확인? 무슨 확인?”
“제갈가의 접각부가 제갈각의 집에 묵고 있다기에 확인차 간 것입니다. 그놈이 식룡(食龍)이라는 별호를 받았다기에···”
“아하 식룡이 동경에 와있었구나? 독쟁이 놈의 생일에 서시유를 냈다지 아마?”
-츄릅
걸왕이 입맛을 다시며 묻자 걸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예, 그 뭐 요리사 출신이라는데, 고수 수십의 입천장에 상처를 입혔다기에 제가 직접 확인하러 간 것입니다. 무공과 요리실력을 직접 확인하려고 말이죠. 뭐 요리는 무척 잘하는 것 같았습니다. 칼솜씨도 대단했고, 검의 고수이며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아하··· 그러니까 구걸은 아니고 식룡이라는 요리사의 실력을 확인하러 간 것이다?”
“예, 맞습니다.”
-빠악
“끄아아악!”
예고 없이 휘둘러지는 타구봉에 머리통이 터져 나가려 할 때 걸왕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런 자리에 너희 둘만 갔다고?”
“끄흡··· 예?”
“그렇다면 계율과 상관없이 칠대세가에서 밥을 빌어먹을 수 있는 기회인데, 결국 너희끼리 갔다는 말 아니냐? 더군다나 식룡이라는 별호를 가진 놈이 만든 음식을 말이야··· 아무튼 요즘 것들은 예의가···”
처음보다 더 화가나 보이는 걸왕의 모습에 걸륜이 급하게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확인차···”
“그리고 내 참 웃기는 소리도 다 있구나. 거지새끼들이 무슨 요리 맛을 확인한다고. 또한 무공을 익힌 것을 확인하려 했으면, 맥은 짚어봤느냐? 아니면 초식이라도 살펴봤느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걸륜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확인보다 요리를 먹고 싶은 마음이 커 움직인 것이었고, 무공도 대충 살피고 온 것이 맞으니까.
“내 딱 보니 옆에서 요리하는 것만 구경하다, 요리만 처먹고 온 것이 확실하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턱을 잡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걸왕이 타구봉을 손바닥에 내려치며 말했다.
-짝
“크흠··· 너희들이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다면, 내 직접 가봐야겠지?”
“아니, 확인을 못한 것이 아니라···”
-빡
“끄허업! 대체 어, 어디를 가신다고?”
“어디긴 어디겠느냐. 네놈들이 확인 못했으니 식룡의 실력을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걸왕이 사심 가득한 목소리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걸륜이 급하게 대답했다.
“한집에 연속해서 이틀이나 구걸하는 것은 개방의 계율이···”
“아하! 오늘 너희 놈들이 한 것이 구걸이란 말이로구나?”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빠아악
-퍼억
“끄아아아아악! 아이고 거지 죽네”
“끄헙!”
개 잡는 소리 같은 두 거지의 비명이 숲길을 따라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개처럼 두드려맞는 둘의 마음에는 억울함만이 솟아올랐다.
풀때기와 물만 퍼먹고 온 것으로 이리 두들겨 맞기에는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주가 항상 계율 타령을 하긴 하지만, 정작 본인은 별로 지킬 생각이 없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