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룡하(麻辣龍蝦 마라롱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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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곡 한편에 핀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가운데 두 가지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 가지 물소리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와 영영이가 즙 짜는 소리.
두 가지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흑흑··· 청아 너무 부끄러워··· 죽어버리고 싶어···”
“언니, 괘, 괜찮아요. 언니는 잠시 아, 아팠던 것뿐이니까··· 그리고 노공은 언니의 오라버니니까 괜찮아요. 가, 가족이잖아요?”
“더, 슬퍼··· 끄아아아···”
즙 짜는 영영이를 달래는 아내의 다정한 목소리.
하지만 나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뭘 잘했다고 즙을 짜대는 것인지!‘
영영이가 토하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빼앗은 알파미 포장지와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백색의 쌀알을 본 순간 바로 감이 왔었다.
식탐을 참지 못하고 알파미 사 인분을 야금야금 위 속에 구겨 넣고, 쉴 때 계곡물을 잔뜩 들이켰으니 당연한 결과.
알파미를 위안에서 조리했으니, 위 속에서 불어난 사 인분의 알파미를 고스란히 토해낼 수밖에···
아무리 이 시대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지만, 위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팡팡
’이래서 전생에 빨래터에서 아낙들이 남편 옷을 두들겨 팼구나?!‘
새로운 깨달음 속에 속으로 짜증을 내며 계곡의 넓은 돌 위에 영영이의 옷을 물에 적셔 팡팡 내리쳤다.
당영영이 저렇게 부끄럽다고 죽고 싶다 하는 것은 토사물로 범벅이 된 옷을 빨고 있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었다.
곱게 자란 아내와 당영영은 빨래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고.
아내가 한다고 해도 저 고운 손에다 빨래라니.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에 결국 내가 토사물로 얼룩진 영영이의 옷을 빨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대주가 자기가 빤다고 나섰지만, 영영이가 맹렬히 거부했고 결국 남은 것은 나 혼자뿐.
-팍팍
영영이의 겉옷을 대충 헹궈 냄새를 없애고, 꽉 짜서 모닥불 근처에 나뭇가지에 건 후 남은 옷을 손에 들었다.
한 줌 밖에 안되는 비단 천 조각.
말흉(抹胸)···
송 시대 아가씨들의 속내의 겸 브래지어.
아내의 속옷이라면 뭔가 뜨거운 감동이 있었겠지만, 고작 당영영의 속옷이라니.
그것도 토사물로 얼룩진···
’전생하니 진짜 별 지랄을 다 해보는구나!‘
내 손에 들린 말흉을 본 순간 당영영의 입에서 다시금 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끄하앙··· 나, 이제 시집은 다 갔어···”
“어, 언니 고, 고작 말흉일 뿐인데요···”
시집은 다 갔다는 영영이의 말에 한 남자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피해자가 될지는 몰라다 당문은 진짜 영영이 데려가는 놈을 가문의 은인으로 삼아야 할 것이 분명했다.
’영영아 정말 누가 널 데려갈지 걱정이구나···‘
부끄러워 죽겠다는 영영이가 슬퍼하든 말든, 말흉까지 다 빨아 나무에 걸고 죄인 둘의 심문을 시작했다.
이번 사건의 범인 두 명, 당영영과 독혈대의 대주.
영영이가 내부 조력자 없이 혼자서 숨어들지는 못했을 터.
여긴 네 명뿐이니 범인은 명확했다.
“둘 다 대체 어쩌시려고 그런 겁니까?”
내 물음에 움찔거리는 대주와 영영이.
“몰래 나왔다고 칩시다. 돌아갈 때는 이미 당문에서 다 알고 있을 텐데, 둘 다 대체 돌아가실 때 생각은 안 하십니까? 대체 어쩌시려고?”
내 물음에 대주는 뭔가 죽음을 앞둔 무사 같은 초연한 표정이었지만, 영영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표정.
정말 영영이스러웠다.
“특히 당 매매! 보니까 당 매매가 대주의 약점을 잡고 데려와 달라했거나, 집안의 무사라고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은데. 당 매매는 당문의 금지옥엽이니 상관없지만, 대주는 나중에 어쩌라는 말이냐? 의조부님께 혼나는 정도로 안 끝날 것 같은데? 의부나 의조부께서 죽이지는 않겠지만 나중에 대주님은 무척이나 곤란해질 터인데···”
“크흡··· 고, 공자님···”
안타깝다는 투로 말하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주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자기 처지를 알아줘서 고맙다는 감동의 눈물.
갑질 개념이 없는 시대이니 얼마나 갑질을 당했을까?
원래 있는 집 자식들은 부모님 사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부모님의 부하직원을 약간 저희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간 얼마나 서러웠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간 봐온 대주를 보면 이런 부당한 일을 들어줄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아니, 혹시 정말 약점이라도 잡히신 겁니까? 대주님이 아무리 당매매 부탁이라도 이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지는 대주.
아내도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약점이요?”
“맞소. 부인. 약점. 대주가 영영이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줄 수밖에 없는 뭐 그런? 남자들의 약점이라면 아무래도 돈이라든지, 도박을 하시나? 아니면 여자 문제라든지···”
대주를 슬쩍 바라보면서 말을 꺼내자 여자라는 부분에서 부릅떠지는 눈.
’이거 거짓말 같은 건 못할 분이네?‘
대주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아내를 향해 말했다.
“뭐 여자 문제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오. 그런데 당문에서 대주가 관심 가질 만한 여자는 고모님 정도 되려나? 약점을 잡혔다면··· 뭐가 있으려나? 고모님이 세욕하는 걸 훔쳐보다 걸리기라도 하지 않고서는··· 하지만 대주께서 사춘기 소년 아니, 어린 소년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하실 리는 없으니···!”
우스갯소리같이 한마디 내뱉었는데 대주가 놀란 얼굴로 영영이를 바라봤고, 영영이는 자기는 아니라며 고개를 맹렬하게 도리도리 휘저었다.
“뭐야? 지, 진짜라고?!”
깜짝 놀라 소리치자 아내가 대주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당영의 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영영이 대신 이제 대주가 즙을 짜며 나를 향해 변명했다.
“고, 공자님 그것이 제가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니라···”
40대 무림 고수인 대주의 구슬픈 울음이 밤하늘로 흘러가고 있었다.
***
“그러니까 당문에 들어오시고 이십오 년이나 고모님을 마음에 품어오셨다는 거군요?”
“예, 크흑 공자님.”
“어허 그만 우시고.”
’25년의 사랑이라. 순정남이구만?‘
대주를 달랜 후 지금까지 대주가 들려준 이야기를 종합해보았다.
“영영이가 밤에 이야기 좀 나누자며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거기 우연히 고모님이 목욕을 하고 계셨고, 우연히 자신도 모르게 엿보다가 영영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뭐 그런 이야기군요. 그래서 영영이의 말을 할 수 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마, 맞습니다.”
대주의 이야기를 다 듣고 영영이를 바라봤다.
대주의 말에 대주를 흘겨보던 영영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는 절대 아니라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네? 영영이가 그런 계략을 짤 정도로 뭔가 철저한 아이가 아닌데?‘
한 시진 전에 사 인분의 알파미를 먹고 토해낸 녀석이 짰을 거 같지 않은 계략.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인가? 아니, 그래도 설마 영영이가?‘
하지만 뭐 그것이야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고, 문제는 영영이를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것.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은 영영이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결론.
일단 눈물로 범벅인 둘을 향해 말했다.
“대주님의 상황은 잘 알았습니다. 영영이도 뭐 인제 와서 돌려보낼 수도 없고··· 대주께서는 물가에서 세검(洗脸)이나 하고 오십쇼. 속 시끄러운데 저녁이나 먹읍시다. 영영이 너도 다 토해내서 배가 고플 텐데 저녁이나 먹게 세검이나 하고 오너라.”
내 말에 대주는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고, 영영이는 기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정말요? 계속 데리고 다녀 주시는 겁니까?”
“그럼 이 밀림 한가운데서 되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으냐. 대신 내 말 잘 듣고 절대 식량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느니라.”
“알겠어요! 가가. 이제 배가 고파도 절대 먹지 않을게요!”
대주가 하류 쪽으로 조금 이동하자, 아내가 영영이를 데리고 상류 쪽으로 조금 올라갔다.
그렇게 눈물로 얼룩진 둘을 물가로 보내고, 미리 피워두었던 모닥불 주변에 두른 돌 위로 알파미를 끓이기 위해서 계곡물을 뜬 웍을 올렸다.
그렇게 웍을 올리고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데 들려오는 뾰족한 비명.
“아야야야!”
“언니!”
세수하러 갔던 당영영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흘러 해가 져 어두워진 밀림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응큼한 대주에게서 당영영을 보호하기 위해 당영영을 따라갔던 아내의 입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뱀인가?!‘
한여름 물가에는 낮에는 체온을 식히거나 물을 마시러,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 낮 동안 달구어진 돌에 붙어 몸을 따듯하게 하려고 뱀들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이런 밀림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혹시 뱀에라도 물린 것은 아닌가, 깜짝 놀라 아내와 영영이가 세수하러 간 쪽으로 뛰어가자 영영이가 검지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모닥불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얼핏 얼핏 보이는 영영이의 손가락.
영영이의 손가락 끝에는 뭔가 붉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영영이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채 손가락 끝에 매달린 것을 떼어내 확인하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
“어? 룡하(龍蝦군요?”
중원식 이름 룡하, 용새우라는 뜻을 가진 생물 가재였다.
“아, 여기도 룡하가 살고 있나?”
가재를 보자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한가지.
오늘 한 끼는 잘하면 이걸로 때울 수 있겠다는 생각.
누군가가 한 끼 식량을 땅바닥에 다 버리는 통에 덕구만 쩝쩝거리며 포식했으니 가재로 한 끼를 때워야 했다.
아내와 당영영에게 물었다.
“부인, 무림인들은 안력(眼力)을 돋구어 밤에도 더 잘 볼 수 있는 게 맞소?”
“예, 노공. 어찌 그러시는지요?”
아내를 향해 손에 든 가재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이걸 좀 많이 잡았으면 좋겠는데, 이걸 많이 잡으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겠소.”
“정말입니까? 가가.”
아내에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는데 대답한 것은 음식에 진심인 영영이.
뭐 어찌 되었든 다 같이 먹을 것이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가, 제가 열심히 잡아보겠어요.”
하지만 밝은 당영영의 대답과는 다르게 아내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기, 안력은 그런데··· 그러니까···”
뭔가 꺼리는 표정과 목소리.
아내가 왜 그러나 싶었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산공독을 먹고 판다가 되었던 것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때 안력을 돋운 것처럼 눈 주변으로 내공이 몰렸다고 했었는데, 다시 판다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된 모양이었다.
부인인 제갈청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나는 그··· 화웅(化熊)도 귀여워서 나쁘지 않았소···”
그리고 잠시 후.
아내가 두 눈에 서치라이트를 킨 듯 안광을 뿜어내며 계곡에서 가재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손에는 레일건 눈에는 서치라이트, 분명 아내의 장르는 판타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SF였던 모양이었다.
’사이보그였나?‘
***
세검을 하고 온 대주까지 합류해 고수 셋이 가재를 잡아들이자 가재는 금방 엄청난 양이 되었다.
깊은 산속 계곡, 사람 손때가 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살도 아주 통통하게 오른 큼지막한 녀석들로 가득 차버린 웍.
끓이던 물까지 버리고 가제를 담기를 잘한 것 같았다.
“노공, 어떤 요리인가요?”
“가가, 무슨 요리인지 알려주세요.”
가재를 잡아 온 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꼬물거리는 가재를 바라보고 있는 당영영과 아내.
둘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할 요리는 마라룡하(麻辣龍蝦 마라롱샤)랍니다.”
사흘째 죽만 먹다가 내 입에서 마라라는 말이 들려오자 사천 사람인 영영이와 대주가 사천인들이 좋아하는 매운맛을 기대하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