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
“검봉(劍鳳)!”
그녀의 자기소개에 무사들이 동시에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
검봉이라는 단어를.
검봉이란, 검의 봉황.
검을 쓰는 후기지수 여자 중 최고라는 말.
무림에서는 무기 중 검을 최고로 치니.
겨울처럼 차갑게 생긴 외모와 같이 차가운 심장을 가진, 중원에서 가장 촉망받는 히트맨이라는 이야기.
거기에 남궁세가는 세가 중에 검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가문.
지역구 조폭 중 가장 흉험한 무기인 사시미를 제일 잘 쓰는 그런 포지션이라고 보면 된다.
다른 가문에서 손을 봐준다면 적당히 두드려 패주는 것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남궁에서 손을 봐준다면 그것은 일단 최소 손목 하나 정도는 날리겠다는 의미 정도로 보면 되는 그런 흉험한 가문.
‘왜 날 찾는 거지?’
현원법사의 여난이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칠대세가의 수장 격인 남궁의 촉망받는 후기지수가 찾아와 나를 직접 찾는 상황.
냉큼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사들이 눈치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그녀도 촉망받는 히트맨답게 무사들의 시선을 알아채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무사들 사이에서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제갈가의 류청운이라 합니다. 어째서 저를 찾으셨는지?”
내 대답에 그녀의 빛없는 회색 눈동자가 내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스캔했다.
-척
그리고 내 포권과 인사에 대답지 않고 자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
그녀가 손을 가져간 곳은, 붉은 수실이 매어진 그녀의 검을 고정하고 있는 그녀의 검대(劍帶) 위였다.
이어서 들리는 날카로운 소리.
-챙! 채쟁챙챙!
그녀가 자기 검으로 손을 가져가자 무사들이 칼을 뽑아 나를 감싸며 외쳤다.
“검봉 갑자기 무슨 짓이요!”
“검봉 손을 거두시오! 이분은 무공을 익힌 몸이 아니니, 오해할만한 행동은 하지 마시오!”
“어서 안쪽에서 아가씨들을 불러오너라!”
다짜고짜 칼을 뽑으려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 무사들이 기겁하며 반응하고, 안으로 무사하나가 뛰어 들어갔다.
현재 동경에 있는 제갈가에 가장 고수는 아내와 영영이.
아마도 아내와 영영이를 부르기 위해 안으로 뛰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치 마네킹처럼 굳은 표정, 꼭 다문 입술로 나를 직시하던 그녀는, 그런데도 그녀의 손을 멈추지 않았다.
-투툭
그녀의 검대가 풀려 땅으로 떨어지고 그녀의 검이 검집 채 그녀에 손에 잡혔다.
그리고 그 검이 천천히 그녀와 내가 시선을 마주하는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손바닥 부분이 하늘을 바라보게,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에 꽉 쥐어진 모습.
나와 그녀의 시선이 교차하는 중앙.
늘어진 붉은 술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며 나와 그녀가 마주하는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설마!? 새, 생사결? 아니. 아가씨? 저희 그···. 초면인데요?’
저 상태에서 그녀가 검집만을 떨군다면,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검을 다시 검집에 꽂지 않겠다는 의미.
전생의 지식으로 여난 이라면 여자들이 나 좋다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 좋다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나 죽이자고 달려드는 난인 모양.
‘아니, 그난이 아니었냐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해보기 위해 일단 말을 걸어보았다.
같은 중원 지역구 조폭 연합체에 속한 가문끼리 초면에 이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
“자, 잠깐! 거, 검봉 진정하시고. 이. 일단 말로 합시다. 말로. 대체 왜 그러시는지 이유나 알고···. 뭔가 오해가 있거나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는 그녀는 왼손마저 검을 쥔 손 옆으로 가져갔다.
“검봉! 만약 칼을 뽑는다면 우리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소!”
“우리의 실력이 모자라겠지만, 여기 모두를 베어 넘기기 전에는 접각부께는 갈 수 없소!”
무사들의 충성심에 쪼금 마음이 울컥했다.
눈 몇 번 같이 쓸어줬다고 이런 충성심이라니.
그렇게 충성스러운 무사들을 믿고 뒤로 한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털썩
갑자기 검봉이라는 여자가 그 자세 그대로 내게 검을 바치는 모양새로 무릎을 꺾었다.
고개를 돌려 옆의 무사들을 바라보자 무사들도 이게 무슨 영문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이건?’
절하듯 검을 나에게 바치듯 내미는 모습.
무림의 불문율.
객잔에 와서 검을 가로로 올리고 은자를 올린다면, 깽판을 칠 테니 알아서 피하라는 의미와 같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검을 바치듯 내밀며 엎드린다는 것은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
검수가 자기 목숨보다 아끼는 검을 맡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이었다.
그리고 당황한 내 귓가에 그제야 그녀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룡. 저 남궁소소. 이 목숨 식룡에게 드릴 테니, 제발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녀의 말과 행동에 당황해있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터진 무엇인가.
-쾅!
그녀의 말에 당황해있는 사이, 내 옆에 떨어진 운석. 아니, 아내.
“끄아악!”
“어이쿠!”
바닥에 쌓인 눈이 사방에 튀고, 무사들이 사방으로 낙엽처럼 밀려나며 날아갔다.
검봉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내가 팀킬을 해버린 것 같은 상황.
하지만 눈이 두껍게 깔려 무사들이 많이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날아가자마자 금방 몸을 일으켰으니까 말이다.
또 나도 무사들과 같이 날아가나 했지만, 그러나 나는 어느새 아내의 품에 안긴 상태.
아내가 나를 자기의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누가 감히 노공께 칼을 뽑는! 응?”
큰 충격과 함께 아내가 착지하는 바람에 주변 몇 장의 눈은 모두 아내를 중심으로 밀려나 버린 모습.
등장과 함께 주변을 자동 제설시켜버린 아내.
아내는 안에서 연락받고 부리나케 뛰어나온 모양인데, 그녀의 등장에도 꿈쩍하지 않고 엎드려있는 검봉을 보고 당황한 듯 물어왔다.
“노공, 이게 무슨 일이죠?”
“나도 모르겠소.”
그리고 이어서 영영이가 헐레벌떡 뛰어나와서는 이 기묘한 광경을 보며 다시 물어왔다.
“가가, 이게 무슨 일이래요?”
“글쎄 나도 정말 모르겠다.”
‘원래 난(難)이라는 게 이렇게 갑작스러운 건가 봐.’
***
검봉.
남궁가에서 온 남궁소소라는 여자는 영영이와는 다른 의미로 좀 골 아픈 여자였다.
영영이가 애교 섞인 고집을 피우는 것은 나와 관련된 일 한정이지만, 저 여자는 뭐랄까?
충성도 높은 무사 같은 느낌의 이상한 고집쟁이였다.
아니,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다고 해야 하나?
“일단 날도 춥고 손님을 이리 밖에 둘 수는 없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시하셨는지 연유를 들어보도록 하죠. 도와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 돕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미동도 없는 그녀를 일단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남궁세가라면 지역구 탑 조폭 연합체의 수장을 맡은 조직.
이렇게 문밖에 이런 모습으로 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권유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요. 도와주신다고 약조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저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지 도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약조가 우선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연유인지를 알아야 돕든지 말든지 하지!’
“검봉,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해보자고요. 저 알죠? 저 당영영이에요.”
얼굴을 아는지 영영이가 아는 척을 하면 꼬셔봤지만,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추워 뒤지겠는데 남의 집 앞에서 행패 아닌 행패를 부리는 여자.
초저녁 시작된 그녀의 행패는 결국 제갈각 숙부님께서 퇴청하실 때까지 이어졌다.
유교자를 타고 퇴청하신 숙부님께서 집 앞에 이, 이상한 모습을 보고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아, 이 무슨 일이냐?”
“저, 저도 잘···”
“너도 모른다고? 그런데 저 처자는 누구길래 우리 집 앞에서 저러는 것이냐?”
“검봉이라고 합니다. 남궁 가문에 소소라는 분이시라고.”
“검봉!? 검봉이 우리 집 앞에서 대체 왜?”
검봉이 대문 앞에서 꿇어 엎드려있으니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이셨지만, 제갈은 역시 제갈.
제갈각 숙부가 도착하자 이 곤란한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숙부님께서 묘안을 내셨기 때문.
“청아 가서 안에서 숙모를 불러오너라.”
“숙모님을요?”
“그래.”
“어째서 숙모님을? 아!”
‘뭐지? 숙모님이 오시면 뭐가 해결되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둘이 미소를 띠고 아내가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고 얼마 후.
하녀들이 받치는 우산을 쓰고 숙모님이 나타나셨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와 엎드린 검봉 앞에서더니, 목덜미를 잡고 몸을 부르르 떨며 힘들게 말을 시작했다.
뭔가 상당히 빡친다는 표정으로.
“소, 소소야? 고모의 집 앞에서 이 무슨 행패더냐?”
‘응? 고모? 아!’
생각해보니 숙모님도 남궁가문의 사람.
하인들이 남궁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어 전생으로 치면 김여사님 최여사님 하는 느낌인지라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했는데, 문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검봉의 고모인 모양이었다.
“고, 고모님!?”
엎드려 고개를 처박고 있던 남궁소소의 얼굴이 그제야 다시 드러나고, 자기 고모의 얼굴을 보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당황했다.
“어, 어째서 고모님이?”
“하아···.”
그녀의 말에 한숨을 푹하고 쉬는 숙모님.
시집와서 잘살고 있는데 처가 식구가 갑자기 나타나서 집에서 깽판을 치니 면목이 없는 모양.
고모님이 부끄러운 얼굴로 숙부님께 고개를 숙이자, 숙부님은 손짓하며 괜찮으니 검봉과 이야기를 나누라는 듯한 제스쳐를 해 보이셨다.
숙모님이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씀하셨다.
“오라버니께서 네가 검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걱정된다고 하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설마 이곳이 고모의 집인 것을 모르고 찾은 것이냐?”
“······”
‘아니, 진짜 몰랐다고? 무슨 애가 자기네 고모 집도 모르냐?’
아내와 영영이를 바라보자 둘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왔다.
웃기긴 한데 숙모님이 관계되어있으니 억지로 참는 모습.
고모님이 검봉을 향해 지금 불고 있는 겨울바람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네 잘못은 안에 들어가서 따지겠으니 따라 들어오너라.”
“야, 약조가···”
“이 고모가 너 때문에 쫓겨나기라도 원한단 말이냐? 따라들어오너랏!”
약조 타령했다가 호되게 혼이나 검봉.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 사죄의 고개를 숙인 다음, 도살장 끌려가는 걸음으로 숙모님을 따라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렇게 끌려가는 그녀를 따르는데 영영이가 다가와 물었다.
“가가, 대체 무슨 일일까요?”
“글쎄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는 했는데 짐작도 가지 않는구나.”
“혹시 현원법사께서 가가의 인생에 여자가 둘이 아니고 더 된다고 한 건 아니겠죠? 무슨 여자가 이렇게 꼬인담?”
영영이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내 인생에 여자는 오직 둘. 너랑 청이 두, 둘뿐인데 그 무, 무슨 소리더냐!”
“그냥 해본 소리예요. 헤헤”
‘영영이가 기가 센 여자라서 그런가?’
영영이는 가끔 이렇게 신기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주 무서웠다.
***
갑작스레 예고치 않은 손님(?)을 맞았으니 제갈가의 부엌은 혼란에 빠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손님이라도 손님이 찾아왔을 때는 반드시 갱(羹)을 내는 것이 송 시대의 예의.
고모님을 따라 접객당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총관 일을 보는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부탁했다.
[접각부 어르신, 손님이 왔는데 부엌에 갱으로 준비된 재료가 없어서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혹시 잠시 살펴봐 주실 수 없겠는지요?]
나 때문에 찾아왔다지만, 고모님 앞에서는 이실직고할 테고, 아내와 영영이도 따라갈 테니.
총관의 부탁대로 잠깐 부엌에 들리기로 했다.
[영영아 내 잠깐 부엌에 들렀다가 갈 테니, 먼저 가서 혹시 나를 찾거든 알려주거라.]
[알겠어요. 가가.]
아까 추운 데 너무 오래 있어 항(炕)에 불을 잔뜩 넣고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는 것만큼 몸을 따듯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 갱을 직접 살피기로 한 것.
저녁에 따듯한 갱을 먹어야만 몸이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부엌으로 들어서자 모여서 웅성거리던 하인들이 나를 보고 안심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접각부님이 오셨습니다!”
“휴, 한시름 놓았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 당황했는데 다행입니다.”
겨울에 할 것이 없어서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라고는 눈을 쓰는 것과 하루에 한 끼 정도를 직접 요리하는 것.
보통 저녁을 만들고 있었지만, 오늘은 손님이 있어 내가 찾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단념하고 있던 하인들이 내가 얼굴을 드러내자 반색한 것이었다.
제갈가가 아무리 부잣집이라지만, 저기 어디의 팽 무슨 가문처럼 삼시세끼 고기를 먹는 그런 무식한 가문은 아니었다.
아침은 속없는 밀가루 만두에 채소볶음과 갱 정도.
저녁은 쌀밥이나 속 채운 만두에 몇 가지 요리 정도가 보통인데.
손님, 그것도 예고치 않은 꽤 명성 있고, 더군다나 같은 칠대세가의 우두머리 격인 남궁가의 사람이 찾았으니 급히 낼 요리가 부족했던 모양.
그것도 손님을 받는 데 가장 중요한 갱이 말이다.
일단 재료가 무엇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
“어디 재료가 무엇뿐이길래 이리 다들 당황해있는지 봅시다.”
“여기 있습니다. 접각부님.”
하인들이 웃으며 내 앞에 무 한 개를 내밀고 있었다.
‘너희들 지금 나 엿 먹이냐?’
얘들은 내가 솔방울로 쌀을 만들고 막 그럴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