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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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고려 동란의 시기도 아니고, 갑자기 왕족이 밀항을 해왔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둘의 입을 통에 흘러나왔다.
‘지금은 고려가 동아시아의 깡패나 마찬가지인데, 왕족이 밀항? 고려에 반란이라도 있을 시기인가?’
지금은 금나라가 발호하기 전이니 고려가 송과 요나라 사이에서 난리 블루스 트윌킹을 추며 거만하게 굴어도 누가 뭐라고 못할 시기.
소동파 그 양반이 분노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는 부분인데, 밀항?
전쟁 중이거나 고려 내부에서 반역이라도 나지 않은 이상 왕족이 송으로 밀항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뭔가 이상했다.
더군다나 송나라의 반응도 밀항을 해와서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건 완전 국빈을 모시러 가는 느낌.
대단한 분들의 이야기에 끼어들기 조금 후달렸지만, 한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후달리긴 하는데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어르신?”
조용히 밥을 깨작거리던 내가 질문을 하자 쏠리는 시선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던가? 인제 보니 뭔지 확실히 알겠어.’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동생?”
말을 꺼낸 내가 셋의 시선에 긴장하자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오시는 형님.
형님의 목소리에 기원을 얻어 조심스레 질문했다.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어르신.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서 그런데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에게? 궁금한 것 말인가?”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전생에 군대를 다녀온 형님들이 농담할 때, 이등병이 사단장한테 질문하면 어찌 되는지 아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 형님의 농담을 이제는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바라보는 건데 이상하게 떨려···’
고양의 앞에 쥐가 된 느낌.
나는 평생 서민은 못 벗어날 모양이었다.
“예, 동중서문하장평사 아니, 동중서문하평장사 어르신.”
‘직책 뭐 이따위인지!’
긴장해서 직책을 실수하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냥 사마광이라 부르게.”
그의 대답에 멍해지는 정신.
‘누, 누구라고? 사, 사마?’
그의 이름을 듣자 잔뜩 쪼그라들었던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뜨거운 무엇.
고작 사마의의 자손에게 이렇게 졸아있었다니!
삼국지 마니아로서의 정체성과 제갈가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가 그지없었다.
원래 제갈을 보고 오줌을 지려야 하는 것은 사마놈들 이거늘!
“예, 사망광, 아니, 사마광 어르신. 끄릅···.”
“그래, 궁금한 게 무엇인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사마 집안과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지금은 일단 어느 선조님이 이 험한 중원으로 넘어오고 계시는지 알아보아야 할 때.
혹시라도 험한 일이라도 당하실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객지 나오면 고향 개새끼도 반가운 법.
정신을 차리고 사망광 아니, 사마광에게 물었다.
“예, 어르신 다름이 아니고 고려에서 왕족이 밀항을 해오셨다 하셨는데, 그게 대체 누구인지. 혹시 그분의 존함을 제가 살짝 들을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물음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오는 사마광.
“오? 혹시 고려 쪽에 아는 사람이 있나?”
“예? 아닙니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선조가 고려 분이셨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조금 관심이 가서 말입니다.”
그의 물음에 대충 둘러대자 그가 뭔가 이상한 대답을 해왔다.
“그분은 이름이 없으시네.”
“예?”
‘아니, 세상천지에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사마 씨라 제갈가인 나에게 일부러 저러는 것인가?’
사마 씨가 또 시비를 걸어오나 싶었는데,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불가의 귀의 하신 분이라서 이름이 없으시지. 법명이 뭐더라?”
그가 생각이 안 난다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옆에 있던 추밀사가 끼어들며 그를 향해 말했다.
“의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중서문하평장사 어른.”
“아! 그렇지! 의천(義天)이라고 하셨네.”
“의천!”
대한민국에서 역사 교육을 받았다면 잊을 수 없는 이름.
고려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
고려의 왕자이며 천태종(天台宗)의 창시자!
‘아하 그분이 이 시기에 이쪽으로 오셨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웬 밀항?’
중원에 가서 불교 유학했다는 내용은 배운 내용이었는데, 그것이 밀항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들어본 적 있는가?”
“예? 아, 아닙니다. 이름이 법명이 인상 깊어서 말입니다. 의로운 하늘이라니.”
“송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는데, 지금 밀주(密州)에서 고려관(高麗館)에서 묵다가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네.”
“아아, 그렇군요.”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오가다가 결국 식사는 끝이 났고, 선조님의 흔적은 찾은 터라 신기하고 반갑기는 했는데, 조상도 일단 내가 살아야 챙기는 것.
기다렸다 그분을 한 번쯤 만나고 싶었지만, 아내의 일이 훨씬 더 시급했다.
언제까지 그를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기에 요리사들이 몸을 추스르면 동경으로 떠나려 했는데, 사흘쯤 지났을까?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전령이 도착해 나 말고 높은 두 분이 당황할 소식을 전해왔다.
“어르신 고려의 왕자가 판교진에서 연운항쪽으로 이동했다 합니다!”
“뭐라? 어찌 이곳으로 안 오고?”
“아니, 이런 낭패가. 유교에도 정통하신 분이라기에 이쪽으로 모시라 했거늘. 어째서 그쪽으로···.”
뭔가 말을 들어보니 길이 어긋난 느낌.
며칠 있으면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본가가 있는 복주보다 고려와의 무역은 밀주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작년에 조정에서 그곳에 고려관을 세워주기까지 했다는 것.
그래서 의천 선조님이 그곳으로 도착한 것이라는데, 밀항 후 그곳에 도착해, 송의 조정에 편지를 올리고 안내인을 만나 연운항쪽으로 이동하신 모양.
이쪽으로 와서 제녕에서 운하를 이용하면 빠를 것인데, 연운항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니.
아마도 고려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한 달은 배를 타서 힘들었던지, 이제는 육로를 이용하실 모양이었다.
“길이 어긋난 모양입니다. 어르신.”
옆에서 이야기를 거들자 사마광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모양이네, 어째서 소식이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연운항으로 간 것이지?”
“예?! 누, 누구 말입니까?
”아, 고려 왕자를 안내하라고 소식을 보냈는데, 이자가 약속한 곳과 다르게 연운항쪽으로 갔구만.“
‘뭐지? 의천을 암살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가이드 인선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필 보내도 고려 알레르기 환자인 소동파를 가이드로 보냈다는 이야기.
어디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가서 죽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달갑지 않아 엿을 먹이겠다는 것일까?’
여행 내내 소동파가 시비를 걸어댈 것은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걱정에 빠져있는 사이에 추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럴 때가 아니구나. 길이 엇갈릴 것이 뻔하니 조정으로 돌아가 어디에 계신지부터 확인해야겠구나! 동경으로 되돌아간다! 다들 준비하거라!”
“예, 어르신!”
역시 군 쪽에 계신 분이라 그런지 추밀사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일행을 추슬러 동경으로 출발 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는 먹던 밥을 다시 먹기 위해 밥 수저를 들다 말고는 나를 향해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동경으로 간다고 했지?”
“예?! 아, 예. 처숙부님인 제갈각 어른댁에 가느라···.”
얼떨결에 그의 질문에 대답하자 그가 나를 향해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우릴 따르게. 우리가 타고 온 배가 있으니 동경까지 금방일세. 내 요리가 너무 맛있어 연성공에게 물어보니, 환영연 요리를 자네가 했다지? 밥값이라 생각하게.”
“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역시 군 쪽에 있는 분이라 그런지 화통한 양반.
여기 오느라 군선을 끌고 온 모양인데, 동경까지 빠르고 제일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여객선이 갑자기 나타난 상황.
“당연하지. 연성공의 의형제이고 내 며칠 밥도 얻어먹었는데, 밥값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감사합니다. 어르신!”
뭔가 앞길이 평탄해지고 있었다.
***
“형님, 그러면 꼭 서찰로 자주 안부를 여쭙겠습니다.”
“동생, 서찰도 물론이거니와 차주 들리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어떤 것이라도 이야기하게. 두 분도 제 아우를 잘 돌봐 주십시오.”
그간 잠시 피지컬만 뛰어난 중원 조폭들 또는 조금 부족한 장진 같은 애들과만 꽌시 관계여서 그랬던지, 중원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의 후예와의 꽌시 관계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세상에 제일 달콤한 것이 권력의 맛이라고 했던가?
형님의 부탁에 송나라 권력의 꼭대기에 서 계신 두 분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를 말입니까? 연성공께서 의형제를 맺으셨다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저희가 챙겨야지요.”
“그럼요. 연성공의 의형제면 공가의 사람. 자네도 어려워 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우릴 찾게.”
이 짜릿한 느낌.
겨울의 추운 날씨에 입으라고 형님이 만들어 주신 털옷의 따듯한 느낌만큼 온 세상이 따듯하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리고 두 분 어르신. 이 류청운 형님께 부끄러운 아우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하자 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연성공의 의형제니 저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요.”
“허허, 동경으로 돌아가면 간만에 제갈각을 한번 만나봐야겠군요.”
‘아름답구나! 세상은.’
형님은 자기 사람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인지.
눈치도 보지 않고 나를 팍팍 밀어주셨다.
‘그래, 이것이 진짜 밀어주고 끌어주는 중원 꽌시.’
그렇게 감격에 젖어 형님과의 이별을 마치고 도착한 제녕.
아내와 영영이를 데리고 군선에 오르자 추밀사가 딱 한 마디를 병사들에게 하명(下命)했다.
“연성공의 의형제이니 동경까지 불편함 없이 모시거라!”
“예! 추밀사 어른!”
그 모습에 아내와 영영이가 나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가, 꼭 벼슬에라도 오르신 것 같아요.”
“맞습니다. 노공, 벼슬에라도 오르신 것 같습니다.”
내가 큰 벼슬에라도 올라 대접받는 느낌이라도 든 모양이었는데, 벼슬길에 올라 봐야 정쟁이니 뭐니, 귀향 다니고 인생만 허비하는 것.
중원에는 책임은 없으면서 혜택만 볼 수 있는 꽌시가 있는데 벼슬이 대수랴.
‘벼슬 그거 굳이 할 필요 있나? 중원은 어차피 꽌시 하나로 끝인데.’
멀어지는 제녕의 항구에서, 곡부 쪽으로 형님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포권의 예를 취했다.
***
통제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이렇게 빨랐던가?
다른 배를 타고 올 때는 운하를 이용하는 배가 많은지라 가끔 서로 피해주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추밀사가 탄 배를 얻어타고 가자 운하는 우리 전용이나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깃발만 보고 좌우로 피해 가는 배들.
그렇게 비둘기호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가 고속철을 탄 느낌으로 동경에 도착해, 처숙부인 제갈각 어른이 계신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청아! 청운! 어쩐 일입니까? 영영 소저까지?”
우리가 도착했다는 말에 놀란 얼굴로 달려 나오신 숙모님.
“그간 잘 계셨습니까? 숙모님.”
“숙모님!”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에 가가의 소··· 흡!”
[영영아, 허락받기 전에는 그냥 의남매!]
[아, 아차!]
역시나 고모님께 엄청난 환영을 받았고, 영영이가 실수할 뻔했지만, 당가에 허락받기 전까지는 제갈가의 식구들에게도 의남매라는 포지션을 고수해야 했다.
그렇게 숙부님 댁에 도착해 여독을 풀며 닷새쯤 지났을까?
저녁에 제갈각 숙부님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씨근거리는 소동파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섰다.
의천을 에스코트하러 갔다더니 벌써 돌아온 모양.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내가 인사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문안으로 들어서며 분노의 외침을 토해냈다.
“왜, 왜 하필 내, 내가! 끄르릅!”
분노를 명백하게 참지 못하는 모습.
아마도 의천을 동경까지 안내해준 것이 크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 이 사람 조정 일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다던가?”
‘하긴 공무원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역시나 맞는 말만 하시는 숙부님,
그러나 소동파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투정을 이어갔다.
“그래도 왜 하필이면 나란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내가 그자의 먹을 것까지 챙겨야 한단 말인가! 에잉!”
얼굴은 의천을 데리고 오느라 고생을 좀 했는지 조금 그을린 모습이었는데, 한참 성질을 부리던 그가 잠시 후 나를 발견하고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반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오오! 자네! 다시 와있었구먼!”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나를 보자 조상님 만난 듯 반가워하는 소동파.
“오늘도 자네의 실력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는 화낸 사실도 잊은 것처럼 나를 향해 물어왔다.
역시나 요리를 좋아하는 양반.
미리 준비된 것은 없지만, 뭐 간단한 요리 정도야 언제라도 만들어 드릴 수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르신. 어떤 요리가 드시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뭐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나 묻자, 그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손바닥을 치며 물어왔다.
“아! 그렇지! 자네, 요리실력이 뛰어나니 할 줄 아는 요리도 많겠지? 혹시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제가 말입니까? 어르신을?”
“내 꼭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갑자기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다 말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소동파의 도움이라는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