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시(嚆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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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캉
-팅
멀리서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두근두근 뛰는 가슴과 불안해져 오는 마음.
몸 녀석이 발광하는지 새엄마와의 추억들이 날카로운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영영이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 채 고개를 돌려 월영을 바라보고 묻자, 월영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혼잣말하듯 뇌까렸다.
“설마, 시사혈귀 그자가!”
잔뜩 분노한 월영의 대답과 함께 간질거리는 가슴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 무슨 일인지 혹시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질문하자 월영이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새엄마의 명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설명했다.
“대주께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실 리 없으니, 시사혈귀 그자가 무슨 일을 벌인 모양입니다.”
새어머니께서 나의 도주를 돕기 위해 자신이 류가장의 세작들을 직접 처리하신다고 했지만, 새어머니는 섭혼술의 스페셜리스트.
조용히 하나씩 잡아 세뇌하면 되는 일인데, 저렇게 마을 사람들이 눈치챌지도 모르게 개싸움을 벌일 이유가 없으니, 월영은 아마 시사혈귀라는 그 미친놈이 뭔가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의 기억 속의 시사혈귀는 어머니와 반대 파벌쯤으로 느껴졌는데, 내 그런 생각을 확신시켜주듯 월영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니면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마교 내부에는 원래 권력 다툼이 좀 있습니다. 시사혈귀 그자가 반대 세력 중 하나이기에 대주님의 실각을 호시탐탐 노렸는데, 아마 공자님과의 일을 장로회에 보고하고 어떤 결정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고요.”
내 기억 속에 그놈이 새엄마와 나의 일을 장로 회의에 고자질한다고 했었는데, 그로 인해 숙청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명.
자꾸만 떠오르는 추억 때문인지, 그 말에 불안감이 더욱 솟아올랐다.
‘나, 나 때문인가? 아니, 아니지. 내가 왜 이러지? 몸, 이 녀석!’
불안해하는 몸을 꾸짖고, 그러지 않으려 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초조하게 처소 안을 왔다 갔다 하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구 쪽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동시에 내 손목을 붙드는 손.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바라보자 어느새 다가온 월영이 내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안 됩니다. 공자님.”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월영.
“아니, 내가 뭘 하겠다는 건 아니고, 호, 혹시 누가 다가올지 모르니까 말이오.”
궁색한 변명을 쏟아냈지만, 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월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
어느새 다가운 아내와 영영이가 나를 양쪽에서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노공. 그분은 강하신 분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 가 아니, 노공께서 혹시라도 잡히시면, 그분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니까요.”
물론 알고 있었다.
내가 가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분이 내가 이대로 도망치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쯤은.
하지만 기억이 떠오르고 나서 봤던 그 수많은 추억이 정말 몸의 기억인지 나의 기억인지 이제는 나도 도대체 모를 정도로 가슴이 아려오고 있었다.
‘제기랄 자꾸 왜 이러지?’
그렇게 내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할 때.
갑자기 덕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귀를 쫑긋하고 세워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이상한 패턴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탁 탁탁. 탁 탁탁.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느낌.
그리고 그 기묘한 발걸음은 점점 더 소리를 키우며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처소로 다가오는 것이 명백한 상황.
[모두 숨으세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월영이 모두를 향해 나직이 외치자,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다들 처소 안쪽 벽으로 바짝 붙어 숨을 죽였고.
영영이는 재빨리 덕구에게 달라붙어 짖으면 안 된다고 속삭였다.
[조용 덕구야. 짖으면 안 돼. 알겠지?]
-탁 탁탁.
-쿵!
그렇게 모두가 처소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처소의 문을 충격하는 무엇인가.
모두 놀라 정신을 집중해 처소의 입구를 노려보며 출수 자세를 잡자, 입구에서 누군가의 숨 몰아쉬는 소리가 천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헉헉···”
동시에 문 아래 틈으로 흘러드는 달빛과 함께 선명하고 붉은 액체가 천천히 처소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피?!’
그리고 그렇게 흘러드는 피와 누군가의 간신히 쥐어짠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 부대주···”
“일영(日影)?!”
아는 사람의 목소리인지 문밖의 목소리에 놀란 월영이 황급히 문을 열자,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처소 안으로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넘어지는 무엇인가.
월영이 그것을 간신히 붙들어 품에 안자 달빛 속에서 드러난 것은, 상처가 심해 보이는 또 다른 시비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붉게 물든 여인에게 월영이 외치듯 물었다.
“일영, 어찌 된 일입니까?!”
“시사혈귀 그놈이··· 하윽···”
“일영! 정신 차리세요! 그놈이 설마 대장로(大長老) 직속 호법원(護法원)을 끌고라도 온 것입니까?”
죄를 지은 새어머니를 잡아가기 위해서 군대로 치면 헌병대라도 끌고 온 것이냐고 묻자, 쓰러져있던 일영이라는 여자가 힘들게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쿨럭, 아, 아닙니다. 그 미친놈이 혀, 혈귀대(血鬼隊)를···”
“뭐, 뭐라고요?! 이 미친놈이! 그럼 길, 길은 어찌 되었습니까?”
급박한 와중에 우리의 탈출로를 확인하는 월영.
아마 일영이 새어머니가 아까 약속했던 보내주기로 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하윽··· 노, 놈들이 하필 저희를 이, 이쪽으로 몰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길을 낼 터이니 대, 대주께서 모두 모셔 오라고···”
하지만 새어머니의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는지 상황은 암울하게 치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류가장은 내가 있는 처소에서부터 육지 쪽으로 점점 커지는 삼각형 모양의 땅 위에 세워져 있기에, 적들도 머리가 있으니 새엄마와 새엄마의 부하들을 이쪽으로 몰고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일영이라는 여자의 말은 우리가 도망칠 길이 막혔으니, 새엄마가 직접 길을 열어 나를 탈출시키겠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친 일영이라는 여자는 곧바로 혼절하고 말았다.
“일영! 일영!”
이대로 두면 숨이 끓어질 상황.
나는 다급히 매고 왔던 급으로 뛰어가 혹시 몰라 장의문에서 약왕에게 뜯어왔던 천과 금창약(金瘡藥), 보혈단(補血團)을 건네며 말했다.
“자 빨리 이것을.”
“이것은?”
나를 올려다보며 묻어오는 월영.
“금창약(金瘡藥), 보혈단(補血團)이요. 어서. 이러다 숨이 멎겠소.”
“하,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하니 어서 가셔야 합니다.”
서둘러야 한다고 말하는 월영.
그러나 나를 살리겠다고 다 죽어가는 몸으로 뛰어온 여자를 이대로 죽어버리게 두고 갈 수도 없는 일.
“영영아, 부인, 거듭시다!”
“알겠어요. 노공.”
“알겠습니다.”
일단 죽어가는 여자를 재빨리 응급처치하고 다 같이 새어머니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자를 치료하며 아까 둘이 나누던 대화에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대화 중에 혈귀대라면?”
“놈의 휘하 무력대입니다. 호법원을 통하지 않고 장로의 죄를 묻는 법은 없는데, 이곳에서 대주를 죽이고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씌울 모양입니다.”
‘천마신교에서 파견된 것은 둘뿐이니 여기서 반대파를 하나 제거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피 흘리는 여자의 벌어진 상처를 붙여 금창약을 발라 지혈하고, 천으로 급하게 몸 여기저기를 동여매고 보혈단까지 먹이자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 월영이 낭패한 얼굴로 외쳤다.
“벌서 여기까지!”
월영의 외침과 다친 여자에게 집중하던 우리의 귓가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더욱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채깡
-티잉
“크으윽!”
“끄어억!”
“물러나지 마세요!”
“으하하하하! 혈화마녀(血花魔女). 쓸데없는 저항을 하지 않으면 편하게 보내드린다는데도.”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 추정하기로 새어머니의 부하는 서른 명 정도.
거기에 새어머니까지 계시니 쉽게 밀리지 않을 것이었는데, 이미 아주 가까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친 여자를 일단 눕혀두고 월영과 함께 다급히 뛰어나가 처소 뒤편으로 향하자, 내 처소로 들어오는 빽빽한 대나무 사이로 난 길에서, 새어머니와 무사들이 밀려오는 적들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다급히 영영이를 불렀다.
“영영아!”
“알겠어요! 가자 덕구야! 덕구야 빨간 옷 입은 놈들이 나쁜 놈들이야!”
영영이가 월영 덕구와 함께 내가 자신을 왜 부른 것임을 알아채고 덕구를 대동하고 밀리고 있는 새어머니와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덕구의 활약.
“아그르르릉!”
“끄아아악!”
“커흑!”
싸우고 있는 무사들의 다리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옆구리 허벅지 등의 연한 살을 물어뜯어 버리는 덕구.
개나 짐승에게 물린 것을 교상(咬傷)이라고 하는데, 살점이 사라져 지혈이 잘 안 되는 것으로 유명하니, 저놈들은 결국 사망 확정.
적들을 물어뜯고 덕구가 몸을 회전하자 적들의 살덩어리가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개, 개가!”
“아, 안돼! 내, 내가! 내가··· 고, 고ㅈ···”
그리고 가끔은 중요한 무엇도.
‘어우야··· 덕구 조 악랄한 새끼.’
아무리 적이라지만 남자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만드는 덕구의 악랄한 무공.
체고가 낮고 대치하던 사람들의 다리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니.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이가 나가듯 군데군데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월영이 가세하니 빠르게 밀리던 진형이 안정을 찾았다.
뒤쪽에서 안정은 되찾은 진영을 살피자 새어머니와 무사들의 상태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는데, 피를 뒤집어쓴 채 악전고투를 이어가던 새어머니의 무사들은 이제 열다섯 정도 남은 상황이었고, 그중에 멀쩡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에 피를 흘리는 새어머니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두근두근
그 모습에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가슴.
안타까움에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으나 새어머니는 제일 앞에서 무사들과 함께 적들을 막아내는 상태.
저러다 크게 다치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되 영영이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영영아 독을!”
길이 좁고 덕구와 월영이 나서자 어떻게든 밀려오던 적들이 정체된 상황.
다시 한번 적들의 기세를 꺾고 시간을 벌기 위해 처음 계획대로 영영이에게 독을 부탁한 것이었다.
우리끼리라면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새엄마의 부하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독과 함께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서.
“알겠어요! 노공!”
무사들의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영영이가 대나무를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어머니, 무사들을 물리세요!”
“그, 그래 알겠어요.”
무공을 펼치는 영영이의 모습에 당황한 새엄마가 무사들과 함께 뒤로 훌쩍 물러나자 뛰어오른 영영이가 정면을 향해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소리도 모양도 없는 무엇인가.
영영이의 손만이 빠르게 움직일 뿐이었는데.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죽통에서 무엇인가가 뿌려지고 있다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대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던 영영이가 짧은 도약 후 다시 바닥으로 착지하자, 새어머니와 같이 물러나는 무사들을 쫓아 달려들던 앞 열의 적들이 갑자기 삐걱거리는 인형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마치 통나무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커흑···”
“끄르릅!”
“도, 독이다!”
애초에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바람이 세게 불어와, 영영이가 독이 빨리 사라져 우리끼리 버티려 할 때는 독을 쓸 수 없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우리끼리 있는 것도 아니고 새어머니의 무사들과 새어머니까지 계신 상태.
충분한 시간을 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영영이가 시간을 끄는 사이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꽃을 쏘아 올리기로 결정했다.
문제가 생길지도, 아니, 반드시 문제는 생기겠지만, 지금은 일단 살아남는 것이 급하니까.
“부인. 효시를.”
“알겠어요. 노공.”
아내의 대답과 함께 대가리만 자른 효시가 밤하늘을 찢어발기며 아내의 손에서 쏘아졌다.
-꽤애애애애애액!
너무 빠른 속도에 효시는 ‘삐이익’ 하는 소리가 아닌 밤하늘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고, 나는 그 비명 속에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는 소환한다. 꽌시 약왕!’
의동생의 할아버지 중원 팔왕 중 일인인 약왕 소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