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飛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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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를 따라서 오 층으로 향하는 계단.
‘제기랄! 엘리베이터가 없었지? 가오도 좋다지만···’
오랜만에 오르는 계단에 장딴지가 당겨왔다.
이번 생에는 뚜벅이 기간이 많았기에 별 무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맞이한 오 층까지 오르는 계단은 과도한 장딴지의 고통을 가져왔다.
오 층까지 오르자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무협 성공의 로망 중 하나가 기루 오 층에 저 멀리 아랫것들을 바라보는 것인데, 이런 소소한 리얼리티가 존재할 줄이야.
‘오 층 시스템은 인제 보니 정말 쓸데없는 시스템이구나.’
그렇게 조금 힘들게 오 층까지 오르자 우리가 안내된 곳은, 오 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큰 룸이었다.
고급스러운 휘장과 가구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방이었는데, 안내된 자리에 앉으려 하자 장진의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오 층이로군요! 절경, 절경입니다!”
사방으로 활짝 열린 창 너머로 저 멀리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전망에 장진이 촌놈처럼 사방을 둘러보며 나를 향해 외쳤다.
“형님 덕분에 제가 오 층 구경을 다 해봅니다! 더군다나 여기 오 층에는 비연(飛燕)이라는 강남 최고의 기녀라는 아이가 와있다는데, 저도 그 얼굴을 볼 수 있겠군요!”
촐싹대는 진이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지만, 존경심이 흘러넘치다 못해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장진.
‘기루 경험도 많다는 놈이 촌놈같이··· 잠깐? 강남 최고?’
아내의 분노와 진이의 설레발에 잠시 망각하고 있던 것이 떠올라 진이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 아이가 광동(廣東) 광주(廣州)의 최고 기녀가 확실한 것이냐?”
“물론이지요. 비연은 광주 최고 기루인 화화루 본루의 최고의 기녀로 유명하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는 장진.
오 층도 오 층이지만 강남 최고의 기녀를 본다는 기대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놀러 온 것이 아니니,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광주 최고 기녀를 만나러 왔다는 것과 거래하러 온 자리이니 분위기에 취해 실수하지 말라는 뜻에서 장진을 주의 시켰다.
“물론입니다. 형님!”
내 당부에 우렁차게 대답한 장진이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이미 입꼬리는 귓가에 닿을 지경이고 실룩거리는 얼굴로 신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그런데 광주 최고의 기녀라면? 이거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방에서 루주를 기다리자, 잠시 후 다른 기녀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 우리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전했다.
“루주께서는 잠시 일을 보러 나가셨다 오시는 중이시고, 비연님은 몸단장 중이니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알겠···”
“그래, 그래. 천천히 예쁘게 하고 나오라고 하거라.”
뭐라 대답하기 전에 신이나 대답하는 진이 녀석.
일단 찻잔을 들고 창가 난간에 걸터앉아 긴장을 풀기 위해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한번 꼭 해보고 싶었던 멘트를 뱉어보았다.
“이것이 위쪽의 공기인가?”
무림 세계 성공의 한 장면인 기루 최상층 뷰에 취하듯.
그렇게 버킷리스트를 하나 성공하고 달빛을 받으며 찻잔을 기울여 입술을 적시는 시늉을 할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적사(赤紗)로 된 하늘하늘한 망사옷을 걸친 채 들어서는 여인.
입가 위에 검은 점 하나와 이 시대 남자들이 좋아할 것같은 여리여리한 체격을 가진 여인이었다.
가련이와 정 반대되는 신체를 가진 여인, 왜 그녀의 이름이 비연인 줄 알 수 있었다.
저 몸이면 그녀의 기생 이름처럼 제비처럼 ‘날렵’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비연이라 했던가? 정말 제비처럼 날렵한(?) 신체를 생겼구나··· 아주 상당히 무척이나 완벽하게 날렵하게 말이야···’
그렇게 창가에 기대 그녀의 첫인상을 살피자, 입구에 들어선 비연이 우리를 향해 절을 하며 사과를 해왔다.
“공자님들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소첩 비연이라 합니다.”
“죄송까지야! 예쁘게 하고 오려면 다 그런 것이지. 그래, 어서 들어오거라.”
진이 녀석은 비연을 보자 이제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희희낙락한 모습으로 비연에게 내 옆에 앉을 것을 권했다.
“자, 저쪽 형님 옆에 앉거라. 저분이 요즘 무림에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계시는 식룡 류청운 님이시다.”
“예, 알겠습니다.”
비연은 내가 창가에 기대있자 내 쪽으로 다가와 다시 한번 인사했다.
“식룡 류청운 공자님 신첩 꼭 뵙고 싶었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바보 같은 진이 녀석은 신이나 희희낙락이지만 이 빈약 아니, 날렵한 여자는 아주 위험한 여자.
남자를 홀리려는 적사 차림에 흠칫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가 입었던 흑사가 스타킹으로 치면 20데니어짜리라면, 그녀가 입은 것은 80데니어 정도라는 사실.
이미 아내를 통해 극상의 모습을 보았던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기에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인도를 따라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래, 알겠네.”
그렇게 그녀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금 문이 열리며 다부진 인상의 남자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해왔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이리 금방 찾아오실지 모르고.”
“하하, 좋은 만남은 빠를수록 좋지요.”
남자의 사과에 웃으며 인사하는 장진.
아마도 저 남자가 화화루의 루주인 모양이었다.
장사치라고 보기에는 뭐랄까 느낌이 묘한 남자였다.
“장 공자 이분이?”
“예, 이분이 제 ‘의형제’ 식룡 류청운 형님이십니다.”
남자의 물음에 장진이 나를 소개하자 남자가 나를 향해 포권을 해왔다.
“오오. 이리 만나 뵙게 되었다니. 이 교가가 오늘 안목을 넓혔습니다. 화화루의 루주 교송지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류청운이라 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내는 루주.
-짝
그러자 그가 들어왔던 문이 다시 활짝 열리며 우리 앞에 요리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차려지고 있는 요리 너머로 루주에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왜 뵙기를 청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허허,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술이라도 한 잔씩 돌고 나서 말씀하시지요?”
루주가 인상 좋게 웃어 보이며 일단 술부터 한 잔씩 하자 권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믿으라고 해놓고 하하, 호호하며 기녀를 끼고 술이나 마시며 놀다 갈 수는 없는 일.
더군다나 비즈니스 관련이라면 맨정신일 때 이야기해야 하는 것.
더더군다나 얘들이 주는 음식과 술을 어찌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 단단한 단호박 같은 남자 류청운.
“제가 이곳에 술을 마시러 온 것은 아니니 용건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단호박같이 자르자 진이와 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인사주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일단 목이나 축이시고···”
“그래요. 식룡님, 소첩이 한잔 올릴 수 있게 허락해주셔요.”
진이가 웃으며 권하고 비연이 팔에 달라붙으려 하기에 팔을 슬쩍 빼내 그녀와의 거리를 벌리며 대답했다.
“저는 일 이야기를 할 때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일단 일 이야기부터 하시지요.”
내 말에 쌔 해지는 분위기.
당황한 루주가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그러면 식사부터 하시지요. 일 이야기를 하려면 요리를 드셔봐야 하니까요.”
술이 안 되자 요리를 권하는 루주.
이렇게 해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 같기에 이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하오문(下五門)에서 내주는 술과 음식을 마냥 먹을 수가 없군요.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 누구인지 알려주셔야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데, 비연 소저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 하오문?!”
진이 녀석이 놀라 소리치고.
-벌컥
내 질문이 끝나는 것과 함께 밖에서 대기하던 기녀들이 한 자정도 되는 짧은 검을 빼 든 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채챙 챙
“혀, 형님! 이, 이게 무슨 짓들이오!”
갑자기 칼을 뽑고 뛰어드는 여자들에 놀란 진이가 소리치고.
동시에 들려오는 싸늘한 여자의 목소리.
“무림에 제갈가의 지모(智謀)가 뛰어나다고 알려졌는데, 그 접각부까지 이런 지모를 지녔을 줄이야. 어찌 알아챘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비연이 뭔가 위험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
하오문이란 차(車), 선(船), 점(店), 각(腳), 아(牙). 기(妓)
그러니까 무림 세계의 마부, 뱃사공, 점소이, 짐꾼, 인신 매매업자, 기녀 놈들의 노동조합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하류층 인생들의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뭐 그런 느낌의 조직이라고 할까?
주로 취급하는 것은 개방과 마찬가지로 정보.
술자리나 배를 타고 가는 자리, 마차를 타고 가는 자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모아 정보를 사고파는 그런 단체인 것이다.
내가 이들이 하오문 소속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비연이라는 기녀가 광주 최고 기루의 기녀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원래 하오문의 본거지는 강남 무역으로 잘 나가는 무역항인 광주이다.
그리고 그 광주의 최고 기루는 하오문이 운영하고, 최고 기녀는 하오문 관련자라는 전생 무림의 ‘상식’
아마 높은 확률로 저 비연이라는 여자는 하오문의 높은 직책일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일단 서로가 원하는 게 있어 만난 자리이니 칼들은 치우고 이야기하시지요.”
칼까지 뽑아 들 줄은 몰라 후달리긴 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우리가 오 층으로 오르는 것을 보았기에 섣불리 큰일을 치진 않을 것이고, 더군다나 장의문의 후계자와 제갈가의 데릴사위인 나에게 함부로 험한 짓은 하지 못할 터.
흉흉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야기하자 비연이 인상을 쓰며 기녀들을 향해 명령했다.
“나가들 있거라.”
“예.”
비연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사라지는 기녀들.
장진 녀석은 오늘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갔다고 생각하는지, 그녀들이 사라졌음에도 무공도 익혔다는 놈이 잔뜩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비연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저를 피하는 것이 소문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저희가 하오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놀랍군요?”
‘소문? 무슨 소문?’
갑자기 무슨 소문을 언급하기에 대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해하는데, 비연이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찌 저희가 하오문인 줄 알아냈는지 입을 다무시겠다면 한가지 내기를 할까요?”
“내기 말입니까?”
“예, 저희가 식룡을 왜 만나고자 했는지 음식을 맛보고 그 이유를 알아채시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고려인삼을 모두 내어드리죠. 또한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시면, 식룡께서 필요한 귀한 약재도 저희가 모두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식룡께서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더 있거든요.”
말을 들어보니 아내에게 필요한 약재들을 더 가지고 있는 모양.
조건이 좋았지만, 나에게만 마냥 좋을 리는 없는 것.
비연에게 되물었다.
“그럼 제가 맞추지 못하면?”
“그야 당연히 저희가 하오문인 것을 어찌 알아채셨는지 알려주시고, 저희가 하는 부탁도 들어주셔야겠죠? 원하신다면 저희 쪽 조건에 제 하룻밤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힘드실 테고?”
말을 끝내며 뭔가 나를 아래위로 쓸어보며 깔보는 듯한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비연.
여기 기루에 오는 데만 해도 가루가 될뻔했거니와 비연의 날렵한 몸에는 관심이 없으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럼 나 류청운이 그 내기 받아들이겠소. 그럼 비연 낭자 소개를 다시 해주시겠소?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내기할 수는 없지 않소?”
내 물음에 비연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오문 복건성 분파주(分派主) 송비연. 이제 됐나요?”
“하, 하오문 분파주! 꿉!”
놀란 장진이 비연의 직책을 따라 소리쳤다가 옆에 앉은 자기를 루주라고 소개했던 남자의 흉흉한 안광을 받고 자기 입을 급하게 다물었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분파주라는 직책을 가진 여자.
아마 하오문은 대가리 수만 많은 조직인지라 실제 무력을 가진 자가 적어 그런 모양.
그러니 달리 말하면 저 여자는 무공 익힌 위험한 여자라는 뜻.
“자, 음식에 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맛을 보시고 저희가 부탁할 것이 무엇인지 맞혀 보시지요.”
‘일단 요리와 관련된 것은 확실하다 이것이지?’
송비연이 다시금 나를 재촉하고 그녀의 권유에 일단 화화루에 차려진 요리들을 한 번씩 살펴보며 시식을 시작했다.
화화루는 최고급 기루인지라 귀한 고기인 양고기를 푹 끓인 연양 같은 요리부터, 이 시대 중원인들이 좋아죽는 게로 만든 회무침인 세수해 요리.
거기에 항구도시라는 특성을 살려 생선 요리 같은 것들이 풍부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최고급 기루라 그런지 음식의 질은 뛰어났다.
그러나 문제라면 그것이 전부라는 것.
맛을 보면 볼수록 그저 일반적인 연회 요리 모음과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기루는 아름다운 여자를 끼고 시나 음악 술을 즐긴다는 것도 있지만, 요리도 빠질 수 없는 것인데 임팩트가 부족하달까?
요리의 맛을 보고 나니 그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생선 요리를 마지막으로 젓가락을 내려두고 송비연을 향해 물었다.
“기루 요리에 비연이라는 존재가 필요하신 것이군요?”
내 물음에 송비연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