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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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역시 시주께서는 고려분이 맞으셨군요. 부처님의 보살핌입니다.」
내 대답에 반갑게 고려말로 대답하는 수개라는 분.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한국어로 대답할 수 없었다.
왠지 보이스 피싱조직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충격에 말을 이을 수 없었기 때문.
선조님을 대상으로 포이스피싱을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왠지 김미영 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할 것만 같은 충격전 현실.
‘아니, 이게 맞냐? 아예 못하던지. 이 발음은 아니잖냐? 선조님을 만났는데 왜 말을 못 하겠냐!’
“시주님?”
선조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보다는 내 말투에 대한 충격이 더 커 잠시 정신이 출타할 뻔했지만, 충격에서 빠져나와 얼른 중원어로 대답했다.
“예, 어, 어머니가 고려 분이셨지요.”
“오오, 그러시군요! 어머니가 고려분이시면 고려분이 맞지요. 고려말도 훌륭하시고.”
객지 나오면 고향 똥개도 반갑다는 우리 속담처럼, 상대방도 역시나 무척이나 기뻐하는 모습.
내 김미영 팀장 같은 고려말도, 하프고려인 이라는 설명에도 그는 그 정도면 고려인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어찌 되었든 무조건 고려인이 맞는다는 그런 느낌.
반가워하는 그를 향해 왜 나를 따라왔는지를 물었다.
“그나저나 저를 어찌?”
“아, 이런. 고려분을 만나 반가운 나머지···. 제가 시주님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승님께서 중원에 도착해 모처럼 식사를 맛있게 하셨다며, 분명 고려인이 요리했을 것이라고,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선물을 전하라 하셔서요. 역시 스승님의 말씀이 맞았군요.”
‘선물? 오오.’
왕족이라 그런지 씀씀이가 크신 모양.
한 끼 맛있게 먹었다며 선물까지 보냈다는 말에 역시 우리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선물로 뭘 주려나 기대할 때, 그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꺼내 나를 향해 내밀었다.
“중원에서는 겨울이라 맞지 않는 선물이긴 하지만, 고려에서는 철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기도 하거니와 여름에는 요긴하게 쓰실 겁니다.”
“오, 이것은?”
그가 나에게 선물한 것은 부채.
다름 아닌 접선(摺扇)이었다.
접선이란 전생에도 관광지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손을 촥 하고 털어 접거나 펴는 부채를 말하는데, 고려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소동파 양반도 고려의 부채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 고려의 명품 부채.
이 시대 고려 수출품 중 수위를 다투는 명품인 것이었다.
송 시대 중원에서는 만들 수조차 없으며, 전생에 관광지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메이드인 중원산과는 전혀 다른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런 물건.
더군다나 왕족인 의천이 준다면 그런 접선 중에서도 최고의 물건일터.
두 손으로 공손히 부채를 받아 들자 느껴지는 묵직함과 펼치자 드러나는 멋들어진 외관.
대나무 부채를 생각했는데, 묵직한 무게에 다시 한번 살피니 속살은 대나무가 맞았지만, 겉대가 통으로 은!
‘은?!’
무게 때문에 계속 부치는 건 힘들 것 같지만, 가오는 확실히 살 것으로 보이는 대단한 모습.
감사 인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 선조님 통도 크시지.’
“이리 귀한 선물을. 감사합니다! 스님.”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배 여행에 시달리시고 여정을 이어가시느라 기운이 없으셨는데, 고려의 음식을 드시니 모처럼 기운이 나신다며 무척이나 감사해하셨습니다.”
대충 때려 맞춰 만들었는데, 천 년 전인 지금의 고려나 내가 살았던 전생 현대나 나물 반찬이나 된장찌개는 크게 바뀌지 않은 모양.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어머니의 고향 음식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하시는 일마다 잘되기를 이 수개가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선물 감사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뵙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 나서는데, 그의 물음이 들려왔다.
“시주님. 그러고 보니 제가 시주님의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시주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이런. 저도 반가운 나머지. 류청운. 제갈세가의 류청운이라고 합니다.”
***
“노공, 고생하셨습니다.”
“다녀오셨어요? 가가.”
-촥
환영연 자리에서 돌아와 앞머리를 슬쩍 쓸어 넘기며, 반가워 인사를 하는 아내와 영영이의 앞에서 부채를 펴들었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부채가 펼쳐지자 깜짝 놀라는 둘.
“어멋. 가가, 그게 뭔가요?”
“노공, 그건?”
부채로 얼굴을 슬쩍 가렸다가 다시 ‘탁’하고 접으며 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병신 같지만 멋있었겠지?’
가장으로서 오늘의 썰을 풀지 않을 수 없는 법.
둘에게 약간 거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후후, 고려의 왕자께서 내가 만든 음식에 만족하셨다며, 선물을 하사하셨다오.”
“어머! 이게 그럼?”
“그렇소. 고려 ‘왕자’께서 그 제자를 통해 하사하신 고려의 ‘접선’.”
“어머어머어머. 멋있어요. 가가!”
“이건, 은으로 만든 것이군요?”
“무척 정교합니다. 저희 가문에서 만드는 암기처럼.”
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고 솟아오르는 양어깨.
오늘도 부채 하나에 나는 멋진 가장이었다.
***
쉬는 것도 쉴 만큼 쉬었고, 급한 일도 모두 처리했으니 일을 서두를 때.
이미 장인께는 제갈세가로 가는 인편을 통해 북해빙궁의 위치를 부탁했기에 오늘은 거지들을 만나야 했다.
“이 편지를 걸륜 개봉 총타주께 전해주게. 아주 은밀히 전해야 하네.”
제갈가의 무사 중 제갈천 숙부께서 추천한 인물을 골라 은밀히 걸륜 총타주에게 서찰을 전해달라 부탁했다.
물론 다른 거지들이 바글바글한 개방 총단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걸륜 총타주가 구걸을 나올 때 적선하는 척 몰래 건네라고 한 것.
거지들은 어지간해서는 직접 구걸을 나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걸륜이라는 그 사람 아니, 그 거지는 개봉에서 구걸로 꽤 유명한 인물이라 반드시 구걸을 나온다고.
“알겠습니다. 공자님!”
내 부탁을 받은 무사가 결연한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그렇게 하루쯤 지났을까?
날씨가 추운 터라 나와 아내가 묵는 처소에서, 아내, 영영이와 따듯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각부님, 호륜 무사가 뵙기를 청합니다.”
“오, 그래 들라고 하게.”
-달칵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제갈가의 무사 복장이 아닌, 종이로 된 평민들의 외투를 걸친 다부진 표정의 남자.
하루 만에 나타난 무사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거지 놈들이 언제 구걸을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끼니도 거르며 잠복근무를 한 듯한 모습.
그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접각부님, 은호륜, 부탁하신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 그래 일은 어찌 되었나?”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아내와 영영이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무사.
제갈각 숙부께서 믿을 만한 사람이라더니, 정말 확실한 사람 같았다.
저 시선은 아내들에게 알려도 상관없냐는 묵언의 물음일 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의 입이 열리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공자님. 총타주께서 오늘 밤 은밀히 찾아오신다며, 자시에 제갈가의 후원에서 뵙자고 하십니다.”
아마, 총타주가 말한 제갈가의 후원은 제갈천 숙부님 댁의 후원을 이야기하는 것일 터.
거기에 자시라면 밤 11시에서 1시 사이.
무사의 보고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네. 고생한 것 같구만, 부엌에 이야기해둘 테니 먼저 요기하고, 가서 쉬시게. 나중에 이걸로 술이나 한잔하시고 말이야.”
고생한 무사에게 은자를 세 냥 꺼내서 전하자, 그가 반색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제갈가의 명이니 이런 것까지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그리고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쓰나. 이 추운 날 심부름까지 했는데, 삯은 치러야지. 다만 무엇을 했는지는 절대 비밀이네.”
원래 은자의 무게만큼 입도 무거워지는 법.
모르는 사람이라면 은자로 수십 냥을 먹여야 했겠지만, 제갈각 숙부께서 믿을 만한 무사라고 했으니, 이 정도 기름칠이면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접각부님.”
나에게 전달할 이야기는 다 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쥐더니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짧은 음성을 내뱉었다.
“아!”
기억이 나지 않았던 아직 남은 말이 있는 모양.
“무슨 말이 남았는가?”
무슨 못다 한 이야기가 있냐고 묻자 쭈뼛거리는 무사.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뭐야? 생각해보니 은자가 부족한 느낌인가? 분명 제갈각 숙부께서 믿을 만한 놈이라고 하셨는데?’
좀 더 기름칠해야 하나 싶어 소매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은자가 좀 부족한가? 허허.”
“아, 아닙니다. 접각부님! 오, 오해십니다. 저 은호륜 제갈가에 도움을 받아 무사가 된 후,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자.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 말에 들려오는 당황한 목소리.
당황해 고개를 숙이고 절대 아니라고 항변하니 은자가 부족한 것은 분명 아닌 느낌.
“그럼 무엇인가?”
대체 뭐 때문에 그러나 되묻자 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것이 총타주께서 밤에 만나니 요, 요깃거리나 좀 준비해달라고···.”
그의 대답에 짜증이 확 몰려왔다.
‘아무튼 거지새끼 아니랄까 봐 진짜!’
“아, 알겠네.”
정말 거지 같다고 생각하며, 무사에게 화난 것은 아니지만, 쌀쌀맞게 대답하자 무사가 한층 더 난처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 접각부님. 자기 혼자 올 것이니 야, 양고기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거지새끼들이 주는 대로 처먹을 것이지. 참 지랄맞기도, 지랄맞구나.’
“크흡. 그래 알겠네. 수고했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신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나가는 무사.
정말 거지들이랑 엮일 때마다 흰머리가 하나씩 늘어나는 것 같았다.
정말 아내 일만 아니면 상종하고 싶지 않은 거지들이었다.
***
-데엥 데엥
동경의 여러 절에서 자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초겨울의 밤하늘로 퍼져나가 결국 송의 수도 동경 외곽의 큰 폐가에 도착했다.
“켈륵켈륵.”
“에이취”
-흘쩍. 후르릅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거지들의 기침하는 소리와 콧물 삼키는 소리.
따듯한 여름이라면 다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겠지만, 초겨울 개방 총타는 모닥불의 그을음과 거지들의 몸 냄새가 가득 찬 구역질 나는 공간이었다.
낡고 구멍 난 폐가를 돗자리를 짜 구멍을 막고, 바람을 피해 집 안 여기저기 불을 피웠으며, 따듯한 짚단과 갈대를 꺾어와 그 곁에서 잠든 거지들.
자시를 알리는 마지막 종이 끝나자 그런 옹기종기 붙어 몸을 웅크린 거지들 사이에서 한 인영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다들 잠들었겠지?’
몸을 일으킨 사내는 초개 걸륜.
이 개방 총타의 수장.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걸륜은 잽싸게 떨어져 나간 문짝 대신 걸어둔 돗자리를 걷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입구에 잠든 거지가 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맛있는 요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잘못하면 늦겠구나. 어서 서둘러야지.’
맛있는 요리를 대접받았던 식룡인 제갈가의 접각부가 만나기를 원했고, 자신은 약속 장소로 제갈가를 선택했다.
부탁도 들어주고 배도 채우기 위해서.
걸륜의 품 안에는 식룡이 원하는 정보가 적힌 서책이 품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꼬르륵
잔뜩 먹을 생각에 저녁도 거른 상태.
경공을 펼치니 허기가 몰려왔다.
‘어른 가야겠구나. 경공을 펼치니 배가 더 고프구나.’
그렇게 걸륜은 재빨리 경공을 펼쳐 개봉의 성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벽 한쪽에 도착해 자갈 하나를 주워 들고는 망루 반대쪽을 향해 냅다 던졌다.
-탁! 탁탁!
“누, 누구냐!”
한밤중 성벽 위로 던진 자갈이 큰 소리를 내고, 병사들의 이목이 몰린 틈을 타 성벽 여기저기 솟아오른 돌을 잡아채며 성벽 위로 오른 걸륜.
방주가 다른 무공은 몰라도 경공하나 만큼은 인정하는 걸륜인지라 이정도는 아주 손쉬웠다.
그렇게 성벽을 오른 걸륜은 곧바로 몸을 날려 근처 지붕으로 또 지붕으로 몸을 날렸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그렇게 도착한 제갈가의 근처.
제갈가의 담장 근처를 지나던 걸륜의 신형이 사라지고, 제갈가 안쪽에서 걸륜의 신형이 다시금 나타났다.
누군가 봤다면 귀신이라고 할 것 같은 몸놀림.
정말 바람같이 도착한 동경의 제갈세가였다.
‘뭐 이정도야 애들 손에서 수당 뺏기만큼이나 쉽지.’
걸륜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다시금 그림자 속에 숨어 순찰하는 제갈가의 무사들을 피해 후원으로 다가갔다.
이제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원 담장을 넘기 직전.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지듯 시퍼런 불꽃 두 개가 피어오르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르르릉!”
‘뭐! 뭐냐! 영물이라도 있단 말인가!’
갑자기 나타난 짐승의 눈동자에 당황한 걸륜.
그가 당황해 뒷걸음을 치자 두 개의 불꽃이 쭉 하고 늘어나는 것 같더니, 걸륜 쪽으로 화살같이 쏘아졌다.
‘이, 미, 미친!’
재빨리 경공으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둠 속에 번뜩이는 두 개의 눈빛은 자신보다 빠르게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날아와 걸륜의 종아리를 물어뜯었다.
“와앙!”
[꺼흡!]
-찌이익
겨울이라 이것저것 많이 껴입은 상태라 아직은 괜찮았지만,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종아리에 짐승의 이빨이 닫는 순간.
걸륜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제일 잘하는 것을 하면 되니까.
구걸.
다만 이번 구걸은 많은 종류의 구걸 중 목숨 구걸일 뿐이었지만.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한밤중 송의 수도 동경의 고관대작들만 산다는 구역에서 걸륜의 목소리가 밤의 고요를 찢고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