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원(啓聖院)
.
‘후후, 고향의 다시마라.’
하수라면 이걸 그대로 끓여 국물을 내겠지만, 무림 화경급 요리사인 내가 그럴 수 있나.
흰 꽃가루가 곱게 핀 다시마와 마른 표고버섯을 곱게 빻아 조미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무를 넣어 끓인 물에 그 다시마와 표고버섯이든 조미료를 넣어 육수의 작퉁인 채수를 먼저 끓였다.
다시마를 오래 삶으면 국물이 조금 텁텁해질 수 있지만, 내가 끓일 것은 된장찌개니 살짝 텁텁한 것이 된장찌개의 진한 풍미를 느끼게 해줄 터.
-후루룩
‘역시나 맛이 깊구나.’
충분히 끓은 채수를 한번 맛을 보자 느껴지는, 다시마에서 나온 글루탐산과 표고버섯에서 나온 구아닐산이 어우러진 깊은 맛.
여기에 고려표 된장과 두부, 표고버섯, 배추, 양파를 넣어 된장찌개를 끓였다.
-바글바글
뚝배기를 대신할 도자기 냄비에서 끓어 올라오는 된장의 깊은 향.
거기에 더해진 배추의 달큰한 향과 양파와 표고버섯이 어우러진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맛있는 냄새.
‘삼겹살 구워서 같이 먹으면 밥 한 그릇 뚝딱인데···.’
군침이 꿀꺽 넘어갔지만, 일단 맛보기는 영영이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자, 영영아 한번 맛을 보거라.”
된장찌개를 작은 그릇에 조금 덜어 아궁이 옆에 앉아 불을 쬐며 요리 만드는 것을 구경하는 영영이에게 내밀었다.
“알겠어요. 가가”
기다렸다는 듯 내민 그릇을 가져가는 영영이.
-호륵
조금 뜨거운 된장찌개의 국물을 영영이가 조심히 들이키고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어제도 맛있었지만, 이것도 정말 맛있어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반응은 아닌 것.
“영영아, 이걸 먹고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란다. ‘그래. 이 맛이야.’라고 다시 한번 해보거라.”
된장찌개를 맛본 여자가 반드시 해야만 할 것 같은 문장.
한국인의 깊은 영혼이 담겨있는 그 문장을 알려주자 영영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래? 이 맛이야?”
“그래, 그 맛이지.”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해야 해요?”
“원래 해대(다시마)를 먹으면 그리 해야 하느니라.”
“네?”
내가 가르쳐준 것이 무슨 말인지 생각에 빠진 영영이를 뒤로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반찬으로는 콩나물을 삶아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하고 깨를 뿌려 마무리한 콩나물무침.
거기에 강남에서 배를 타고 와 좀 시들긴 했지만, 시금치도 구할 수 있어서, 이것으로 시금치 무침도 만들었다.
두부도 구워 양파의 싹과 양파, 간장을 넣은 양념장을 위에 뿌렸다.
마지막으로 소금에 절인 무.
한국인이면 김치니까, 이 시대 흔한 재료로 승려들이 먹을만한 느낌으로 만들어본 것이다.
김치보다는 절임에 가까운데 생강즙을 넣어 향만 살짝 입혔다.
그렇게 차려진 한 상.
의천을 맞이하는 환영연에 의천과 그 제자에게만 나갈 특별식.
모든 음식이 완성돼 저녁 식사 자리로 가져가자, 퇴청한 제갈각 숙부님과 소동파가 나를 맞았다.
“오, 이것이 고려의 음식인가? 건강에 좋은 채소로만 만든 음식이구만.”
특이하게 송나라 높은 분들 사이에는 채식이 건강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는데, 그래서 수도인 개봉에 채식 전문 식당이 성업하고 있을 정도.
그런 이유로 사찰 음식인 채식이 저녁 식사로 준비되니, 다들 반기는 눈치였다.
다만 고려취에 취약한 소동파만 빼고.
“고려취는 언제 맡아도 강하구만. 크흠.”
“그러지 말고 한번 드셔 보시지요. 맛이 특별합니다.”
“이상하게 고려취에는 적응이 안 돼서 말이지.”
“이 친구 일단 먹어보게, 냄새만 좀 진하지. 먹으면 또 다르다니까.”
“어디 그럼 한번.”
그렇게 막 저녁을 시작하려고 할 때, 밖이 좀 소란스럽더니 하인 하나가 밖에서 안쪽을 향해 외쳤다.
“어르신 동중서문하평장사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급히 나와 보셔야 하겠습니다!”
“동중서문하평장사댁에서?”
우리가 낮에 들렸다는 재상인 사마광의 집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
‘설마? 아니겠지? 맞으면 아니라고 그냥 우기지 뭐.’
혹시라도 요리의 의미를 알아채고 항의라도 해보나 싶어, 제갈각 숙부와 소동파를 앞세우고 쭈뼛거리며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우리가 문밖으로 나서자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명의 하인.
한 명은 분명 제갈가의 하인이고, 하나는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처음 보는 남자였다.
‘울었어?’
항의하러 왔으면, 화가 나서 높은 사람이 오거나 해야 했는데, 하인 혼자 덜렁 도착했고 명백히 슬프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
그리고 그 얼굴에 눈물이 얼룩진 남자가 우리를 확인하자마자 땅에 엎드려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중서문하평장사께서 훙(薨) 하셨습니다! 크흐흑!”
“뭐 뭐라! 훙! 이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분명 아까 퇴청할 때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훙이라니! 무슨 말인가 그게! 훙이라니!”
뭔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외치는 두 분.
‘훙이 뭐냐? 아무래도 눈물을 짜는 걸로 보아서는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얼떨떨한 표정으로 셋을 바라보자 눈물 가득한 얼굴로 사마가에서 온 하인이 대답했다.
“퇴청하시고. 사마결 공자와 저녁을 같이 드시다 말고, 갑자기 쓰러지셔서는···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마광이 죽었다고?’
사마광이 정말 사망광이 되어버린 현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니 뭔가 느낌이 쌔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다가 죽었다니 뭔가 꺼림칙한 느낌.
‘서,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뭔가 좀 꺼림칙한 저녁이었다.
***
날이 밝자마자 숙부님은 허겁지겁 상갓집을 찾아가셨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라의 재상이자 자기 상관이 좋은 곳으로 가버렸으니, 공무원인 숙부님은 당연히 필참.
나야 뭐 서로 경조사까지 챙겨줄 정도로 사마결과 친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재상집이라 손님도 많을 텐데 나까지 한몫 거드는 건 아닌 것 같아 이틀 후 있을 환영연에 낼 요리나 점검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내, 영영이와 요리를 점검하고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상갓집을 다녀오신 숙부님께서 사마결이 숙부님을 통해 전해달라고 한 이야기가 있다며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자네 덕분에 그래도 마지막에 훌륭한 요리를 드시고 갈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전해달라더군.”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 뭐 그런 건가?’
숙부님께서는 사마결의 아버지는 먼 곳에 부임 중이시라고 했으니, 혼자 장례로 경황이 없을 텐데 인사까지 잊지 않는 사마결.
확실히 괜찮은 놈이긴 했다.
혹시나 내가 만들어 준 음식의 의미 때문에 화병에 쓰러진 건 아닌가 싶었는데. 감사 인사까지 전해오는 거로 봐서는 그건 아닌 모양.
나도 꺼림직한 기분은 털어버리기로 했다.
‘괜히 쫄아 있었네.’
“그렇습니까?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나저나 조정도 정신이 없겠습니다?”
“이를 말인가? 앞으로가 걱정이네. 이제 구법당의 기둥이 저리 가셨으니, 조정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구만.”
앞으로의 정세 걱정에 숙부님께서 한탄하고, 나도 착한 사마결을 위해 선행을 조금 베풀기로 했다.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오늘은 자기 전에 십자님께 반각쯤 기도를 드리기로 결심한 것.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오늘 밤에는 사마결을 위해 기도 한 번 때려야겠구나.’
***
사마광의 사망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틀 후 의천의 환영연은 진행되었다.
계성원(啓聖院)이라고 해서 나는 무슨 황궁의 건물이라 황궁 구경을 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계성선사라고 불리는 절.
송 태종의 탄생지를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지 위에 세워진 기념 사원이라고.
다만 황궁의 서문 근처에 있는 꽤 유명한 절인지라 아내와 영영이도 구경하고 싶어 했는데, 오늘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큰 행사가 열리니 일반 참배객은 받지 않기 때문.
“치, 그래도 가보고 싶은데.”
요리를 하기 위해 출발하는 나를 향해 영영이가 아쉽다고 투정했고,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셋이 같이 가자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짜증을 냈겠지만, 이제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투정 부리는 모습도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영영아 오늘은 힘들 듯하니, 나중에 셋이 같이 가자꾸나.”
“꼭 이에요! 그럼 잘 다녀오세요!”
약속 한 번에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 기분이 풀린 영영이.
영영이의 인사 뒤로 아내의 인사가 뒤따랐다.
“노공, 잘 다녀오세요.”
“알겠소. 부인. 그리고 영영.”
“그나저나 요즘 덕구가 안 보이는데 이놈 어디 갔는지 보았소?”
“글쎄요. 밥 먹을 땐 나타나던데.”
나가는 길에 덕구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려고 했으나, 덕구 녀석은 고향에 돌아왔다고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지 보이질 않았고, 그렇게 소동파가 보낸 유교자에 올라타 아침 일찍 계성원으로 향했다.
황궁의 서문에 인접한 계성원은 황제가 머무는 대경전에 인접해 있었는데, 상당히 규모 있는 사찰이었다.
솔직히 개봉의 사찰이라면 대상국사나 개보사가 더 유명한데, 왜 이곳에 의천을 묶게 했나 싶었더니 전단(栴檀) 석가상이 모셔져 있는 중원의 몇군데 안 되는 절이며, 황제가 머무는 곳 가까운 곳에 묵을 수 있는 국빈 대우를 해준 것.
존경하는 형님 중 한 분이지만, 전단 석가상이 가지는 의미는 잘 모르겠기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소동파를 따라 요리하는 곳으로 곧장 향했다.
이미 연회로 인하여 사람들은 인산인해.
환영연이라더니 승려들부터 고관대작들까지 수백 명의 사람이 아주 경내에 바글바글했다.
“자, 이쪽이네.”
그렇게 소동파를 따라 사찰의 한쪽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깔끔하게 같은 옷으로 차려입은 이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광경.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요리의 향.
여기저기 채소를 볶고 찜을 하고, 굽고 튀기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공겸 형님 댁에서도 이미 환영연은 한번 치러봐 그러려니 했는데, 여긴 요리를 만드는 사람만 이백여 명.
황궁의 스케일에 지려버릴 것 같았다.
규모에 놀라 소동파에게 물었다.
“원래 이리 사람이 많습니까?”
“보통 큰 연회에 요리하고 요리를 나르는 사람은 천오백 명쯤 되지. 오늘은 한 사백 명쯤 될까? 고기 요리를 주로 하는 이들이 오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중원은 역시 대가리 수.
내가 잠깐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에 소동파가 담당자를 찾기 시작했다.
“아, 잠시만 기다리게.”
그리고 이곳의 담당자인듯한 관리를 찾아 조금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곧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도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요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촤아아아
-치이이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굽거나 볶거나 찌는 소리.
거대한 주방에 연회 요리들이 준비되어 환영연 장소로 연거푸 날라지고, 그사이 내가 만든 요리도 의천과 그 제자의 상으로 옮겨졌다.
나야 뭐 찌개 끓이고 몇 가지 반찬을 만드는 정도니, 조리 시간은 한 시간인 반 시진 남짓.
요리를 끝마치고 멀리서나마 의천이 대체 어떻게 생긴 분인지 보려 했지만, 관병들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벼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 귀빈이 있는 자리에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
더군다나 황제가 올지도 모른다니 경계가 아주 삼엄했다.
‘뭐 어쩔 수 없나. 잘 있다가 가십쇼 선조님.’
마음속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된장과 호기심 때문에 허락하긴 했지만, 아내의 일도 급했기 때문.
뭐 오늘 황제의 연회 요리를 하면서 얻은 이득이라면, 소동파의 고마움 정도.
개뿔 아무것도 없는 분이고, 시 하나는 잘 짓는 분이라서 나중에 시나 한수 지어 달라면 모르겠지만, 실질적 이득은 전혀 없었다.
소동파와 의형제를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처의 숙부와 의형제니, 의형제가 된다 해도 개 족보 탄생일 뿐.
그렇게 연회가 진행되는 장소를 벗어나 아까 타고 온 유교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까 황궁의 요리사들과 요리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조선이나 대령숙수가 벼슬이 있는 직책이지. 송나라 대령숙수인 선공(膳工)은 그냥 평민으로 이루어진 국왕 직속 조리사들.
알고 보니 벼슬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심지어 숫자도 수백 명이라고.
‘당가에서 구라를 쳤던 그놈 그거 어찌 되었나?’
예전에 간 크게 당가에서 구라를 쳤던 그놈이 생각났다.
그렇게 그놈 그거, 당가에서 열리는 인체의 신비를 탐구하는 연구에서 어떤 체험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유교자에 오르고 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 공자! 류 공자!”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까 나를 조리대로 안내했던 요리 담당자와 웬 스님 하나가 나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달려오는 자에게 물었다.
“예? 저를 부르셨습니까?”
“헉헉. 무슨 발걸음이 이리 빠르시오.”
“하하, 그냥 뭘 좀 생각하며 걷다 보니, 그런데 어쩐 일로?”
“고려에서 오신 스님의 제자분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네.”“예? 고려에서 오신 분이요.”
고려에서 오신 분이라면 의천의 제자.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이 의천의 제자인 모양.
‘오, 의천의 제자! 그런데 무슨 일이지?’
요리 담당자의 옆을 따라온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나를 향해 합장하며 인사를 해왔다.
“아미타불. 의천 스님의 제자 수개(壽介)라고 합니다.”
수개라는 분은 중국어로 물었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에 우리 민족의 언어로 대답하기로 했다.
「아, 안녕 하십니 까아? 만나 뱁게 되어. 반갑 씁니 다아.」
‘뭐냐? 내 한국어 실력 왜 이따위로 너프를 먹었냐?’
그러나 선조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반가운 내 입에서 흘러나온 한국어는 꼭 조선족 같은 말투였다.
아무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과 육신의 혀가 춘장에 너무 절여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