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당(喜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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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처소 앞 벼랑 위.
저 멀리 바다 위로 달빛을 받으며 검은 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하염없이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떠나가시는 어머니를 배웅하기 위해서.
나야 밝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지만, 둘은 아닌지 아내와 영영이가 나를 바라보며, 떠나는 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뱃전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계세요. 노공.”
“얼굴이 슬퍼 보이세요. 가가”
그 말에 자리 잡고 난 기억 중, 처음 그분을 어머니라 불렀을 때 그분의 당황하던 모습이 잠깐 떠올랐다.
잠시 멀어지는 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영영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얼마나 슬퍼 보이느냐 영영아?”
“많이··· 요.”
내 물음에 대답하고, 옆으로 고개를 빼 내 얼굴을 살피는 영영이.
영영이에게 한번 미소를 지어준 후 아내를 향해 이야기했다.
“떠나시는 어머니께 계수(稽首)배를 올립시다. 부인.”
“예, 노공.”
“예, 가가.”
천천히 손을 겹쳐 멀어져가는 배를 향해 큰절인 계수배를 올리자, 아내와 영영이도 좌우에서 나와 같이 멀어지는 배를 향해 계수배를 올렸다.
그렇게 떠나가는 어머니를 향해 계수배를 드리고 한참을 엎드려있다가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배는 수평선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배가 완전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공, 그런데···.”
‘뭐지?’
약간 머뭇거리며 물어오는 아내.
무슨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싶어 아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궁금한 것이 있소?”
“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지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갑자기 궁서체 느낌 물씬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아내.
머릿속에서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뭐지? 설마 어머니가 마교 인이라는 것 때문에? 아냐 아냐. 그건 아닐 테고··· 설마!? 어머니가 마교인 이라는 사실을 장인어른께서 알게 되면, 강제로 이혼이라도 당할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일단 우리는 지금 전생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원수 집안 자식들이 결혼한 것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
우리끼리는 상관없지만, 혹시 장인께 알려지면, 이혼 이야기라도 나오는 건 아닐까 싶어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 건 둘만 좋아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가문과 가문의 연결이라는 느낌이 강하니, 이렇게 ‘알고 보니 가문의 원수였다’ 이러면, 강제로 장인의 손에 이혼당할 수도 있는 것.
정통 시칠리아 마피아 가문의 딸이 중국 흑사회 아들과 결혼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아내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노공, 아까 영영 언니에게 들었습니다만···”
장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비수처럼 훅 들어오는 영영이의 이야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영영이라고? 서, 설마 당매매라면?! 그럼 자신이 고백을 박은 사실을 아내에게 알린 것인가?!’
아내와 영영이는 친자매 같은 사이.
고백을 박고 보니 친자매 같은 아내에게 미안해, 마음에 부담감으로 실토를 할 수도 있는 일.
원래 죄지은 자는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이니까.
아내의 첫마디에 젖어 들어가는 등줄기와 관자놀이에 흘러내리는 식은땀.
땀을 훔치며 아내에게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 당 매매 말이요? 다, 당매매가 대체 무슨 말을?”
그러자 들려오는 아내의 질문.
“언니가 노공이 알려주신 죽은 자를 살리는 대법으로 노공을 살리셨다고 했는데, 앞으로 언니를 어찌하실지 묻고 싶어서 말입니다.”
대뜸 영영이를 어찌할 것이냐고 물어오는 아내.
아내의 물음에 영영이를 바라보니, 영영이가 무척이나 미안한 얼굴,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신발 끝으로 땅바닥을 후벼파고 있었다.
비전절기를 가르쳤으니 제자라도 삼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 분명하겠지만, 뭐라고 꺼낼 말이 없어 되물었다.
“어, 어찌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이요?”
그러자 타이르는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아내.
“언니가 여인의 수치심도 잊고 노공을 살리기 위해 정절을 허락했으니, 노공께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내도 나에게 구명의 은혜를 받았을 때, 감사함과 수치감 두 가지 마음이 들었던 것 같은데, 나와 영영이의 상황은 반대이긴 했지만, 당연히 여인의 정절을 걸고 나를 살렸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인 것 같았다.
장인 때문에 이혼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더니, 마이너스 1 이 아니고, 플러스 1.
1 인공호흡에 1 아내.
‘2 인공호흡 했으니 이제 2 아내라는 것인가?’
중원에서 응급구조사로 활동하면 결혼 걱정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럴 거였으면 인공호흡을 가르쳐줄 때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리고, 당한 건 나인데 왜 부끄러움은 영영이만의 몫이냐···’
영영이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싶어 영영이를 바라봤지만, 어느새 영영이 앞에는 발목 깊이의 구덩이만 두 개 파인 상태.
신발이 다 닳아 없어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영영이야 고백까지 했으니, 당연히 내가 싫지는 않은 모양.
나도 아내와 결혼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 한 두어 번쯤 영영이와 나 사이의 둘째 아이 이름까지 생각해본 경험이 있으니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도덕적으로 그리고 양심적으로 덜컥 받아들이기 애매한 상황인지라,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내뱉었다.
“아, 아니. 그저 그것은 그,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당매매의 숭고한 정신과 행위를 칭송해야 하는···”
그러자 급히 냉랭해지는 분위기.
주절주절 떠들어대다가 옆을 바라보자, 아내가 아주아주 나쁜 놈을 바라볼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영영이도 눈물을 글썽거리는 상태.
“어?”
당황해 멍청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자, 아내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영영이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백부님과 할아버님은 언니가 수치심에 죽어버리겠다고 하신다면 어찌하실지···.”
-꿀꺽
생각해보니 나에게 선택권은 없는 상태.
아니, 있긴 했다.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손녀 바보인 의조부, 아니 이제 앞으로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무튼 그분이 영영이가 죽겠다고 난리라도 친다면, 가만 계시지 않을 것은 뻔했다.
‘결국 내 앞길은 아수라장뿐이라는 것인가?’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하고 아내를 향해 물었다.
“부인은 괜찮겠소?”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영영이 언니라면 저는 좋습니다.”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아내.
하긴 생각해보니, 내가 전생의 감각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이 시대 여인들의 기준에서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맞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긴 했다.
유교 컬쳐에서 질투를 하는 것이 문제이지, 처첩을 맞는 것은 남자의 권한이니까.
더군다나 아내는 소처를 들이라 나에게 부탁했던 상태,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영영이라면 당연히 찬성인 모양이었다.
‘아내는 문제없고 그러면 남은 건 당사자인 영영이인가···.’
살짝 흐느끼는 정도인 영영이는 이제는 아내의 품에서 대성통곡하는 상태.
무척 서러운 모양이었다.
“흐아아아··· 끄흐윽···”
“언니, 괜찮아요.”
‘하긴 나 살리겠다고 그 무서운 마교의 장로를 상대로 목숨까지 걸었는데···.’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마교의 장로에게 뛰어들어 나를 구해내고, 동굴까지 나를 끌고 헤엄을 쳐 인공호흡까지 해서 나를 살린 영영이.
이제는 그녀의 마음에 대답해줄 때.
아내가 보는 자리에서 이러는 게 전생 기준으로 머릿속에 오류를 일으키고 있기에 내 방법으로 그녀에게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당 매매, 아니, 영영.”
“흑, 왜, 왜요!”
-훌쩍
서럽게 울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서럽긴 해도 삐진 것은 아닌지, 고개를 들어 대답하는 영영이.
영영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예전에 당가에 독왕 어른과 내기하고 얻은 소원이 아직 남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이 맞느냐? 의부님을 구하는 데 쓴 소원은 없던 것으로 해준다고 하셨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맵찔이 의조부 독왕 어른을 혼내주고 얻은 소원권을 의부를 구하려 당문의 금지에 들어가는 데 사용했지만, 의부님을 구한 공으로 그건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해주신다고 했었기에 그 기억을 떠올려 영영이에게 묻자, 영영이가 울먹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끄흑. 예? 그, 그런데요? 끅”
갑자기 지금 이 상황에 그 이야기는 왜 꺼내냐는 표정.
아내도 내가 갑자기 생뚱맞게 그 이야기를 꺼내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지금 그 이야기를 왜 꺼내냐는 듯.
‘하지만 뭐 나란 놈 이렇게밖에 이야기할 줄 모르니 어쩔 수 있나.’
둘의 시선을 받으며 이야기했다.
“내 무엇을 달라할지 생각이 났느니라.”
“뭐, 뭔데요? 히끅···”
“다음번에 의부님을 찾아뵙고 희당(喜糖)을 달라 청할 터이니 그만 울 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쑥스러워 얼른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어제부터 밤을 꼬박 새웠기에 잠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
아내와 영영이를 밖에 두고 안으로 들어와 침상 위에 누웠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몸이 비명을 질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드려맞아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몸을 침상에 누이자 곧바로 잠이 찾아왔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아내가 부딪혀 떨어져 나가 다시 대충 고친 문짝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삐거덕
“노공? 그러니까 노공의 말씀은? 어머 벌써?”
내 잠든 모습을 발견했는지 약간 놀란 목소리의 아내.
그리고 곧이어 영영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청아,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영영이가 아내를 향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내 말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아내.
“희당(喜糖)이 무엇이지요? 언니.”
“음··· 그야 혼례식에 신부와 신랑에게 던져주는··· 어?!”
희당이란 직역하면 기쁨사탕.
송 시대 전통 혼례에 집안의 어르신들이 신랑 신부의 품에 던져주는 달콤한 주전부리를 뜻하는 것.
사탕과 엿 또는 과자 같은 것을, 총칭하는 말인데.
결국 저 말은 내가 영영이 옆에 앉아 당가의 가주가 던져주는 사탕을 받겠다는 말인 것이었다.
그러니 영영이의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말.
“그, 그럼?!”
“예, 언니.”
“꺄아! 웁!”
기뻐 소리치다가 아내의 손에 입이 닫힌 영영이.
곧이어 둘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이제 저희 같은 지아비를 모시고 평생 같이 살 수 있겠어요.]
[그, 그래! 평생!]
아직 기억이 완전 대통합을 이루지 못해 이쪽 감성을 백프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결혼하면 시댁에서 평생 살아가면서 친정에는 죽을 때까지 가지 못하는 여자들도 많은 것이 이 시대.
그러니 아마 각자 결혼하면 다시는 못 볼 것으로 생각했는데, 같은 집에서 서로 평생 의지하며 살게 될지 모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둘이 기뻐하니 아무튼 됐나?’
당가로 가서 허락받아야 한다는 더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건 뭐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마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짹짹 짹
아침이 밝아 칼새들이 이쪽까지 날아드는지 제법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정신이 맑아지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을 내달렸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이튿날부터가 진짜라더니.’
전신 통증에 ‘이러다 진짜 골병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저리는 양쪽 팔.
뭔가 싶어 눈을 떠 양쪽을 바라보니 아내와 영영이가 내 팔을 한 쪽씩 차지하고 누워 잠이 들어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내가 왜 갑자기 어머니가 떠나자마자 영영이 이야기를 꺼내나 했더니.
이것 때문인 모양.
알고 보니 잠자리 때문인 모양이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이곳에서 흩어져지지 않으려고 내 처소에서 다 같이 자기로 했었는데, 어머니가 마교의 무사들을 끌고 사라지자 류가장 내부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
약왕은 어젯밤에 떠나시고 결국 우리 셋과 덕구만 남은 상태였는데, 이제 연기도 끝났으니 영영이를 멀리 떨어진 빈 전각에 혼자 재워야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아예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미소를 띤 채 달콤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둘.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는 둘의 볼을 살살 잡아당기며 생각했다.
‘그럼 이다음에는 어쩌지?’
당가로 가서 일단 영영이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느냐.
아니면 지금부터 천천히 이동해 북해빙궁을 찾느냐.
‘아무래도 그쪽이 먼저겠지?’
몸을 추스르는 데로 그곳을 먼저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