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南宮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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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중인 줄 알았는데 진짜 법력이 있었어? 이러면 또 만자 형님을 버리기가 힘들어지는데?’
현원법사가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간절히 원하던 모든 정보가 장인에게서 도착했으니까.
팽가에서 돌아오자마자 둘러앉은 탁자에 이마를 마주 대고 모인 우리 셋.
우리 셋의 머리가 모인 가운데 장인께서 보낸 서찰이 펼쳐져 있었다.
“난주(兰州)면 그러니까···.”
서찰에 있는 글을 보고 영영이가 혼잣말하며 뭔가 계산하는 시늉을 했다.
아마도 개봉에서 난주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계산하는 모양.
그러나 하프 바바인 전사 클래스 영영이가 고생스럽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재능이 있고, 영영이는 당가의 독과 같은 톡 쏘는 깜찍함과 커여움만 책임지면 충분했다.
우리에겐 인간 계산기 마법사 클래스 하프 제갈이 있으니까.
“개봉에서 난주까지라면, 천 칠백 리 조금 넘겠군요. 마차를 끌고 가면 삼십일 조금 더 걸릴까요? 다만 이제 눈이 쌓여서 마차가 가지는 못할 테니, 그 배는 잡아야 할 겁니다.”
역시나 개봉에서 난주까지 정확한 거리를 뽑아내는 아내.
개봉에서 난주까지 천 킬로미터 정도.
난주에서 북쪽으로 삼천리라는 말은 이 시대의 일 리가 대략 오백칠십 미터 정도이니, 대략 계산하면 천 칠백 킬로미터.
둘을 더하면 이천칠백 킬로미터고 하루 삼십 킬로미터씩 걸으면 구십일을 쉬지 않고 걸어야 하는 대장정.
그간 모은 정보들로 목적지는 명확해졌다.
난주 북쪽 천칠백 킬로미터에 있는 호수.
바이칼!
장모님은 마더 러시아 불곰의 땅에 살아 숨 쉬는 요정 출신이신 모양이셨다.
모든 사나이의 이상향.
연예인, 모델 같은 여자들이 밭을 갈고 김을 맨다는 환상향(幻想郷).
그곳이 아내가 가진 핏줄의 근원이 되는 곳이라는 결론이었다.
다만 감사한 일이면서 한편으로 다가오는 엄청난 거리의 압박.
이번 생, 내 팔자(八字)에 분명 여난이 아니라 역마살(驛馬煞)이 여러 개 끼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엄마 찾아 삼만리 아니, 삼천리네? 언제 가냐 대체?’
그러나 걱정은 나 혼자의 몫.
하도 싸돌아다녀서 이제 이정도 거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영영이와 아내.
본가가 어디인지 따위는 다들 잊었는지, 거리는 상관없고 언제 출발할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가가, 그러면 좀 쉬었다가 곧 출발하실 건가요?”
“노공, 출발은 언제 하실 예정입니까?”
계획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출발하는 게 맞았지만, 그가 법력이 있는 땡중이라는 것이 확인된 상태.
묘하게 땡중이 헤어지기 직전 나에게 남겼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그게···.”
내가 턱을 잡고 고민에 빠진 듯 운을 띄우자 영영이와 아내가 물어왔다.
“왜요? 가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노공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신 곳이?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으신지요?”
아직 아내와 영영이에게는 소림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자세하게 하지 않은 상태.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 중, 그 이야기를 꺼내 상의해보기로 했다.
“실은 이번에 소림사에 가서 현원 법사님을 만났을 때,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오.”
“예? 이상한?”
“이상한 이야기 말입니까?”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말이오. 땡중 아니, 현원법사님을 만나, 내 장모님 계신 곳을 물었는데, 그분께서 대뜸 내 관상을 봐주신다고 하지 않겠소?”
“현원법사님이 관상을요? 정말로?”
“어머! 그분이 아무나 관상을 봐주지 않는다는데.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한 말이 나한테는 그냥 선문답 같은 느낌만이 들었을 뿐이었는데, 노승이 관상으로 좀 유명한 모양.
아내와 영영이가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물어왔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여···”
‘아차! 이건 할 말이 아니구나.’
그분이 하신 이야기의 풀 스토리를 뽑아내려 했더니, 내 삶에 여난이 끼어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역마살(驛馬煞)도 아니고 남편의 인생에 여난이 끼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나.
여난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많은 여자와 엮인다는 말이니, 도화살(桃花煞)이나 마찬가지.
그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영영이와 아내에 의해 외부 활동 금지가 될지도 모르는 일.
나를 집안에 가둬두고 화초처럼 기른다고 할지도 몰랐다.
“여? 여? 뭐요 가가.”
“여?”
급하게 그의 선문답을 비틀었다.
나도 만족하고 아내와 영영이도 만족할만한 방향으로.
“여, 여자가 두, 둘이다. 내 인생에 여자가 둘이다. 뭐 그런 말씀을 하셨소이다.”
“어머! 역시!”
“언니!”
중원에서 가장 점을 잘 보는 노인네가 내 인생에 여자가 둘이라는 이야기를 했으면, 그것은 곧 하늘에서 내린 인연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
공식 천생연분(天生緣分) 인증.
둘은 날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아내와 영영이가 좋아하는 사이 이어서 그가 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냈다.
“그리고 개봉에 돌아가면 내가 기다리는 소식이 도착해 있을 거라 하셨는데, 이리 장인어른의 서찰이 도착해 있으니 신묘한 일이 아니겠소?”
“어머! 정말요? 정말 신묘하셔요!”
“현원법사님의 법력이 높으시다더니!”
아내와 영영이는 한층 더 기뻐했다.
자신들이 천생연분이라는 이야기에 신빙성이 더해지니 좋아할밖에.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했던 말.
바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분이 마지막에 조금 이해 안 되는 말씀을 하셨소.”
“어떤 말씀을 말입니까?”
“이해 안 되는요? 설마? 막 사별하고 그런 건 아니죠?!”
영영이는 제가 말하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아니, 네가 말하고 네가 놀라면 어쩌냐?’
아내도 영영이의 말에 당황해 나를 바라보고.
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설명했다.
“아니요. 그런 건. 내 고난이 좀 있더라도 천수는 누린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다만 개봉에서는 서두르지 말고 꼭 봄에 떠나라고 말씀하셨다오.”
“봄에 말인가요?”
“그렇소. 봄.”
원래 점쟁이들은 장마 기간이나 여름에는 물을 조심하라 하고, 겨울에는 불조심, 뭐 그런 식으로 조심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현원법사의 말은 겨울 여행을 피하라는 합리적인 말이긴 했다.
여기는 그리 춥지 않지만, 이제 첫눈도 내렸고 본격적 추위가 시작될 때.
장모님 계신 곳으로 가까워질수록 영하 이삼십 도는 기본일 테니, 따듯하게 날이 풀리는 봄에 출발하는 것이 시기에도 맞으니까.
더군다나 몽고 평원에는 내린 눈을 치울 사람도 없고, 봄이 올 때까지 눈이 녹지도 않을 테니, 장모님께 가는 길은 깊이 쌓인 눈 위를 걸어서 가야만 하는 길.
석 달 정도를 예상했지만, 그것은 날이 좋고 길이 좋을 때나 가능한 것.
길 위에서 대부분 시간을 버리고 결국 봄에나 움직이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내는 내공이 가득 차서 몸에 무리가 올지도 모르는 상태.
여기서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괜히 땡중의 말을 믿었다가 아내가 잘못되면 내가 흑화해 버릴지도 모르니깐.
‘그렇게 되면 나도 우리 엄마를 찾아가 버릴 테다! 중원은 대륙을 암흑으로 물들일 암흑요리사를 맞이하게 될 것이야!’
마음속으로 만자 형님을 협박하며, 일단 아내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물었다.
“부인, 몸은 어떻소?”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겨울이 다가오니 더 몸이 가뿐해지고 있습니다. 내공이 더 충만해지는 것도 같고.”
‘아니, 그럼 그건 괜찮은 게 아닌데···.’
북해빙궁의 내력 때문인지 몸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충만해진다는 말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뭐가 자꾸 충만해져!’
마음으로는 한없이 밀착하고만 싶은 아내인데, 몸으로는 자꾸만 멀어지려는 상황.
마음속으로 한탄이 터져 나올 때 아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고민하시는 거면, 법사님 말씀대로 봄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노공.”
“맞아요. 가가. 법력 높으신 현원법사께서 일러주셨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으실 것이 분명해요. 청이도 그때까지는 문제없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누구도 아닌 현원법사님 이시니까요.”
둘은 찰떡같이 땡중을 믿는 모양이었지만, 그분이 고기 요리 신나게 드시고 싶어서 동자승을 내려보냈다는 사실을 이들이 알까?
아내와 영영이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장모님게 봄에 출발하기로 하고 대화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들려오는 영영이의 질문.
“가가 그런데 법사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그리고 만들어가신 요리 때문에 혼나지는 않으셨어요? 관상까지 봐주셨으면 혼이 나신 것 같지는 않지만···.”
“맞습니다. 생각해보니 소림에 다녀오셔서 허겁지겁 동경으로 돌아오느라, 그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요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아올 때는 동경에 도착하면 말씀해주신다고 했으니, 이제 얼른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개봉으로 돌아와 현원법사가 한 말의 의미가 확인될 때까지 이야기를 미룬 상태였기에, 둘은 소림사에서 있던 일이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일단 둘을 위해 땡중이 고기는 안 먹고 향만으로도 칭찬했다고 대포를 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나기는? 내 요리의 향만을 맡으신 후. 그분이 나를 아주 칭찬해주셨소. 별호를 바꿔 준다고도 하셔서 거절하는 데 아주 힘들었다오.“
둘을 별호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빛내며 내 양쪽으로 달라붙었다.
그리고 나를 연행하듯 내 팔짱을 양쪽에서 끼며 물었다.
“예? 별호를요? 현원법사께서요?”
“뭔데요? 뭐로?”
“아니, 무슨 사람 별호를 식소왕(食小王)이나 식소제(食少帝)로 바꾸시자고···. 우습지 않···?”
“어머 멋져라!”
“노공, 너무 멋있습니다!”
‘멋있다고? 무슨 식자재 마트 이름같이 생겼는데?’
“내가 소왕(小王), 소제(少帝)의 아내.”
“가가, 어째서 거절하셨습니까!?”
‘아니, 이게 먹힌다고?’
무림 감성은 정말 이해 못할 감성이었다.
***
겨울이 깊어질수록 눈은 더욱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맑고 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이라 그런지, 눈이 정말 끝도 없이 내렸다.
무사들의 임무는 이제 경비부터 제설까지.
어느 시대나 제설작업을 맡는 것은 병력인 모양이었다.
눈이 하도 많이 오니, 아랫사람들에게만 모두 맡길 수는 없어서, 몇 번 어울려 눈을 치웠는데, 그날도 눈이 많이 와 무사들과 같이 눈을 치우던 그런 날이었다.
우리 처소 주변의 눈을 쓸고, 퇴청하는 제갈각 숙부님이 들어오실 때 미끄러지지 말라고 제갈가의 입구에 나가 무사 몇 명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눈을 쓰는데, 누군가가 눈 속을 헤치고 제갈가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옷은 겨울옷을 가볍게 챙겨입고, 머리에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죽립을 쓴 모습.
죽립 위에 쌓인 눈이 고개를 숙이자 바닥으로 쏟아졌다.
“실례하겠습니다. 여기가 동경의 제갈가가 맞습니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
슬쩍 죽립 아래 드러난 하관을 살피자, 남자라면 계집애 같은 미남 얼굴이고, 여자라면 미인일 것 같은 그런 얼굴.
입술이 꼭 쥐를 잡아먹은 것처럼 붉은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에 허리에 찬 붉은 수실이 매어진 고급스러운 검.
꽤 고수로 보이는 무림인이었다.
검이라는 무기는 비싼 무기이기에 하수가 저런 검을 차고 다닌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무림인으로 보이는 그의 물음에 무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무사들이 천천히 나를 호위하듯 서며, 무사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제갈가가 맞는데, 찾아오신 분께서는 어떤 연유로 찾아오셨는지요?”
이미 무사들의 손은 빗자루를 떨구고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준비하는 상태.
정체불명의 검을 찬 자가 제갈가가 맞는지를 확인하니 긴장한 모양이었다.
가끔 이렇게 와서 도장 깨기를 신청하는 그런 미친놈들도 있으니 그런 모양.
하지만 지금 제갈가에는 다른 무림인들이 꺾어 이름을 날리고 싶은, 날리는 후기지수나 고수가 없는 상황.
의구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죽립을 벗어 손에 쥐고 고개를 숙여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남궁소소라 합니다. 식룡께서 동경의 제갈가에 묵고 있다는데, 만남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다물어지고, 불어오는 바람에 뒤로 묶은 그녀의 머리가 눈송이와 같이 흩날렸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한 단어가 다시금 떠올랐다.
‘여난(女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