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三千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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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디(慢慢地 만만지)라는 말이 있다.
중원어로 천천히라는 의미를 지닌 말인데, 보통 중원인의 성향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한다.
전생 한국인의 성향을 빠른 산업화에서 파생된 빨리빨리 문화에서 찾는다면, 땅덩어리가 넓고 사람이 많은 중원인의 성향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편인데, 그것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것이 만만디.
한국에서는 식당에 가면 주문을 하고 인사말로 ‘잘 부탁한다.’, ‘빨리 부탁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중원인들의 인사말은 ‘천천히 부탁합니다.’
그러니 식당 같은 곳을 가도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는 게 보통이기에, 나 같은 순혈 한국인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답답함을 느끼기 마련인데, 그것도 중원인 나름인 모양이었다.
불도를 닦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인내심이 커, 기다리는 데 당연히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한 소림 승려의 목소리가, 불도장을 살피는 내 귓가에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직 멀었느냐? 쩝.”
“스님, 아까 물어보시고 아직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았는데요?”
“그, 그랬나?”
-보글보글
신나게 끓어오르며 사방으로 향을 뿌려대는 불도장 앞에서, 대략 십 분에 한 번쯤 언제 요리가 끝나냐고 물어오는 현원법사.
“이젠 먹어도 되지 않느냐?”
“너무 익히면 맛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원래 고기는 겉만 살짝 익혀서 먹는 것이···.”
“이거 닭고기가 든 모양인데, 닭고기는 너무 오래 삶으면···.”
그의 보챔이 염불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왜 삼장법사가 옆에서 염불한다고 그리 지랄했는가 싶었는데, 머리에 두른 긴고아(緊箍兒) 때문이 아니라 묘하게 염불을 읊는 톤으로 이어지는 스님의 잔소리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저런 쫑알거리는 잔소리가 이어진다면 정상인도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았기 때문.
염불톤으로 계속 이어지는 현원법사의 말투가 사람의 신경을 묘하게 긁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치미는 짜증으로 그냥 얼른 저 입에 불도장을 처넣어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퉁퉁거리는 팽유성의 전음도 들려왔다.
[류형, 근데 우리 왜 맞은 거요? 안 드실 것처럼 그러시더니···. 드실 거면 패지나 말든지···]
나는 그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어 주었다.
팽유성은 무림의 잘나가는 세가 후계자로 살다 보니, 이렇게 맞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가 본데 뭐 별 이유 없었다.
‘뭘 맞긴 왜 맞아 약해서 처맞은 거지.’
허약한 사람은 구시렁대는 것도 마음속으로 해야만 하는 것.
나처럼 말이다.
‘에이 치사한 땡초.’
무림 기초 자원 출신인 나는 뭐 원치 않아도 객잔이 두 번이나 작살나기도 하고.
밑바닥 삶을 좀 겪어봐서 그런지 무림에서는 약하면 이유가 없더라도 처맞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니, 좀 억울하긴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팽유성은 몇 대 맞은 것이 무척이나 억울한 느낌.
내가 천마쯤 되는데 불도장을 만들었으면 현원법사가 우릴 두드려 팼겠나?
열반에 들기 싫으면 입꾹닫하고 먹으라면 먹었겠지.
‘사내자식이 몇 대 맞은 걸로 꿍얼대기는···. 나는 인마 객잔도 두 번 날려봤어! 마교의 장로에게 뒤질 뻔하기도 하고.’
아무튼 한쪽에서는 계속 염불을 외워대고, 한쪽에서는 간간이 이어지는 구시렁구시렁.
두 놈의 아니, 한 놈과 한 땡초의 아가리에 요리를 넣어주어야 할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자! 이제 다들 요리를 드시지요.”
아침 일찍 식사하고 산을 올라 여섯 시진쯤 푹 고았으니, 진한 국물이 충분히 우러났을 터.
뭐 원래대로라면 열두 시진 정도는 고아주어야 했지만, 그전에 둘의 구시렁과 염불에 내가 참지 못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었기에, 급에서 그릇과 국자를 꺼내 얼른 단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먼저 뜨거운 뚜껑을 국자로 슬쩍 밀었다.
-스르릉···. 땡그랑!
국자에 밀린 뚜껑이 볼록한 항아리의 표면을 따라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지고.
아래로 떨어진 항아리의 뚜껑이 돌바닥과 부딪쳐 맑은소리를 냈다.
-화아아악
여기에 이어지는 습식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은 광경.
눈까지 내린 추운 날이라 그런지, 마치 도술이라도 부린 듯.
아니면, 안개 무대효과라도 시작된 듯, 항아리에서 시작된 안개 같은 김이 미친 듯이 위와 옆으로 치솟았다.
치솟은 김이 얼굴에 뿜어지자 느껴지는 소흥주의 깊은 향.
“음···. 좋구나. 이놈이 나를 화나게 하려고 만든 줄 알았더니, 실력은 있는 놈이었구나.”
불 가까이 앉아있다가 밀려오는 향을 맡은 현원법사가 나를 인정한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팽유성의 설명.
“류형은 무림에서 식룡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스님.”
“식룡? 요즘에는 무림인들이 무공 한 자락 익히지 못한 이에게도 용의 별호를 지어준단 말인가? 그래, 어디 한번 용의 별호를 받을 만한지 내 확인해보마.”
“예? 그것이 무슨?”
현원법사의 말에 팽유성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지만, 무슨 말은 무슨 말.
‘무슨은 무슨. 그냥 만족할 때까지 처먹겠다는 말이지.’
항아리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가져온 그릇에 불도장을 퍼담기 시작했다.
죽순과 표고버섯, 닭고기와 돼지고기, 말린 전복과, 키조개 관자, 말린 새우와 말린 굴까지.
그렇게 모닥불의 빛에 도움을 받아 제법 모양이 나게 담고 있는데, 현원 법사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크흠. 그, 복어(鰒魚 말린 전복)와 간패(干貝 키조개 관자를 쪄서 말린 것)를 좀 더 올리거라. 표고버섯이나 죽순 같은 것은 평소에도 자주 먹으니 굳이 올리지 말고.”
요리 좀 자셔 보셨는지 어둠 속에서 재료의 겉만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현원법사.
정말 깐깐한 양반이셨다.
“예, 스님.”
냉큼 대답하고 전복과 키조개 관자를 더 올리고 표고버섯과 죽순을 덜어냈다.
그리고 대망의 국물.
-주르륵
국자로 슬쩍 떠 국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틈틈이 줄어드는 국물 때문에 눈을 넣어 만들었기에 국물의 양은 처음과 변함없었지만,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빛에 드러나는 불도장의 국물에는 걸쭉함이 느껴졌다.
그것을 퍼 현원법사의 그릇에 옮겨 담고, 곧바로 그릇을 현원법사에게 건넸다.
“오호라. 어디 그럼 청식(請食)을 권유받았으니 한술 떠볼까?”
청식이라는 말은 상좌불교에서 탁발과 함께 승려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신도들에게 초대받은 식사를 말하는 것.
그러니 소싯적에 천축국 좀 다녀오셨던지, 초대받은 식사라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상좌불교는 육식 허용이니까.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땡초 같으니. 거기서 체면치레까지 신경을 쓰다니.’
내가 구시렁거리든 말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올린 현원법사.
지금 저 국물 안에는 소흥주에서 뿜어져 나온 과일의 화려한 향과 표고버섯과 죽순에서 나온 담백한 향.
거기에 해산물과 고기에서 우러난 육수들이 응축되어있을 터.
또한 무엇보다 사슴의 힘줄을 넣었기에 사슴 힘줄을 이루고 있는 콜라겐이 녹아 그 눅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후르륵
-쩌어업
역시나 첫 수저를 뜬 현원 법사의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입이 눌어붙은 것처럼 들려오는 소리.
소롱포같이 힘줄에서 녹인 콜라겐으로 만든 음식은 먹고 나면 입술에 진한 끈적함을 남기는데, 아마 국물 응축된 육수와 콜라겐의 찐득함이 입안을 끈적거리게 하는 모양.
“허허. 이거 참.”
현원 법사가 국물 한 숟가락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감탄스러운 음성을 흘려냈다.
-츄르릅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뭐 별거 있나?
폭풍 식사!
전생에 한국에는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도 안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지금 현원 법사의 모습에서 그것이 딱하고 떠올랐다.
-츄르릅
건전복이었다가 이제는 소흥주의 향을 가득 머금게 된 그것이 현원법사의 입으로 사라지고, 곧이어 터져 나오는 물음.
“이것은 사당인가? 복어가 어째서 입에서 사라지누? 간패가 이리 부드러운 것이었나?”
(이거 설탕이냐? 왜 전복이 입에서 사라지냐? 조개관자가 이렇게 부드러웠나?)
그리고 곧이어 다른 고기들이 그의 입으로 연달아 사라지고 있었다.
일단 한 명의 아가리는 틀어막은 상태.
남은 아가리를 막기 위해 팽유성에게도 한 그릇 가득 불도장이 담긴 그릇을 건네자, 그가 국물을 한입 떠먹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그릇으로 얼굴을 처박았다.
-츄릅···.
-허웁! 하아아아···.
-촵촵!
둘의 아가리에서 들려오는 식사 소리가 바람이 부는 계곡에 합주처럼 흘러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둘의 아가리가 불도장으로 틀어막히자 내 심신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내 평안을 깨는 목소리.
“하, 한 그릇 더 줘보거라. 날도 추운데 뜨끈한 것이 아주 좋구나. 거기 인삼 조각도 있는데 그것도 올려보거라.”
“벌써?”
“크흠···.”
시키는 게 많기는 했지만, 어느새 벌써 한 그릇 뚝딱.
“예. 스님 어찌 입맛에는 맞으십니까?”
요리사에게 가장 큰 칭찬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기에, 이미 반응으로 극찬받고 있었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직접 입으로 듣고 싶은 법.
두 번째 그릇을 뜨다 말고 요리가 마음에 드나 물었더니, 현원법사가 멈칫하며 대답했다.
“별호가 식룡이라고?”
“예, 뭐 부끄럽지만···.”
앞에 붙은 식자 때문에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자, 현원법사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어림없고 안될 말이라는 듯.
‘아니, 잘 먹고 왜 또 딴소리하려고···.’
그의 반응에 사람 참 인정머리 없다고 생각할 때.
“내 젊을 때 고행하느라 천축이나 중원 밖에서도 탁발을 많이 해봤지만, 이리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구나.”
“감사합니다. 스님.”
자기가 먹어본 음식중에 제일 맛있다는 말.
내 예상과 다르게 극찬이었다.
그리고 그 극찬이 끝났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
“용이나 봉 같은 것들은 원래 후기지수들에나 쓰는 법. 네 요리는 일대 종사나 다름없는데, 용 따위는 어울리지 않지. 네가 나이가 좀 더 있었으면 네 별호를 식왕이라 고쳐주었을 것인데···.”
‘별호 짓는 꼬락서니 하고는···.’
식룡에도 경기가 날 지경인데 식왕?
내 쪽에서 거절이었다.
“팔왕 분들이 계시는데 저같이 하찮은 요리사가 같은 왕의 반열에? 아니 될 말이지요. 스님.”
“무림의 배분이 있으니 당연히 왕은 안 되겠지. 그래 내 생각을 해봤는데···.”
‘아니! 생각하지 마! 제발!’
어떤 흉한 별호가 생길까 싶어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지만, 그의 입이 벌어지며 망신스러운 별호를 뱉어냈다.
“식소왕(食小王) 어떻겠느냐? 아니야, 식소제(食少帝)?”
‘분명 고급스러운 요리를 처먹였는데, 입에서 나오는 별호는 왜 저급스럽냐?’
급하게 그의 폭주를 막아섰다.
“스님! 안될 말입니다.”
“응? 왜 별호가 마음에 안 드느냐? 이, 소림의 현원이 직접 지어주는 것인데?”
자기가 직접 업그레이드해주는 별호를 감히 거절하냐는 듯한 물음.
하지만 무슨 별호든지 앞에 식(食)자가 붙으면 뭔가 이상했으니 무조건 거절해야 했다.
‘그냥 식룡 할게요.’
“생각해보십쇼. 사람들이 어찌 그런 별호를 받았냐 물어보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겠습니까? 불도장을 드시고 만족해서 지어주셨다 하면, 다른 무림인들이 스님께서 고기를 드셨다고 알게 될 테고, 그러면 스님의 체면이···.”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어떻게 설득했나 싶었는데 들려오는 그의 물음.
“그나저나 이 요리의 이름이 뭐라고?”
“예? 그야 불도장(佛跳牆)?”
-부웅!
-따악!
“네 녀석 나를 놀리는 것이냐?”
“아뇨. 스님! 그게 아니라!”
요리 이름이 자기를 놀리는 것인 줄 알고 화를 낸 현원법사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있긴 했지만, 옛날에 있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간신히 그를 설득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스님께서 중원의 모든 이야기를 아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뭐 그런데···. 의심스럽단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불도장 한 단지를 다 비우고 헤어질 때.
“스님, 그런데 북해빙궁 위치를 알려주시지 않았는데요?”
북해빙궁의 위치를 알려달라 했지만, 관상만 봐주고 복채만 받아 간 상태.
그건 왜 알려주지 않는 것이냐고 묻자 현원법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개봉에 돌아가 보거라. 네 기다리는 소식이 도착해 있을 테니.”
“예?”
“그리고, 개봉에서는 서두르지 말고 꼭 봄에 떠나거라.”
“예? 스님, 그게 무슨?”
“이정도면 맛난 요리값은 치른 것이겠지?”
그는 그렇게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금 달마동 안으로 사라졌다.
***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해 구시렁거리며 산에서 내려와 팽가로 향했다.
그리고 팽가를 거쳐 개봉으로 돌아간 내 앞에 도착해 있는 편지 한 통.
장인에게서 날아온 편지였는데, 그 편지를 펼치자 아주 짧은 내용이 우리 앞에 드러났다.
「난주(兰州) 북쪽 삼천리(三千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