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융만적(夷戎蠻狄)
.
다음 날 아침은 조금 한적한 상태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객석이 조금 한산했기 때문.
객석에 있는 사람이라곤 아내인 제갈청과 의매인 당영영 그리고 시비 둘.
무슨 일 때문인지 당문의 어른들이 오늘 관람에 모두 참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사람이 많아 가련이가 긴장해 몸이 굳어 고통을 호소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가련이의 아침 수련이 끝나고 어제 왜 몸이 그렇게 굳었는지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가 좀 가혹한 상황에서 수련시키긴 한 것 같았다.
평범한 애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는 것조차 무척이나 떨리는 상황일 것인데, 그런 애를 전문 킬러들 앞에서 태권도를 가르친 상황이랄까?
정권 지르기 가르치며 사람을 어찌 제압하는지를 가르쳤는데, 킬러들이 뒤에서 보면서 제압이 아니라 살해를 주제로 토론한 느낌?
정신이 어질하고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약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신체적인 부득이함 때문에 기초 자세는 어제 교육한 것만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오늘은 가련이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기로 했다.
첫 제자의 수련계획이 꼬이는 것이 좀 슬펐지만,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련이야 어릴 때 부모님의 요리집을 도운 경험도 있고, 동생들 밥을 해 먹이느라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해본 경험도 있어 약간의 기초는 있다고 봐야 했기에, 경력 있는 제자로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칼 쓰는 법을 가르치기로 한 것.
‘가련이는 자기가 무슨 혜택을 받는지 알까? 와 정말 라떼는···’
만약에 전생이었다면 내가 가련이에게 하루 만에 칼 쓰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주방에 폭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
나처럼 요리학교 출신이라도 호텔 같은 큰 주방에서 일하게 되면, 몇 주 정도는 재료 손질이나 잡일을 하게 되는데, 주방 분위기와 같이 일할 사람들에 익숙해지기 위함이기도 하고 주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경험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
그런데 가련이는 스승님 잘 만나서 초고속 승진했으니 폭동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리학교 출신도 아니고 호텔 주방이나 요리집 주방 같은 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한다?
정상적인 코스일 때 설거지만 한 반년 하다 보면, 갑자기 뜬금없이 주방장이 ‘야, 너 내일부터 재료 손질해. 너 근데 이름이 뭐라고?’라면서 재료 손질을 맡긴다.
재료 손질이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감자 깎고 양파 까고 그런 것이다.
그전에는 이름도 없는 존재, 주방에 널려있는 조리도구와 같은 존재.
아니, 조리도구도 이름이 있지만, 설거지 보조는 이름 없는 야, 너, 인마 가 호칭.
하지만 재료를 손질하는 순간부터 주방에서 이름과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재료 손질이 맡겨졌다고 방심해선 곤란하다.
이유는 그 누구도 재료 손질의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양파를 가져와서 ‘야, 이거 전부 손질해놔’ 딱 한 마디를 하는데, 여기서 다시 설거지로 쫓겨날지 재료 손질을 계속할지가 결정된다.
껍질을 까서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뺀 후 어느 용기에 담아 어디에 두는지, 누구에게 가져다주는지는 6개월 동안 설거지하면서 눈치챘어야 하는 부분.
어리바리 타는 순간 한소리가 날아든다.
“야, 그냥 얘 설거지 다시 시켜.”
그러면 그냥 다시 몇 달 설거지.
노빠꾸로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것도 드문 일이기에, 이걸 건너뛰고 갑자기 들어온 신입이 손질해온 재료를 자르는 걸 맡는다는 것은, 두 단계를 건너뛴 초고급 승진.
그런 결정을 내리는 순간 주방 보조들의 피에 사무친 원한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
주방보조들이 분노에 차 죽창을 들고 폭동을 일으킬만한 대사건이다.
뭐 물론 주방장의 사자후(獅子吼) 한 번에 모두 제압되겠지만.
‘정말 나 만나서 가련이 호강하는구나.’
달콤한 커피가 생각나는 라떼는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이유가 어찌 되었든 뭐 수련을 시키기로 했으니, 일단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련이를 식탁 앞에 세우고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칼을 쥐는 법부터 가르쳐 줄게. 사용법에 따라서 파지법이 나뉘는데, 보통은 자루는 가볍게 움켜쥐고 구부린 검지로 손잡이 시작 부분을 받쳐주면 되거든? 자, 내 손을 잘 봐.”
“예, 스승님!”
기본적 파지법을 설명하며 손 모양을 보여주고 가련이에게 칼을 쥐는 법을 가르쳤다.
“일단 오늘은 그렇게 칼을 쥐고 칼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하도록 하자. 알겠지?”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당영영을 불렀다.
“당매매, 내가 부탁한 건 가지고 왔어?”
“네, 류가가 어제 부탁하신 종이는 이만큼이면 될까요?”
내 부름에 당영영이 가지고 있던 이면지를 가지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제 찾아갔을 때 가련이의 훈련을 위해서 분노를 참으며 부탁했던 것인데, 잊지 않고 가져온 모양이었다.
받아든 종이를 한번 펼쳐보았다, 혹시라도 뭔가 중요한 것이 섞여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는 보통 이면지를 사용할 때 그렇게 했으니까.
종이를 펼쳐 들자 어린 동생들이 낙서라도 한 것인지 뭔가 기기묘묘한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종이.
여러 가지 동물과 나비 같은 것들이 그려진 종이였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칭찬을 좀 해주었다.
“영영아 동생들이 그림을 그렸던 종이인 모양이구나? 그런데 이 거북이는 아주 잘 그렸구나. 동생이 그림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스승님. 거북이가 아주 귀엽습니다.”
가련이도 본격적인 사회생활에 적응하려는지 나를 거드는 모양새, 가련이의 노력이 기특했다.
그러나 우리의 칭찬에 당영영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할 뿐.
“그거 제가 그, 그린 것인데···”
아뿔싸 초등학생이 휘갈긴 낙서처럼 생겨서 동생들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영영이 저도 귀한 집 자식이라고 주제에 난이라도 친 모양이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창자 또는 로드킬 당한 뱀 새끼처럼 구불거리는 것이 아마 난이었던 모양.
저번에 만두를 빚을 때도 그랬지만, 영영이는 정말 손재주가 없었다.
여기도 딴에 있는 집 자식이라고 영영이가 공부는 못하니 예체능을 밀어주려 했던 모양인데, 영영이는 내가 보기에는 전혀 가망 없었다.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다시금 칭찬했다.
“아, 영영이, 네가 그린 것이구나 이 거북이는 그래도 무척이나 잘 그렸구나! 등껍질이 훌륭하게 표현된 것이 아주 묘사가···”
“그, 그래요. 다, 당가의 아가씨께서 그린 것이라 그런지 거북이가 아주 튼튼해 보이고···”
가련이의 가상한 사회생활 노력.
사회 초년생인데 저 정도 노력이라면 가상할 정도.
그러나 들려오는 당영영의 실망한 목소리.
“거북이 아닌데··· 사람 얼굴인데···”
“응?”
어떤 새끼 면상이 이따위로 생긴 것인지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새끼가 황천에서 기어 올라온 거북이 등껍질맹키로 생긴 것인지···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 답답한 내 궁금함을 해결해주려는지 당영영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류가가인데···”
‘아니, 내가 이렇게 보인다고?!’
아내와 영영이의 우정의 상징인 거북이를 잡아 요리를 만들었다고 거북이 귀신이 달라붙은 것도 아니고, 내가 황천에서 기어 올라온 거북이 등껍질 마냥 생겼다니.
화는 났지만 당영영을 붙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영아, 아직 네 몸이 다 나은 것 같지 않구나. 내 조금 걱정이 돼서 그런 것이니 오늘 저녁에 부적 한 장 쓰자꾸나.”
“부적이요?”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고 거북이인데, 애가 크게 앓았다고 영혼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엑소시즘에는 역시 십자 형님이시지?’
내 말에 영영이가 당황하고, 가련이가 거북이 그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영영이를 자리에 다시 앉히고 곧바로 실습을 시작했다.
채도 연습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수직으로 종이 자르기.
종이를 돌돌 말아 납작하게 누른 후 도마 위에 올려 칼로 자르는 것이다.
채도(菜刀)는 상당히 무게가 있고 무거운 칼이다.
서양식 부엌칼이나 나이프에 비해서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 그렇기에 손에 익지 않으면 사용하기 힘든 편인데, 이렇게 종이를 자르는 것은 채도의 무게와 모양을 손에 익게 하는 과정인 것이다.
“먼저 어제 가르쳐준 대로 도마 앞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 거리를 두고 서거라. 자세는 어제 알려준 대로. 그리고 재료는 도마 끝에서 주먹 하나만큼 떨어진 거리에 두고. 이렇게 말이다.”
천천히 종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자르며 가련이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왼손은 부드럽게 재료 위에 올리고, 손가락은 자를 위치에 부드럽게 세워서 채도의 위치를 잡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지.”
-탁 탁 탁 탁
“종이가 꼭 국수 가닥처럼 나오는군요.”
가련이의 감상과 함께 돌돌 말린 종이가 왼손의 위치대로 채도를 인도하고, 채도가 한 번씩 아래로 떨어졌다 올라갈 때마다 나타나는 종이로 된 흰 국수 가닥.
얇은 종이가 잘려 떨어져 나가 풀어지며 희고 검은 국수 가닥이 도마 위에 풀려 흩날렸다.
그 모습에 얇은 종이가 틀어지지 않고 긴 국수 가닥으로 뽑히는 것이 신기한지, 아내와 시비, 당영영이 가까이와 내 칼질을 확인하고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노공, 꼭 문사두부(文思豆腐) 때와 같은 모습입니다.”
“문사두부? 그게 뭔데 청아?”
“아, 두부로 실을 만드는 것인데 무척이나 아름다운 요리입니다. 언니”
“두부로 실을 만들어?”
신기한 걸 들었던지 호기심 많은 고양이 마냥 나를 바라보는 당영영.
만들어달라 할 것같은 눈치에 동작을 천천히 하면서 가련이를 향해 재빠르게 설명했다.
“손목의 모양과 칼이 움직이는 것을 잘 보거라. 손이 칼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니 무리해서 자르려 하지 말고 천천히 부드럽게.”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칼을 넘기며 직접 해볼 것을 지시했다.
“자, 이제 직접 해보거라.”
내가 건넨 칼을 조심스레 받은 가련이가 아까 배운 대로 조심스레 칼을 쥐고, 손을 풀 듯 칼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직접 해보려 자세를 잡으려는 그 순간.
역시나 당영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가가, 저도 문사두부 먹어보고 싶어요.”
‘이런 식충이 같은 놈.’
당영영 성격에 안 해준다면 또 따라다니며 계속 이야기할 것 같았기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대충 대답해주었다.
“그래, 그래. 이따 저녁에 만들어 줄 테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가련이의 칼질을 살펴보려는데 들려오는 당황스러운 목소리.
“어··· 스승님?”
“왜 그러느냐?”
가련이의 부름에 뒤를 돌아 대답하자 난처한 목소리로 가련이가 되물었다.
“그, 식탁과 거리는 주먹 하나만큼. 종이와도 주, 주먹 하나만큼이지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주먹 두 개만큼이 되겠지?”
“어···”
얼빠진 목소리의 가련이.
“왜 그러는 것이냐?”
왜 얼빠진 소리를 내었는지 되묻자 가련이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게··· 보, 보이지 않습니다.”
“뭐가?”
“조, 종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대체 종이가 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야?”
자세가 문제가 있나 싶어 직접 자세를 잡아주기 위해 가련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뒤에 선 채, 팔을 둘러 칼과 자세를 잡아준 후 그녀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확인하려 했는데···
안보였다···
‘아니, 이게 대체?’
당황스러워 뒤로 물러나자 영영이와 아내가 가련이의 뒤로 다가와 양쪽 어깨 뒤에서 까치발을 들고 어깨 너머로 가련이의 시야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서로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 보이네···”
“안 보이는군요···”
가련이는 자기 발아래 상당한 범위가 보이지 않는 몸이었던 것이었다.
‘아니, 뭘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네···’
내 첫째 제자는 어째선지 요리사를 거부하는 신체인 것 같았다.
***
자세나 칼질은 그냥 가련이가 편할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신체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 보니 가련이에게 적용할 수 없었던 것.
칼질은 꽤 몸을 굽히거나 자세 또한 가련이가 편할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는 해서 다행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열흘쯤 영영이 보양식을 챙겨주고, 가련이 수련을 봐주는 날들을 보내자 의조부님게서 나와 아내를 부르셨다.
의조부님의 처소로 들어서자 의조부께서 우리에게 차를 권하셨고, 우리가 기대하던 소식을 들려주셨다.
“내, 약쟁이 그놈이 어디 있는지를 대략 찾았는데···”
의조부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의조부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해요!”
그런데 우리의 감사를 받은 의조부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한 목소리.
“그런데 그놈이 이융만적(夷戎蠻狄)의 땅에 있다는 구나.”
“이융만적이요?”
‘도적인가?’
뭔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