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장(佛跳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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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단에 비하면 용산구 해방촌의 백팔 계단은 평지나 마찬가지.
칠십 도 이상의 각도로 보이는 계단이 정상 쪽으로 쭉 뻗어 시원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천국으로 나를 인도하는 것 같은 계단.
객잔에 돌아가면 만자를 떼어버리겠다는 결심 때문에 화라도 나셨는지, 그럴 거면 그냥 천국으로 가버리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계단이었다.
줄지어 저 구름 위 하늘로 닿아있을 것 같은···.
‘너 좋다는 천국까지 연결된 계단이야.’
마치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
차게 식은 눈으로 고개를 돌려 팽유성을 바라보자 그가 나를 보고는 씩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웃어? 이 새퀴가!’
가끔 영영이가 짓는 얄미운 표정.
영영이의 나쁜 것은 다 외가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계단이 끝이 어디인지.
“패, 팽형, 혹시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팽형 걸음으로 말고 여기까지 왔던 제 걸음을 생각해서 대답해주십쇼.”
얄미운 면상을 향해 질문하자 팽유성이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를 향해 대답했다.
“반 시진쯤? 그 정도 가시면 될 겁니다. 눈이 없으면 한 식경이면 갈 테지만.”
한 시간만 올라가면 된다는 이야기.
눈이 없으면 삼십 분이라는 이야기는 별로 멀지 않다는 말이었다.
희망스러운 소식이지만, 이곳으로 오는 내내 나에게 한 거짓말로 팽유성은 이미 양치기 소년이나 마찬가지.
그의 신용등급은 류청운, 류디스 기준으로 Ca 디폴트에 아주 가까운 상태에 부정적 평가까지.
국가부도 직전 단계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신빙성과 신뢰도를 잃었기에 그를 삐뚜름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팽형, 어차피 우리가 한 가족이 될 사이인데, 저는 팽형과의 사이에서 그 신뢰랄까? 믿음이랄까? 그런 것을 두고 고민하고 싶지는 않군요. 가족을 믿지 못한다면, 대체 이 넓고 험한 중원에서 누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부디 이번에 말씀해주신 것은 틀림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렴요.”
‘우리 사이에 구라는 치지 말자고.’
그렇게 내 삐뚜름하고 싸늘한 말이 끝나자, 내 말의 뜻을 알아챈 듯 호쾌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팽유성.
“하하하!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믿으셔도 됩니다. 여기 아직 무공을 익히지 않은 동자승들도 반 시진이면 오르니, 설마 류형이 오르지 못하겠습니까? 삼척동자도 오르는데 류형이 못 오를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급은 이리 주십쇼. 그거 매고 올라가다 뒤로 넘어지면 안 되니까요.”
그나마 나를 생각한다고 다시금 내 급을 넘겨받겠다는 팽유성.
팽유성은 내가 쭈뼛거리며 급을 넘기자 그것까지 받아들고 곧장 날랜 걸음으로 계단 위쪽으로 향했다.
“먼저 갑니다!”
그리고 나도 이어서 그가 낸 발자국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걸 동자승들도 반 시진이면 오른다고?’
뭔가 조금 속는 느낌이 들었다.
***
남미의 잉카, 아즈텍 사원은 아주 경사가 높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이게 다 이유가 있단다.
감히 하찮은 인간이 신을 뵙는데, 어디 두 발로 걸어 올라오냐는 그런 이유.
겸손하게 네발로 기어 올라오라는 뜻이라고.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라는 드립이 떠오르는 그런 느낌.
그래, 그런 이유에서인지 소림에서 구 년간 면벽 수련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달마가 기거했었다는 동굴로 찾아가는 길은, 두 발로는 갈 수 없는 험난한 길이었다.
솔직히 중간에 쉬다 천천히 오르고 싶었지만, 무공을 익히지 못한 동자승들도 오른다는데 내가 늦는다면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것.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려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딱 반 시진.
팽유성의 말대로 달마동 앞에 도착했다.
“헉헉···. 아이고 죽겠구나.”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멈추고 푹신해 보이는 눈 위에 엎어지자,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의 발.
볼에 차가운 눈을 느끼며 슬쩍 시선을 위로 올리자,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팽유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류형 대단하오. 무공을 익힌 사람도 이리 눈이 온 날에는 한 시진이 힘들 텐데,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몸으로 이리 늦지 않게 오르다니. 무공 익히는데 좋은 신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투지는 대단합니다! 우리 가문 사위였으면, 아버지께서 그 투지에 우리 무공을 가르쳐 주신다 하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지능이 너프되는 팽가의 무공 따위는 얻고 싶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다시금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새끼 그럼 결국 구라였던건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를 빨리 오르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모양.
눈을 감고 멀리 계신 외숙모님을 향해 마음속으로 외쳤다.
‘외숙모님 아들 잘 두셨습니다! 제갈가의 사위에게 사기를 치는 팽가 아들이라니···.’
그렇게 다시 한번 신뢰를 저버린 팽유성의 신용 등급을 국가부도로 정하고, 외숙모님을 향해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엎어져 있자, 웬 초등학생 정도되 보이는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시주님.”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귀엽게 생긴 동자승 하나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동자승이라도 스님은 스님이라 예의를 지켜야 했지만, 손발이 발발 떨려 움직일 수 없기에 고개만 살짝 들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스님. 잠시만 이리 있겠습니다. 오늘 길이 험해 그런 것이니 잠시 이리 있으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아이고 힘들다.”
“그,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저는 어디 몸이라도 아프신 줄 알고···. 그런데 두 분 다 현원법사님을 찾아오시는 겁니까?”
동자승이 질문하자 팽유성이 나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앞으로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말할 시간에 좀 더 쉬라는 뜻인 듯.
“저는 아니고 저분이 현원법사님께 물음을 구할 것이 있다고 해서요.”
“아, 역시. 그런데···.”
머뭇거리는 동자승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동자승.
팽유성이 동자승에게 말했다.
“잠시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그. 그러면 잠시 쉬었다가 두 분께서 도착하신 것을 아뢰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스님.”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고 내가 몸을 일으키자 동자승은 다행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저쪽입니다. 방장께 이야기는 들으셨지요?”
“예, 스님.”
동자승이 말한 방장께 들은 이야기란 것은, 현원법사를 만나려면 그의 흥미가 동할 이야기나 재주를 선보여야 한다는 것.
솔직히 이정도 개고생하고 올라왔는데, 당연히 나와서 만나주는 게 사람의 도리건만, 꼭 무협의 기인들은 이상한 짓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
나를 만나려면 이정도급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의미라고나 할까?
뭐 어쩌겠나 팔왕도 존중하는 그런 분이라는데 까라면 까야지.
결국 재미있는 이야기야 스님들의 개그 코드를 모르니 내가 시도해보기 힘들고, 내 가진 재주야 요리이니 요리를 선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림의 노승에게 선보일 요리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생각하며, 동자승을 따라 조금 움직이자, 팽유성의 걱정된다는 목소리의 전음이 날아왔다.
[류형 그런데 진짜 할 생각입니까?]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금 들려오는 전음.
[허허, 류형은 진짜 크게 될 사람입니다.]
평유성의 전음을 들으며 동자승을 따라 발걸음을 조금 옮기자, 나타난 가파른 계단의 끝.
조금 평평한 평지 위에 돌로 된 문이 하나 서 있었다.
돌로 된 기둥과 지붕으로 만들어진 문.
그 문 십여 미터 안쪽. 동굴 입구 위에 검은 현판에 금색 글씨로 쓰여있는 세글자.
달마동(达摩洞).
달마동은 석벽에 뚫려있는 천연동굴이었는데, 앞을 다듬어 깎은 자연석으로 쌓아 문처럼 만들어 두고, 입구는 짚으로 짠 두꺼운 발로 가려두고 있었다.
우리가 그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 동자승이 안쪽을 향해 말했다.
“스님, 손님이 두 분 찾아오셨습니다.”
“···”
동자승이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렸으나 아무런 대답 없는 동굴 안쪽.
그러나 동자승은 당연하단 것처럼 우릴 향해 이야기했다.
“이 앞에서 재주를 선보이시거나, 법사님께서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를 하시면 됩니다.”
동자승이 동굴 앞 조금 넓은 공터를 가리켰고, 나는 곧장 급을 풀어, 뚜껑 덮인 요강 같은 모양의 자기 그릇을 하나 꺼냈다.
소림의 고승을 깜짝 놀라게 할 요리 출수였다.
***
“노공, 정말 이것들으로 만든 요리를 현원법사님 앞에서 선보이신다고요?”
“가가, 저희도 없는데, 소림에 가서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소림으로 출발하기 전 현원 법사에게 선보일 요리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늘어놓자, 나에게 걱정된다는 목소리로 말하는 둘.
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재료를 손질하다 말고 고개를 들자,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둘과 동시에 느껴지는 싸늘한 눈빛.
옆을 보자 팽유화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화난 표정은 부끄러운 표정이면 싸늘한 표정을 뭘까 생각하는데, 내 요리를 보기 위해 따라왔던 남은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유성의 목소리 말이다.
“유화 너도 걱정스러운 것이냐? 그리 걱정스러운 표정이라니···.”
걱정스러운 표정인 모양.
모인 넷의 걱정을 덜기 위해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위험할 일은 없으니까.”
“소림에서 이것으로 요리하는데, 위험하지 않다고요?”
“가가, 요즘 너무 위험한 일만 하시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냥 미소를 지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만들 요리는 온갖 호화로운 재료들이 가득 들어가는 요리.
보양 요리의 결정체.
한국 사람이 여름에 삼계탕을 먹어서 보양한다면, 중원인들의 보양 요리라면 무조건 이것을 떠올릴 요리.
먼저 요강 같은 작은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말려 준비했다.
여기에 말린 죽순과 건향고(乾香菇. 말린 표고버섯)를 물에 불려 물기를 꼭 짜내 넣어주고.
복어(鰒魚 말린 전복), 건해삼(乾海蔘), 호시(濠豉 말린 굴), 하미(蝦米 말린 새우), 간패(干貝 키조개 관자를 쪄서 말린 것)도 물에 불러 똑같이 물기를 제거해 넣어주었다.
육류로는 사슴의 등심과 사슴의 힘줄, 물고기의 부레와 껍질, 닭과 오리의 가슴살.
기름기가 떠오르지 않게 지방은 철저히 제거한 살코기만 사용하는 것이 이 요리의 국룰.
이 과정까지 끝내자 아내가 놀란 목소리로 물어왔다.
“재료가 무척 대단하군요?”
“이제 시작입니다.”
“예?”
여기까지만 해도 호화로운 재료 일색이지만,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다음으로 들어갈 것은 말린 용안(龍眼) 열매.
리치와 같은 무환자나무목 식물의 열매로 말려 약용하는데, 중원 황실에 진상한다 해서 용안이라는 이름을 얻은 열매를 넣어준다.
거기에 말린 구기자와 공가에서 나올 때 얻어온 은행 한 줌과 먹기 좋게 자른 토란을 넣어주고.
제비집인 연와(燕窩) 그리고 약왕에게 구해주느라 여유로 가지고 있던 상어 지느러미인 어시(魚翅)까지.
마지막으로 비연에게 넘겨받아, 아내의 치료에 쓰고 남았다고 약왕에게 건네받은 고려인삼 조각을 넣으면 일단 모든 재료 준비는 끝.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모은 재료들이 거의 조금씩 다 들어가는군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노공.”
열대지방인 맹희 누님네에서 가장 유명한 토란부터 본가에서 구한 연와.
약왕이 있는 곳에서 구한 어시인 상어 지느러미와 비연이 구해준 고려인삼.
거기에 공가에서 준 은행까지.
지금까지 여행의 종지부를 찍는 요리.
내 한과 설움과 고통 그리고 사리가 녹아 들어가 있는 요리.
불도장(佛跳牆).
너무 맛있어서 부처도 담을 넘는다는 요리.
그것이 내가 현원법사에게 보여줄 나의 재주였다.
‘중원 새끼들 어디 구란지 아닌지 한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