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분(涼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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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진이 녀석을 다시금 다독여 알아낸 사실은 량분(涼粉).
약왕이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서는 겨울이 다가오면, 따듯한 탕에 량분을 같이 드시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이군요.”
“추울 때는 량분이 맛있긴 해요. 쫄깃하고. 따듯하고.”
아내의 말대로 이제 완연한 가을의 문턱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이 시대의 량분은 이름 그대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겨울에 많이 먹는 음식이니, 시기적으로 만들어 대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량분이란 이 시대에 삭분(索粉), 선분(線粉), 사분(絲粉), 량분(涼粉) 등으로 불리며 현대 중원에서 쓰는 이름은 분조(粉条).
분조를 한국에서 부르는 이름은 당면.
그러니 량분이란 당면(唐麪)을 지칭하는 이름.
약왕이 좋아하는 음식은 특이하게 당면이었다.
‘특이한 양반이네.’
솔직히 당면이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쫄깃함만으로 이루어진 면발을 즐기기 위해서 먹는 것.
보통 사나이들보다는 아녀자들이 좋아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량분이라···”
당면은 중원에서 꽤 유래 깊은 음식으로 당면의 유래는 멀리 춘추 전국시대로 올라간다.
손자병법서를 지은 손무의 후손 손빈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춘장 프리미엄을 어느 정도 고려하면 그냥 중원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에서의 이름이 당면(唐麪)인 것은 청나라 때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처음에는 호면(胡麺)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당나라 당자를 써서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어서 당면.
이 시대에는 콩, 특히 녹두의 전분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
녹두 간 물에서 전분을 가라앉혀 뽑아낸 후 그것을 반죽해 틀에 넣고, 뜨거운 물에 압력을 주어 짜내면서 만들거나 틀에 넣어 익힌 후 잘라서 만드는 것이 일반적.
주식은 아니지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별식 정도의 느낌으로 많이 먹는다.
“그래, 그럼 량분이 들어간 요리를 해드리면 되려나?”
량분이 들어가는 요리 중에 보양식이라면 한가지 떠오르는 게 있어, 그것을 만들어드리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장진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량분은 드시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드시기 힘들다고 말이냐?”
“예, 드시고 나시면 속이 좀 답답하시다고···”
속이 답답하다는 것은 당면을 먹고 나면 소화가 안 된다는 말.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당면은 원래 전분으로 만드는 요리.
전분은 침에 들어있는 아밀라아제로 소화되는 것인데, 보통 우리가 당면을 먹을 때는 국수의 형태이기에 잘 씹지 않게 삼키게 되고.
거기에 당면은 액체를 흡수하는 데 최적화된 면이니, 수분과 함께 기름기를 잔뜩 머금어 소화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이를 먹으면 침의 양도 줄어드니 소화는 더더욱 힘들어질 터.
걸왕이나 약왕 의조부인 독왕급의 무인들은 고수이긴 했지만, 환골탈태(換骨奪胎)까지는 이루지 못한 분들이니 아무래도 육체는 노인.
당면을 먹고 소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량분을 좋아하시는데, 먹고 나시면 속이 불편하다고 하신 다라···”
“예, 형님.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당면이라는 것이 전분으로 만든 면이다 보니. 나이로 인한 소화력 저하는 나도 어찌할 수는 없는 법.
까다로운 양반이었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꾸나. 량분 말고는 달리 좋아하는 음식은 없으시더냐? 혹시 못 드시는 것은?”
“글쎄요? 그리고 딱히 못 드시는 음식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구나. 밤도 늦었는데, 가서 쉬려무나 일하고 온 사람은 내 너무 오래 붙잡은 듯하구나.”
“아닙니다. 형님. 그럼 소제(小弟)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가서 푹 쉬려무나.”
그렇게 자기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려준 장진이, 인사를 하고 우리 처소를 막 벗어나려 문턱을 넘으려 할 때였다.
“아차! 잊을뻔했네. 형님, 화화루의 비연이 한번 들러주십사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요리 컨설팅의 대가가 벌써 준비되어 부르는 것인가?’
내가 만족할만한 대가를 준비하겠다고 했었는데, 벌써 준비가 된 것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장사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내게 줄 보상에 대해 고민해보겠다고 하더니, 이리 급하게 만나자는 것은 고민을 별로 하지 않고 대충 퉁 치려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
“예, 형수님들도 모시고 요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요.”
그러나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아, 그런 것인가?”
장진의 말에 아내와 영영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만남에서 셋은 꽌시 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면을 트고 서열까지 정리한 상태.
비연이 아마 영영이, 아내와 꽌시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식사 초대는 나는 깍두기이고 메인은 아내와 영영이.
꽌시가 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서로 안면을 튼 후, 인사를 나누고 식사하며 친분을 쌓는 것이 반복되다가 자연스레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친해져 꽌시가 되는 것이니, 좀 더 친분을 쌓고 싶어서 초대한 모양이었다.
이미 호제호매(呼姐呼妹) 하는 사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 알겠구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그렇게 장진이 사라지자 영영이가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
-짝
“청아, 비연이 오 층에서 한번 요리를 대접한다고 하더니, 그래서 부르는 모양이야! 저번에는 멋진 경치를 잠깐 봐서 좀 아쉬웠는데, 저녁에 오 층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그리 좋다고 하더니. 보여줄 모양인가 봐!”
“그런가 봅니다. 저번에는 잠깐밖에 보지 못하긴 했었죠?”
기쁜 둘의 목소리.
딱히 거절하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 다시 한번 물었다.
왜냐하면 장소가 아무래도 기루이고 비연은 아무래도 신분이 기녀인지라 혹시라도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을까 싶었던 것.
둘은 아무래도 중원 거대 조폭 집안 후계이면서 겉모습만은 여염집 소녀들.
비연은 기녀이자 중원 하류(下流)연합회 노조 위원 정도의 위치니까 말이다.
“둘 다 괜찮겠어?”
“네, 노공. 저는 괜찮습니다. 언니는요?”
“나도 괜찮아. 하오문 복건성 분파주(分派主) 정도면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비연의 신분이 기녀인지라 조금 꺼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기우인 듯했다.
더군다나 영영이는 한술 더 떠 손익까지 따져본 모양.
“그래, 그럼 내일 저녁때쯤 방문하자고.”
“좋아요.”
“저도 좋아요.”
그렇게 두 여자와 함께 기루 방문이 결정되었다.
***
다음 날 아침 인편으로 비연에게 저녁 일찍 찾아가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혹시 늦으면 입구에서 기루의 손님들과 마주칠 것 같아 문을 열기 전 조용히 오 층으로 오르려고 하는 것.
꽃같이 예쁜 아내와 깍두기 영영이가 입구에 나타나면, 무식한 중원 놈들이 기녀인 줄 알고 치근덕대다가 머리통이 터져나가거나 독수에 녹아내릴 수도 있으므로 우리 쪽에서 피해주기 위한 배려.
“준비되었소?”
“예, 가가.”
“노공, 가시지요.”
그렇게 해가 지기 전 일찍 길을 나서 시장을 가로질러 화화루로 향했다.
중간에 영영이와 길거리에서 말싸움을 펼쳤던, 생선 가판 아줌마가 영영이와 눈을 마주치고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듯 화들짝 놀라 가판 뒤로 숨는 모습을 지나쳐 당도한 화화루.
아직 오픈 전인지라 한가한 입구에서 비연이 직접 일 층까지 내려와 우릴 맞았다.
아내와 영영이를 인식해서 그런지 오늘은 사(紗)로 만든 비치는 옷은 아닌, 흰 비단옷을 입은 모습으로 말이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류청운님과 언니들.”
“이리 초대해주셔서 고맙소이다.”
“비연아 이리 바로 초대해주다니 고마워.”
“고마워요. 비연.”
“고맙다니요. 당연히 막내인 제가 두 분을 모셔야지요. 어서 오르시지요. 요리가 식겠습니다.”
그렇게 비연의 안내를 따라 위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미 익히 한번 안내되었던 룸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먼저 안으로 들어선 내 뒤에서 들려오는 비연의 목소리.
“언니들은 이쪽으로요.”
“응? 우리?”
“예, 모처럼 좋은 음식과 좋은 자리인데, 예쁜 모습이 좋지 않겠어요?”
“예쁜 모습?”
“저, 저기··· 괘, 괜찮은데···”
-짝
“자 어서들 모시거라.”
“예, 루주.”
비연의 손바닥 치는 소리에 기녀들이 몰려들어 아내와 영영이를 비연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이는 복도로 끌고 갔다.
‘드레스코드라도 있는 건가?’
나야 장의문에 도착해 장진이 입는 비단옷을 하나 받은 상태였지만, 아내와 영영이의 옷은 남만에 갈 때 준비했던 여성용 무복.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긴 했다.
“류청운님은 먼저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알겠소.”
아내와 영영이가 끌려가고 혼자 방안에 들어서 차려져 있는 상 앞에서 멍하니 셋을 기다렸다.
살짝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들에서 솟아오르는 따듯한 김.
요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남이 만들어 준 요리이기에, 차려진 음식들을 살펴보며 무엇부터 맛을 봐야 하나 걱정하고 있을 때.
-스르륵
내가 들어왔던 문이 아닌 정면의 미닫이로 이루어진 부분이 스르륵 열리더니 세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내의 눈빛같이 푸른 비단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아내인 제갈청과 녹색의 비단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영영이.
화장까지 해 눈같이 하얀 아내의 얼굴은 조금 혈색 있게 되어있었고, 영영이는 흰 분을 발라서 좀 더 하얗게 된 모습.
이 시대의 메이크업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내의 화려한 모습과 옆에 쓰끼다시 영영이.
“오··· 오··· 오··· 오··· 오···”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뇌가 녹아내린 좀비나 흘리는 긴 장탄성.
내 모습을 보고 비연이 물어왔다.
“어때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무심코 엄지척할 뿐.
“무슨 뜻이죠 청운님?”
“엄지는 손가락 중 으뜸이니, 으뜸이라는 말이오!”
“소첩이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그녀의 물음에 중풍(中風) 걸린 것처럼 머리를 떨어 긍정했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버릴 듯이.
비연이 준비한 자리는 맛있는 음식과 예쁘게 치장한 아내와 영영이 그리고 수준급 비파(琵琶)연주 실력을 갖춘 비연의 연주와 노래가 함께 하는 기분 좋은 자리였다.
“호호, 정말?”
“그럼요. 들이닥친 아버지를 피해 기녀의 치마 속에 숨어있던 남궁가의 도련님은, 결국 들켜 자기 아버지께 끌려갔다니까요.”
“저런. 정말 흉하군요.”
역시나 에이스 기녀라고 하더니 비연은 남자 손님이든, 여자 손님이든 손님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인지.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영영이와 아내도 이야기에 홀린 듯 연신 술을 홀짝거리며 비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경청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시오. 부인.”
“예, 알겠습니다. 노공.”
“이런 날은 좀 마셔야죠. 가가.”
이러다 잔뜩 취해 둘 다 업고 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주의하라고 하였지만, 비연의 연주와 노래로 살짝 들뜬 분위기와 예쁜 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대담해진 둘은 말릴 새도 없이 취하기 시작했다.
“헤헤··· 우리 야서···”
“가가, 저도 예쁘죠? 그쵸? 헤에···”
“아이고 알았소. 그래 영영아 예쁘니까 진정하거라.”
송 시대의 술은 증류주가 없고 대부분 발효주이기에 도수가 낮은 편인데, 오늘 술을 못 하는 아내와 영영이를 위해 비연이 준비한 술도 도수가 낮고 달달 한 식혜 같은 술.
알콜이 살짝 목욕만 하고 나온 느낌.
그런데도 달콤함에 빠져 한 두잔 홀짝이다 보니 둘은 어느새 취해버리고 말았고, 잠시 후 방안에 널브러졌다.
“하아··· 결국 이리되었나···”
그나마 둘이 흉한 주사가 없는 것에 다행이라고 위안할 때 들려오는 비연의 목소리.
“두 분을 제방으로 모실 테니 주무시고 가시지요.”
“그래도 되겠소?”
“물론이죠.”
“내 그럼 신세 좀 지겠소.”
내가 무공 고수도 아니고 둘 다 들쳐 매는 것은 절대로 무리이고, 그렇다고 영영이를 직접 옮길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무림 첫 기루 외박이 이런 경험이라니.’
비연의 명령으로 침상이 준비되는 사이 둘의 모습에 말라오는 목을 축이기 위해 술 한잔을 더 들이켜자 비연이 뭔가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그나저나 어찌 이리 어여쁜 두 분의 마음을 얻으신 것입니까? 더군다나 제갈가와 당가라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아내와 어찌 혼례를 올리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인가? 잠깐 둘?’
“둘 말이오?”
“예, 둘.”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 물음.
아내가 나를 두더지라는 닉네임으로 부르며 좋아해 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영영이가?
“에이, 영영이는 아니요. 비연이 잘못 본 것이오.”
내가 부정하자 비연이 웃으며 물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따라다니는 여인도 있답니까?”
‘영영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설마 가족끼리?’
믿기 힘든 소리가 비연의 입에서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