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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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타는 눈빛에서 결연한 의지를 엿본 장인이 몇 가지나 있다는, 아내를 치료할 방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청이가 열아홉이 되면 아내가 찾아오라 했으니, 같이 북해빙궁으로 가서 청이가 가진 기운에 대한 조언을 듣는 것이네.”
장모가 북해빙궁으로 끌려가면서 아내가 열아홉이 되면 빙궁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러니 아내가 열아홉이 되면 찾아가서, 태어나자마자 아내에게 넣어준 빙궁의 기운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알아 오면, 제갈가의 기운에 대해서는 장인이 소상하게 알고 있으니, 두 기운을 다스릴 방법을 연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열아홉이라면 아직 한해나 남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청이가 가을에 태어났으니 한해는 기다려야겠지.”
아내는 현재 열여덟 한국 나이로 치면 열아홉.
지금은 완연한 봄과 초여름의 중간, 아내의 생일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일 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
“당장 찾아가면 안 됩니까?”
마음이 급해 당장 찾아가면 안 되냐 물었지만, 장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내가 그쯤 되어야 빙궁주가 되어 청이를 볼 수 있을 거라 했으니, 그전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네, 전대 궁주, 그러니까 내 장모는 중원 인들을 싫어해서 말이야.”
턱을 잡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곧 이 계획의 단점이 드러났다.
장인은 이것을 방법의 하나라고 했지만 이건 방법의 하나라 볼 수 없는 것.
왜냐하면 두 무공에 관한 내용을 알아내고서도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니 R&D의 성공 여부는 또 차후의 문제.
아무튼 제갈가의 가주라도 무식한 무림인이자 마피아 보스라 그런지 R&D를 우습게 보는 장인이었다.
연구개발이라는 게 시간과 인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것인데, 인력 갈아 넣는 것은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잘하실 것 같긴 하지만, 시간은 별개의 문제 오 년, 십 년 이십 년이 걸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이건 차후로 미루기로 했다.
“이 방법은 한해나 기다려야 하기도 하고, 다스릴 방법을 바로 발견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요. 일단 다른 방법이 성공하지 못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 두고 말입니다.”
내 의견이 타당한지 장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 의견도 일리가 있군.”
“그럼 다음 방법은 무엇이 있습니까?”
“또 다른 방법은 약왕을 찾아뵙는 것이네.”
“약왕을요? 약왕께서는 몸 아픈 것을 치료하는 분이 아닙니까? 아내의 몸은 내공으로 생긴 문제. 괜찮을까요?”
동경에서 되돌아오며 팔왕에 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은 터라 약왕이 대충 어떤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알려준 내용에서는 중원의 최고 명의 느낌?
그렇기에 그가 무공에 관한 것까지 살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되물은 것인데, 장인이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약왕께서는 주화입마도 치료하신 경험이 있다니 기대를 걸어볼 만하네.”
“오오, 그렇다면야. 그렇다면 제가 내일 당장이라도 아내를 데리고 약왕을 뵈러···”
잽싸게 약왕을 만나 뵈러 다녀온다고 이야기하려 했으나 장인이 희망을 꺼트리는 말을 해왔다.
“다만 문제가 있네, 약왕께서는 천하를 떠돌아다니시는지라···”
자꾸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인.
‘이 양반이 진짜?!’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까?”
“지금 당장은 그렇네. 약초를 찾아 천하를 유랑하시는 분인지라. 아마도 수소문을 해봐야겠지···”
“그, 그럼 다른 방법은 또 무엇이 있는지? 아니, 저, 전부 이야기해주십쇼.”
그렇게 장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리된 방법은 네 가지 정도.
첫째, 내가 무공을 익혀 아내에게 으스러지지 않는 몸이 된다.
둘째, 장모님께 조언을 구한다.
셋째, 약왕을 찾아뵙는다.
넷째. 기운과 조화에 빠삭한 태극도사들인 무당파에 한 번 조언을 구해본다.
이것이 얻어진 결론.
‘방법이 있다며! 이 인간아!’
정말 슬펐다.
장인이 몇 가지나 방법이 있다기에 무척 기대했으나 다 신통치 않은 방법.
차라리 내일부터 사당을 차리고 만자나 십자 두 분께 동시에 기도를 드리는 게 나을 정도.
첫 번째로 내가 무공을 익혀서 할아버님이 평생을 쌓은 내공을 버틸 정도가 되려면, 최소 이십 년은 수련을 쌓아야 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가 된다는데, 이건 방법도 뭣도 아니었다.
내가 시무룩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기가 죽기 전에 격체전공으로 자기 내공을 나에게 넣어준다고 하긴 했는데, 아직 팔팔한 장인이 언제 약속을 지키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
더군다나 무림은 험한 곳이니 장인이 혹시나 다른 조직과의 항쟁이나 히트맨에게 당해버리면 한 줄기 희망조차 사라져 버리는 것.
이건 정말 최후의 보루 느낌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두 번째 장모님은 뵙는 것은, 일단 시작에만 일 년은 걸리는 일.
그리고 역시나 R&D의 성공 여부는 별개의 문제.
세 번째 약왕을 찾아뵙는 것은, 일단 장인께서 수소문해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언제 찾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다행히 거지들에게 받은 개방 이용권을 이용할 수 있으니, 생각보다 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달까?
그나마 마지막인 네 번째 방법인 무당파를 찾는 것은 같은 호북에 위치하고 있기에 가장 먼저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만 같은 호북에 위치하고 있지만 다른 파에 무공의 최대 기밀인 내공에 관한 것을 알리게 될 수도 있는 터라 좀 꺼려진다는 장인의 설명.
결국 뭐하나 딱 부러지지 않은 의견들.
실망의 바다에 익사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망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도 실망스럽지만 아내는 어떤 기분일지 챙기지 않을 수 없는 것.
장인에게 아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나저나 제 부인은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또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릴 수 없어 아직 말을 못 했네···.”
대답하는 장인의 우울한 얼굴.
생각해보니 그랬다.
아내는 땅콩 알레르기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몸이 아프다면 얼마나 상심할까?
나도 장인의 의견에 동조하며 주의를 부탁했다.
“장인어른 일단 부인에게는 최대한 비밀로 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뭐 그런 수련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장인이 아주 감동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
“일단은 제 사람이니, 저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갱년기인 장인이 여성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하겠던지,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리며 대답했다.
“알겠네. 이 사람.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게! 내 청이에게는 아직 자네가 치를 몸값이 남아있고, 그것을 치를 때까지는 반드시 약조를 지켜야 한다고 누차 이야기해두지.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 내 순진한 아내는 그 정도 선의의 거짓말이면, 아마도 몸값이 전부 치러지기 전까지는 기다리겠지?’
장인의 의견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명심하게, 둘이 서로 참지 못한 순간. 자네의 목숨과 함께 제갈가도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아, 그리고 둘이 참을 수 없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혹시 모르니, 내 방편을 마련해 보지.”
장인이 말한 방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개를 끄덕이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처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장인의 처소가 있는 전각을 벗어나자, 맞닥뜨린 것은 아내.
전각의 모서리를 돌자마자 아내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 노공? 아버지와 함께 계셨었나 보군요?”
제갈청의 얼굴을 보자 시무룩해지는 표정.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 부, 부인. 내 잠시 장인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런데 어찌 그리 표정이 어두우신가요?”
“아, 아니요. 내 긴 여행에 되돌아와 잠시 피곤해 그런가 보오. 그럼 장인어른과 이야기를 나누시오. 내 피곤해서 먼저 가보겠소.”
“예, 노공. 그런데 식사는?”
“피곤해서 그런지 별로 생각이 없소이다. 그럼 먼저 가서 좀 쉬겠소.”
“예, 노공···”
내 얼굴이 좀 어두웠든지 제갈청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긴 했지만, 나도 조금 슬퍼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으니 말이다.
***
다음 날 이른 밤.
누워서 대체 뭘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의 최측근 중 하나인 시비가 문을 두드리며 찾아왔다.
“접각부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이지?’
저녁 식사도 끝나고 잘 준비를 하는 시간에 갑자기 찾아왔다는 사실에 궁금함을 느끼며, 시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권했다.
“그래, 들어오너라.”
등롱의 불빛 너머에서도 알 수 있는 뭔가 잔뜩 상기된 얼굴의 시비.
시비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더니, 나에게 작은 쪽지 같은 것을 하나 내밀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접각부님. 이걸 아가씨께서 전해드리라고.”
“서찰을?”
“예. 접각부님께서만 몰래 보시라 말씀하셨습니다.”
‘뭐지? 연서인가?’
뭐 전생이라면 연서라는 것은 결혼 전에나 서로 보내는 것이고, 결혼 후에 가족끼리 이러는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시대에는 부부간에도 연서를 주고받곤 하는 로망이 있는 시대.
서찰을 받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아내의 연애편지라는 사실에 시비를 얼른 돌려보내고,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서찰을 펼쳐 들었다.
아주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쳐 들자 안에 드러난 내용.
‘자시(子時), 전삼보(前三步), 우일보(左一步), 좌사보(右四步). 후이보(後二步), 전이보(前二步), 우일보(右一步)···.’
뭔가 알 수 없는 단어로 꽉 채워진 종잇조각.
‘중원에 대전격투 게임이라도 있는 것인가?’
뭔가 격투게임의 콤보 같은 것이 잔뜩 적혀있는 종이.
종이를 펼쳐 들고 생각해보았다.
자시라면 밤 11시에서 1시를 가리켜는 말.
결국 한밤중을 뜻하는 단어.
‘앞으로 세 걸음 오른쪽으로 한걸음 왼쪽으로 네 걸음? 뭐지 이거?’
영문 모를 내용에 조금 고민이 들었다.
***
“하아···.”
한숨을 내쉰 당영영은 언젠가 한 번 보았던 시경(詩經)에 있다는 시 한 편을 떠올려 읊어보았다.
피채갈혜(彼采葛兮) 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월혜(如三月兮).
칡을 캐어 하루를 안 본 것이 석 달 같고,
피채소혜(彼采蕭兮) 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추혜(如三秋兮).
쑥을 캐어 하루를 안 본 것이 아홉 달 같구나.
피채애혜(彼采艾兮) 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세혜(如三歲兮).
약쑥을 캐어 하루를 안 본 것이, 꼭 세 해 같다.
일일삼추(一日三秋)라더니···
하루가 삼 년 같다는 말이 어떤 마음인지를 깨닫고 있는 당영영이 조심스레 바꽃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날 밤.
당문의 밤은 한 전각 주변에 켜진 수많은 등롱으로 대낮같이 밝은 상태.
그 전각 앞에서 독왕이 가주와 장로들을 향해 소리쳤다.
“의원은 아직인가!?”
“예, 아버님 아무래도 밤인지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체 아이가 저리될 때까지 무엇한 것이야!”
독왕이 길길이 날뛰고, 당문이 오밤중에 이리 난리가 난 것은, 당문의 금지옥엽(金枝玉葉) 당영영이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후, 후원에서 혼절한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자꾸 입맛이 없다고는 하셨는데, 저리 갑자기 혼절하실 줄은···.”
독왕의 서슬 퍼런 질문에 시비들이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가씨의 몸을 돌보는 것은 시비들이 할 일이기에, 아가씨가 쓰러질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치명적 실수이고, 이대로 아가씨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비들의 목숨도 담보(擔保)할 수 없었기에 독왕의 말에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독전(毒殿)의 화은이에게 나오라 일러라!”
당문에서 용봉지회(龍鳳支會)에 참가하기만 하면 봉(鳳) 정도는 쉽게 따내리라 생각하는 당영영이 범인도 아닌데 쓰러졌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
독왕은 당영영이 며칠 무공 수련도 빠지기에 평소처럼 또 수련을 게을리하나 싶어 그냥 둔 것이 화근이었다고 자책하며, 대낮같이 밝혀진 당영영의 처소 앞에서 독기 오른 뱀처럼 식구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졸린 얼굴을 한 의원과 독전의 당화은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