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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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이의 물음에 머릿속에서 몸의 기억을 끄집어내 고향 부분을 잠시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고향이 그러니까···’
분명 나는 복건성의 복주 근처 작은 마을에 있는 류가장이라는 곳 출신.
정확히는 복주에서 반나절만 가면 나오는 복청(福淸)이라는 곳 출신인 것이었다.
이 몸의 기억을 살펴보면 복청은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인데, 어업과 농사를 짓는 사람이 대부분인 해안가 한적한 농촌 마을 느낌.
전생이라면 제법 큰 도시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마을이었다.
몇백 호가 모여 사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그런 마을이랄까?
류가장은 그곳에서 제법 큰소리치며 사는 지역 유지, 뭐 그런 느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뭐라고 하지?’
일단 고향에 온 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영영이의 물음에 대답했다.
“고, 고향이 별것이겠느냐? 정붙이고 살면 그곳이 다 고향 아니겠느냐.”
“예? 아니, 아무리 그래도 태어나 자란 곳인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들었지만, 고향에 남은 친척분들도 있을 것 아니에요.”
내가 봐도 궁색한 답변.
그리고 이어지는 영영이의 난처한 질문.
영영이의 주의를 돌리려다가 난처한 상황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내가 난처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동정호에 빠져 죽을뻔했다가 살아나고, 내가 전생한 것인지 빙의인지 모를 상태로 깨어났을 때.
몸의 기억을 통해서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려고 기억을 살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기억이 영화를 본 것처럼 남아있다는 것.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대부분 망각으로 사라지고 중요한 것만 남아 기억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중요한 것들만 머릿속에 떠올라야 하는 것인데, 중요한 내용들 일부를 제외하고 영화처럼 남아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CCTV 녹화한 것처럼 남아있어 기억을 되짚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또 기억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니, 사소한 내용을 살피려면 아무리 몇 배속으로 돌려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또 개같이 지루했다.
망각으로 사라졌어야 할 농촌 마을에서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는 그런 반복되는 생활들이 기억 대부분이었기도 하거니와.
달리 말하면 나라는 놈은 뭔 인생 대부분을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잔 스토리밖에 없는 아주 노잼인 인생을 살던 놈이라는 것.
내용이 하품 나게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억을 살필 때 아주 스피디하게 속독하듯 후루룩 넘겨버려, 별로 몸의 고향에 대해 기억하는 게 없었다.
시간을 두고 한번 살펴야 할 것인데 당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그러니 영영이의 질문에 한 변명이 궁색하고, 혹시라도 가보자고 할까 봐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내 대답이 이해가 안 된다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아내와 영영이의 표정.
둘을 이해시킬만한 핑계를 대야 했다.
‘할 수 없나? 필살기를 쓸 수밖에.’
이럴 때는 이미 밑밥을 적당히 깔아둔 핑곗거리가 있었기에 슬픔에 젖어 우수에 찬 눈빛으로 영영이에게 대꾸했다.
“내가 삼 년 전쯤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뻔한 일이 있고 나서,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서 말이다. 고향이 어디인지는 기억하지만, 자세한 것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구나.”
의조부인 독왕께서 역천의 상단전을 살피실 때 슬그머니 다른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밑밥을 깔아두었기에 거기에 기억도 잃었다는 사실을 보탠 것.
여성들은 또 공감력이 뛰어나니 이정도 연기면 다들 납득할것이라고 생각하자 들려오는 두 여자의 놀란 목소리.
“저, 정말요?”
“노, 노공 어째서 저에게는 그런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놀란 영영이와 걱정스러운 눈빛이 된 아내의 질문이 쏟아졌다.
“먹을 것을 숨겨두었다가 숨긴 곳을 까먹어도 떠올리기 위해 고통스러운데,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노공, 그러고 보니 사천의 할아버님과 대화를 나눌 때, 분명 이상한 기억도 떠오르신다고 하셨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요?”
“나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들을···.”
역시나 영영이의 이상한 감상과 아내의 걱정 어린 물음.
여자들의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너무 과몰입하기 전에 적당히 대답해 말을 끊으려는데 들려오는 영영이의 목소리.
“아! 가가께서 기억을 잃으셨으니, 고향에 가보시면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언니 좋은 생각이에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돌아가냐?’
당황해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어차피 남아있는 가족도 없을 텐데···”
“가가, 잘 생각해보세요. 기억을 못 하시는데, 가족이 있을지 없을지 어찌 알겠어요? 그것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언니,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영영이의 허를 찌르는 질문.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아니, 그러니까···”
“가가의 본가에는 반드시 가봐야겠어요. 어쩌면 아직 남아계신 가족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노공, 그러면 정말 좋겠습니다. 가족이 남아있으면 저도 인사도 드리고···”
‘잰 왜 이럴 때만 논리적이야!?’
그렇게 류청운 본가 방문 결정.
***
당장 지금이라도 내 고향마을에 가보자는 둘이었지만, 일단 아내의 몸을 핑계 삼아 며칠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힘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돌아오고 있었으나 어젯밤 한기를 뿜어낸 것을 문제 삼아 며칠 더 지켜보자 설득했던 것.
고향 마을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니 언제라도 가볼 수 있다고 간신히 설득해서 말이다.
“아직 몸이 정상적이지 않으니 몸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결정합시다.”
“저는 괜찮습니다. 노공.”
“아니요. 반나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고, 약왕께서는 당분간 몸을 충분히 가라앉혀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며칠만 기다려봅시다. 내 고향 마을이야 도망가는 것이 아니지 않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가가의 말씀이 맞으니 그렇게 하자꾸나. 청아.”
“예, 알겠습니다. 언니.”
“그래, 혹시 시부모님을 만났는데, 한기를 뿜어내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렇게 의욕에 찬 아내와 영영이를 진정시키고, 내가 제일 먼저 계획한 일은 화화루의 비연을 찾는 것이었다.
내가 본가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후처를 들이셨는데, 아버지마저 후처를 들이신 지 얼마 안 돼 돌아가시자 새어머니가 돈 몇 푼 쥐여주며 나를 쫓아내다시피 했다는 것.
문제는 이 사람이 나를 어떤 의도로 내보낸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기억을 대충 뒤져봐도 몸은 새어머니와 전혀 교류가 거의 없었고, 집안에서도 오며 가며 인사 정도 하는 사이.
천하의 나쁜 계모인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 사람이 있는 집을 찾아가려니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자마자 나는 바로 계획을 실천했다.
“내 진이를 좀 만나고 오겠소이다.”
“장진 공자를요?”
“오랜만에 본가에 가는데 빈손으로 가기는 뭐해서 말이요. 혹시 모르니 선물을 좀 부탁하려고 말입니다.”
진이는 장의문의 물품 구매 담당이니 핑계로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이야기했는데, 내 말에 깜짝 놀란 아내가 대답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저와 같이 가셔야지요?”
‘아, 오늘 왜 자꾸 일이 꼬이냐?’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계획.
얼른 민첩하게 핑계를 더 만들어 이야기해야 했다.
“아, 아니요. 오늘은 어떤 물건들이 선물로 좋을지 물어만 볼 것이니, 선물을 고를 때는 같이 갑시다. 몸도 아직 좋지 않으니까 말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아내와 영영이가 수다로 바쁜 사이 장진을 만나러 간다며 장의문을 나섰다.
시장통을 지나 화화루가 위치한 해변 근처로 다가가니 유난히도 번잡스러운 화화루의 입구.
무슨 일인가 싶어 화화루의 입구를 살피자 몇 명의 사람들이 해변 쪽에서 조개를 잡아 오고 있었고, 오늘 사용할 식자재로 보이는 것들이 화화루의 뒷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장사가 많이 잘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 번잡해 보이는 화화루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자 물건이 들어오는 것을 살피고 있던 화화루의 가짜 루주와 기도들이 나를 발견하고 돌아가신 조상님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하며 포권을 해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저희 화화루의 은인이신 류공자님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류공자님!”
“다들 그간 잘 계셨습니까?”
진이 말로는 요즘 자리가 없어서 손님을 못 받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지 내 앞에서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비며 대답하는 가짜 루주.
“그럼요. 그럼요. 식룡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아주아주 잘 지내고 있습죠. 그나저나 저희 화화루에는 어쩐 일로? 아니지 일단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아, 다른 일은 아니고 비연을 좀 만나러 왔는데, 잠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비연을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를 전달하자 그가 나를 안쪽으로 안내하며 대답했다.
“아. 비연을 말입니까?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렇게 그가 사라지고 얼마 안 돼 기녀를 따라 올라간 오 층.
‘어휴 다음부터는 그냥 일 층에서 만나자고 해야겠구나.’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제는 너무 익숙해 내 전용 룸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서자 비연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류공자님! 어서 오셔요.”
“그래, 그간 잘 있었소?”
“덕분에 장사가 아주 잘되어 신첩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답니다? 그나저나 이런 시간에 저를 직접 찾아오시다니, 그러고 보니 언니 두 분도 옆에 안 계시고? 설마?”
비연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웅은 호색이라더니. 두 언니까지 떼어두고 오셨다면 설마? 저도 위험한 사랑이 더 좋긴 하지만···.”
내가 기능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내에게 주입받아 그런지, 얼마 전까지는 관심 밖이었다가 이제는 먹잇감이라도 되는 양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듯 장난을 치는 비연.
당연히 장난일 테지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있는 남자와의 스릴 있는 금단의 불장난을 하고 싶었다면, 번지수를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아온 것이니까.
부인 있는 남자와 금단의 불장난을 하다 걸렸을 때 최고로 당할 수 있는 모욕이 머리채를 잡히는 것이라면, 나와 그런 짓을 했다가는 머리 가죽이 벗겨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아내가 얼마 전보다 조금 더 무공의 성취를 이뤘으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내가 비연을 향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비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딸꾹질을 했다.
“히끅··· 다, 당연히 노, 농담이었지요. 제, 제가 언니의 사람을 어찌. 그, 그나저나 어찌 저를 이런 시간에?”
비연은 모골이 송연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물어왔다.
“다름이 아니고 부탁을 좀 하려고 해서 말이오.”
“부탁이요?”
“그렇소. 정보가 좀 필요해서 말이오.”
내 정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연.
“공자님 입에서 제게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니 신기하네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실 것 같은데?”
하긴 뭐, 나는 요리사 나부랭이니까 무림인도 아니고 정보가 필요하다니 의외라고 생각되는 모양.
그녀에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복주에서 반나절만 가면 나오는 복청(福淸)이라는 곳에 있는 류가장에 대한 정보를 좀 부탁하고 싶은데 말이오.”
“복청의 류가장 말입니까?”
내 이야기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던 비연이 좀 전보다 더 의문 어린 표정이 되어 물어왔다.
“설마? 류가장이라면? 공자님의?”
이쪽 계통에서 종사하니 대충 감이 오는 모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소. 내 본가요.”
“어째서 본가의 정보를?”
자기 집의 정보를 요구하니 뭔가 이해가 안 되는 모양.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그간 친해졌다고 정보 장사치들의 룰을 어기려 하는가 싶어 되물었다.
“원래 하오문은 정보를 부탁하면 연유를 묻지 않는 것 아니었소?”
원래 정보 장사치들은 정보의 출처나 산 사람이 그것을 왜 어떤 연유에서 원하는지 묻지 않는 것이 국룰.
내가 룰에 대해 언급하자 비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무림 분이 아니신 것이, 이럴 때 티가 나는군요. 정보는 은밀한 비밀이 포함된 경우가 많아 잘못하면 문제가 될 여지가 높으니, 사용처를 묻는 것은 필수입니다. 잘못하면 저희도 큰 피해를 보거든요.”
‘내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르구만?’
그녀의 대답에 그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 기억을 잃은 사정과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의 단편들 때문에 본가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비연이 측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런, 그런 일이! 걱정하지 마세요. 공자님. 제가 꼭 정확한 이야기를 알아 오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좀 부탁하오.”
그렇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틀 후.
인편을 통해 비연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다시 찾아간 화화루 5층에서 비연이 그간 모은 정보를 정리한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공자님, 그런데 공자님의 본가 뭔가 이상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