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한교이탕(祛寒嬌耳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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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에 오기 전에 세웠던 계획대로 우리는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다 배를 타고 약왕의 본가가 있다는 복건(福建)성에 있는 복주(福州)로 이동하기로 했다.
육로로 이동하고 싶더라도 덕구가 남만야수궁의 무공을 익히게 된 관계로 절대로 육로로는 사천을 지날 수 없게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마 사천의 경계로 들어가는 순간 덕구의 날렵한 행동을 본 노잼 효율충 문파인 점창파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차례대로 덕구에게 비무(比武)를 신청할 것이 뻔했다.
그것도 목숨을 건 생사결(生死決)을 말이다.
덕구 또한 백운에게 빚이 있는바 결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니 피할 수 없는 싸움.
덕구가 이겨도 문제 져도 문제였다.
야수궁주 어르신의 말을 들어보니 야수잠력폭혈대법을 받은 짐승들은 우습기 한데, 야수궁의 속가제자(俗家弟子)나 마찬가지인 느낌.
덕구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야수궁에서 난리가 나 2차 새외혈사가 벌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점창파가 지면 개에게 발렸으니 체면 타령을 하며 이길 때까지 달려들 것은 뻔한 일.
괜한 은원 관계를 쌓을 필요는 없으니 초기 계획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뭐 뱃멀미가 걱정이긴 했지만 처음 계획을 따르는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누님과의 추억을 뒤로하고 누님이 붙여준 원숭이들이 안내하는 밀림을 며칠을 걸어 운남의 밀림에서 빠져나오니 장강의 물길을 만날 수 있었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운남과 사천의 경계쯤에서 배를 잡아탈 수 있었다.
그렇게 사천의 남동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장강 위를 우리가 탄 배가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러나 배가 호북의 경계와 가까워져 옴에 따라 배 안은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으로 기묘한 혼란 속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 대체 어쩌지? 청아 무슨 방법 없을까?”
당가에서 사고를 치고 나온 당영영이 자기가 하선(下船)해야 하는 위치가 다가옴에 따라 똥줄이 타고 있는 것.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가만 앉아있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좌불안석(坐不安席) 이었다.
물론 피해자인 독혈대주 또한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영영이가 하도 불안해하니 아내가 물었다.
“할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을까요?”
“아, 아마도? 이번에는 어쩌면 폐관 수련하라고 하실지도 몰라. 아니면 미루어왔던 독공수련을 시키실지도 모르지.”
“그, 의부님으로 담던 개소주 아니, 그 의부님이 하시던 그 수련 말이냐?”
동굴 안에 마련된 인간 전용 약탕기에 앉아 계시던 의부님을 떠올리고 물었더니, 당영영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울상이 되었다.
“예, 가가. 그것이 입문 때는 꼼짝하지 않고 보름이나 앉아있어야 하기에···.”
당가의 가주인 의부님으로 담던 개소주가 이젠 당영영의 차례인 모양.
발바리마냥 싸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당영영에게는 아마 최고의 형벌인 듯싶었다.
“뭐 어쩔 수 있겠느냐. 가서 사죄를 구하는 수밖에.”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당영영이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했다.
“하나밖에 없는 매매가 이리 고민하는데, 남 이야기하듯 하시고!”
그렇게 화를 버럭 낸 당영영이 아내와 함께 뭔가를 쑥덕거리는가 싶더니, 금방 화낸 것을 잊은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가가,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 이리 둘이 같이 가면 같이 크게 혼나지 않겠어요?”
“그렇지! 뒈지게 혼나 아니, 크게 혼나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한 명이 가서 먼저 크게 혼나면, 나중에 가는 사람은 조금 덜 혼나지 않을까요?”
“뭐라고?”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영영이의 말에 화들짝 놀란 대주가 두 눈을 부릅뜨며 영영이를 바라봤다.
“아, 아가씨 설마?!”
그의 눈빛은 다가올 운명을 부정하듯 암흑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 하지만 저는 아가씨를 지켜야 하기에, 본가로 복귀를 조금 미루신다면 저도 따라서···.”
눈치 빠른 대주는 영영이에게 무슨 말이 나올지를 예상하고 선수를 치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영영이가 약점을 꼭 쥐고 있는 한.
“아니요. 대주는 돌아가셔야 해요. 본가에 남아있는 제갈가의 무사들과 가가의 제자에게 제갈가로 되돌아가 있으라는 가가의 말씀을 전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고모님에게 대주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드리길 원하세요? 아니면 야밤에···”
“가, 갑니다! 제가 가야죠! 그럼요! 제가 독왕 어르신께 다 제가 한 것이라 고하겠습니다!”
‘영영이 독한 것 누가 당문 아니랄까 봐. 약점 하나 잡고 그냥 사람을 탈탈 털어먹는구나.’
불쌍한 대주의 신세에 그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둘 사이에 이야기가 결정된 듯했지만 하나 남은 것이 있었다.
“당매매 그런데 누가 동행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했던가?”
“네?!”
내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영영이 혼자 김칫국물 아니, 여기는 중원이니 중국집에 가면 김치 대신 주는 단무지 국물을 퍼먹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중원인들이 단무지를 먹진 않지만 말이다.
뭐 아무튼 그런 상태였던 것.
그런데 당황할 줄 알았던 영영이가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대주께서 돌아가시면 호위도 없고, 나중에 복주에서 청이와 어찌 돌아오려 하세요? 청이가 아무리 내공이 강해도 초식 같은 것은 하나도 모르고, 덕구가 무공을 배우긴 했지만 중원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아니, 개인데?”
‘씨바.’
생각해보니 그랬다.
약왕을 만나면 무조건 치료가 될 줄 알고 최소한의 인원만 움직인 상태.
현재는 중원 어깨 중 탑 8인 중 하나인 약왕이 든든한 보디가드를 서고 있지만, 대주가 빠진다면 되돌아올 때는 아내랑 나랑 덕구 셋이서만 되돌아와야 하는 것.
내가 솔로일 때는 혼자도 무공을 배우겠다며 무림을 누볐지만, 지금은 아내까지 있는 상태.
더군다나 이제 지역구 조폭 제갈가의 후계자와 혼례를 올렸으니, 나와 아내를 노리는 히트맨들이 돌아다닐 확률이 높았다.
무협의 단골 악당 마교나, 혈교 뭐 이런 무리 말이다.
뭐 영영이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지 못하지만, 일단 당문이니 위험한 상황에서 폭탄먼지벌레마냥 독을 사방에 뿌려대고 도망갈 수도 있고,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은 자명한 일.
영영이가 계속 따라붙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 했다.
“어쩔 수 없나···.”
내 대답에 영영이가 신이나 미소 지었다.
***
결국 호북의 경계에서 도살장 끌려가는 표정의 대주를 내려두고 우리가 탄 배는 여정을 서둘렀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장사(長沙).
장사에서 바로 강서성(江西省)의 경계를 넘어 목적지인 복주로 향하기로 한 것.
“언니, 동정호에요!”
“그래! 이제 곧 악양루를 볼 수 있겠구나!”
“저희 둘이 나중에 꼭 같이 보러 가기로 약속했었는데, 노공과 셋이 같이 오니 더욱 좋습니다!”
동정호가 가까워져 오자 아내와 영영이는 신이 나서 난리였다.
동정호에는 그 아름답다는 누각인 악양루(岳陽樓)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노숙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웠던 악양루는 당나라에서 한번 송나라에서 한번 수리가 된 터라 지금이라면 멋진 외관을 뽐낼 때.
악양루는 이 시대에 랩, 그러니까 시를 좀 친다는 문인들은 한 번씩 들러 시를 짓는다는 핫 플레이스이자 클럽 같은 곳, 아직은 소녀 감성 충만한 아내와 영영이가 환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레퍼들이 버스킹하는 장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과는 다르게 나는 동정호가 가까워지면서 살짝 걸쩍지근한 마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전생의 기억을 되살린 곳이 이 동정호였기 때문이다.
한밤중 동정호의 차디찬 물속에서 정신을 차렸던 나.
그 후에 어찌 아름다운 아내도 만나고, 제법 잘나가는 집에 사위도 되고, 조금 부족한 아이인 영영이 같은 꽌시도 얻었지만, 내 본격적 무림 삶이 시작된 곳이 동정호.
간만에 동정호를 바라보니 센티멘탈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전생에 두고 온 가족들은 잘 있을지···
많이 슬퍼하다 병이라도 나신 것은 아닐지···
그렇게 뱃전에서 동정호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여 우수에 젖어있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공? 어찌 기분이 별로인 듯합니다?”
“아, 아니요. 그저 옛 생각이 좀 나서···”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걱정 어린 표정을 짓는 아내.
아내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제가 알면 안 되는 것입니까?”
“뭐 별건 아니고···”
전생한 것을 말하면 약왕이 달려들어 광증을 치료한다고 할 것이 뻔하니 대충 넘기려 하는데, 아내의 등 뒤에서 약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동정호에 왔으니 기분이 별로일 테지.”
뭔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약왕.
의외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약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동정호에 오니 아무래도 자기 처지가 생각나 슬퍼 그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마치 내가 전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약왕의 말.
놀란 눈을 부릅뜨고 약왕을 바라보았다.
원래 전생 무협 지식으로는 무림 고수 중에 입선(入禪)의 경지에 들어 신선이 되기 직전인 고수들이 있기 마련.
더군다나 약왕이 아픈 병자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치료해 주기로 유명한데, 덕을 그만큼 쌓았으면 입선 직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이야기였다.
약왕이 야수궁에서 사기꾼 취급이나 당하는 모습만 봐서 팔왕 중에 제일 허당인가 싶었더니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헐, 진짜 뭘 아나?’
그런데 놀라 있는 내 귓가에 약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혼례를 올린 지 좀 되었는데, 아직 ‘동정’이니 슬플 만하지. 야수궁에서 보니 끌고 다니는 개도 그··· ‘동정’을 벗어났던데··· 동정호에 오니 그것이 떠오른 것이 아니겠느냐? 흠흠. 뭐 걱정하지 말거라 내 다 치료해 줄 것이니.”
약왕의 말에 아내가 새빨간 홍시 같은 부끄러운 얼굴이 되고, 같이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들 나를 딱한 눈으로 그리고 아내를 뭔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 미친 늙은이가 대체 무슨 망발을.’
“아니, 그게 아니라···”
황급히 오해를 털어내려 했으나 그렇다고 사람 많은 곳에서 아내의 몸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
외통수였다.
이리 사람 많은 곳에서 아내에게 치욕을 주느니 내가 감내해야 했던 것.
‘끄릅!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같이 배에 탔던 상인들이 나에게 은밀히 다가와 해구신(海狗腎)이라든지 녹용, 하수오 같은 것을 은밀히 권하기 시작했다.
“소협, 일단 한번 먹어보라 해도. 이것이 참 남자에게 좋은데 뭐라고 참 설명할 방법이···”
노망난 약왕 늙은이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
두 달 가까이 걸린 여행은 가을이 완연해서야 끝이 났고, 우리는 결국 약왕의 본가라는 복주(福州)의 장의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현판(懸板)이 나를 당황 시켰다.
장의문(張醫門).
‘이름이 어째···.’
뭔가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잔뜩 죽어 나갈 것 같은 이름.
뜻은 장 씨 의사의 문파 뭐 그런 뜻인 것은 알겠는데, 하필 병원에 저런 이름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여기가 정말 어르신의 본가란 말씀이십니까?”
문 입구에 걸린 현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묻자 약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놀랐느냐? 크흠. 뭐 제갈세가나 당가에 비견할 정도긴 하지.”
아니, 규모는 그렇다 치고 이름에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
왜냐하면 중국어 발음으로도 발음을 길게 늘어지는 것과 짧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칫 잘못하면 장례라는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아내도 여기서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운지 내 팔에 달라붙었다.
“노, 노공.”
사기꾼이라는 의혹은 아무래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
***
아무튼 그렇게 긴 여정 끝에 장의문에 도착하자 예상치 않은 일이 나에게 들이닥쳤다.
다들 무공을 익힌 몸인지라 상관없었지만, 나는 일반인이니 완연한 가을의 일교차와 긴 여행으로 감기가 찾아오고 만 것.
방에서 혼자 몸을 달달 떨고 있자 약왕이 손수 탕약을 끓여 나를 찾아왔다.
장의문에는 그의 제자라든지 가족들이 많았는데도 그가 직접 손수 끓여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 이 탕약 좀 들어보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갑자기 들이닥친 약왕으로 인해 의문을 느끼며 당황한 채 탕약을 마시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약왕이 내민 탕약을 비우고 나자 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내 이리 찾아온 것은 이야기를 좀 나누기 위해서라네. 우리 가문 녀석들이 자네가 그, ‘식룡’이라는 별호를 가진 ‘대단한 요리사’라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야. 자네 혹시 본가에도 요리법이 존재하는 것을 아는가?”
당연히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요리 중 특히 만두(饅頭)와 교자(餃子)를 배울 때 꼭 한번 언급하고 넘어가는 부분.
우리 제갈가의 제갈공명 형님이 그 위대한 만두의 창시자라면, 만두보다 조금 못한 교자의 창시자는 장중경.
약왕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자인 장중경이 교자의 창시자인 것이었다.
솔직히 창시자라기보다는 우리 제갈공명 형님이 만드신 만두를 파쿠리 친 것이 분명하지만, 후예 앞에서 그런 말은 할 수 없었기에 그냥 아는 척만 하기로 했다.
약왕의 체면을 존중해줘야 했으니까.
공명 형님이 만드신 만두 좀 작게 만들어서 물에 집어넣고 창시자라고 하는 꼴이 좀 그랬지만 말이다.
“거한교이탕(祛寒嬌耳湯)을 말씀하시는 것이겠군요?”
“오. 자네 아는구만!”
내 대답에 기뻐하는 약왕.
“내 다름이 아니라 자네 부인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를 모으는데, 여러 날 걸리듯 하여 그사이 한 가지 부탁을 좀 하려고 말이야.”
“부탁 말입니까?”
내 물음에 약왕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