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루참마속(挥泪斩马谡)
싸늘한 눈빛으로 숙부님을 바라보자, 내 눈빛을 접한 숙부님이 변명을 쏟아냈다.
“처, 청운이, 내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미안하네, 하지만 내 휘루참마속(挥泪斩马谡)의 심정으로 이 일을 진행했음을 알아주면 좋겠네. 자네라면 당연히 살신성인(殺身成仁)하여 사람을 구하리라 생각했고 말이야. 크흠.”
“아···. 예···. 휘루참마속. 살신성인. 예···.”
숙부님께서 말씀하신 휘루참마속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을 중원에서 쓰는 방식으로 말한 것.
읍참마속은 삼국지에서 시킨 대로 안 하고 제 맘대로 사고 친 마속을, 우리 제갈형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베었다는데서 나온 고사인데.
그러니까 숙부님의 말씀은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대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내게 고자···. 아니, 환관 옷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변명이었다.
그러나 선수끼리 변명해봐야 구차한 것.
이런 변명은 같은 제갈가 사람들끼리 해봐야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 그냥 이야기하기 미안해서 숨겼구만. 딱 봐도.’
그렇게 같은 제갈끼리 그런 변명은 사양이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내 눈빛을 확인한 숙부님이 내게 어깨동무한 채 속삭이며 변명했다.
[허허, 이 사람 그럼 어쩌겠나. 궁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닌데···.]
[하지만, 분명 나쁜 소식은 한가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깐만 입는 것이니 이해하게. 정말 고자 아니, 환관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자···.]
‘분명 나쁜 소식이 한가지라고 하셔놓고···.’
사지 멀쩡한 남자가 환관 옷을 입는 것보다 나쁘고 슬픈 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거짓말쟁이 숙부님.
이것은 흡사 여장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약왕 때문에 환자라고 오해받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지만, 환관 옷까지 입어야 한다는 사실에 인생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환생시킨 분은 내게 엿을 먹이기로 작정하신 모양.
아니라면 이렇게 조직적으로 한 분야만 잡아 패는 이지메가 있을 수는 없는 것.
‘제기랄, 만자 십자 어느 분입니까? 이런 집요한 공격. 정말 삐뚤어집니다?’
그렇게 손에 들린 보따리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음속으로 절규할 때.
태감 이헌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뭐하나? 얼른 갈아입게. 입궁해야 하니 서두르게.”
“예? 예···. 후···.”
그렇게 태감의 재촉으로 옷 보따리를 가지고 털레털레 처소로 향한 나.
기운 없는 걸음으로 처소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와 영영이가 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노공. 궁으로는 언제 출발한다던가요? 응?”
둘은 먼저 언제쯤 내가 출발할지를 물었으나, 내가 손에 든 보따리를 보더니, 얼른 달려와 손에서 보따리를 받아 들으며 다시 물었다.
“이건 뭔가요. 노공?”
“뭐지? 먹을 건가?”
그리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손에서 받아든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어머 이건!?”
보자기 틈으로 빼꼼하고 검은 관모가 드러나자 들려오는 아내의 기쁜 목소리.
“어머! 궁에 들어가실지도 모른다더니! 설마 관복과 관모?”
“어디! 어디! 어머! 어머! 정말? 청아 가가께서 관복과 관모를 입으시나 봐!”
보따리에 머리를 내민 검은 관모인 복두(幞頭)의 머리를 보자 아내와 영영이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원래 조폭가 아가씨들은 자고로 인텔리한 남자에게 끌리는 법.
전생에도 재벌가나 조폭가 이런대서 굳이 고위 공무원이나 검사 판사 등의 사위를 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
둘은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보자기를 풀어 헤쳤다.
내가 실제로 벼슬을 한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좋아하는 느낌.
하지만 관모의 모든 모습이 드러나자 아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전각복두(前角幞頭)인데, 날개···. 날개가···. 대체 어디로···.”
송 시대 관모인 전각복두는 모자에 달린 날개가 수평으로 쭉 뻗은 것이 특징인데, 이런 날개달린 관모를 쓰는 것은 관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니, 내시인 환관의 관모는 날개가 없는 것이 일반적.
그렇듯 날개 없는 관모는 곧 환관의 관모를 의미하니, 관모를 확인한 아내는 계속 날개만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날개가···.”
하지만 결국 손에 든 관모에 가려있던 연두색 관복까지 드러나자 현실을 깨닫고는 영영이와 둘이서 재빨리 나를 위로했다.
연두색 관복은 오직 환관만 입는 것이기에, 아무리 날개를 찾아봐야 관모에서 날개가 돋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아하하, 노, 노공. 화, 황궁에 숨어드는 것이니. 시, 신분을 숨겨야 해서 그런가 보네요. 그, 그렇지 않습니까. 언니?”
“그, 그럼. 청아. 노공 아니, 가가께서는 어떤 옷도 잘 어울리시는 분이니, 이 관복도 괘, 괜찮으실 겁니다. 청아 너와의 혼례식 때도 이것보다 조금 진한 녹색 옷을 입으셨잖니, 그때 얼마나 잘 어울리셨다고.”
아내와 영영이의 필사적인 위로에 마음속에서 흐르는 한줄기 설움.
설움 섞인 한마디가 참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크흑!”
“가가. 자자. 얼른 입어보자구요.”
“역시 뭐든 잘 어울리시는 우리 노공.”
둘이 갖은 아양을 떨며 나를 위로했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갸아악!’
***
나의 참혹한 흑역사는 환관의 옷을 입는 데서 끝나는 줄 알았지만, 내가 만드는 웅장처럼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 친구 아주 잘 어울리는구만, 이정도면 오해받지 않겠어.”
이헌의 칭찬인 듯 디스 같은 칭찬이 끝난 후.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이헌 태감이 나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혹 누가 말을 걸면 최대한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게 알겠나?”
“예?”
“궁 안에서야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황궁의 서문을 거쳐서 들어가야 하니, 금군(禁軍)을 지나야 한단 말일세. 나를 막아설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니까 말이야. 흑차(黑車) 때문에 궁이 좀 시끄러웠던 적이 있어서···.”
이헌의 설명을 들어보니, 흑차란 외로운 밤을 지새우는 궁녀들을 위한 위로(?) 시스템으로 잘생긴 남자를 궁녀에게 배달해주는 시스템이라고···.
최근에 궁녀 하나가 그 흑차를 이용하다가 걸려 큰일이 났었다는 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이런 은밀한 시스템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우리가 향한 곳은 대각국사 의천을 위해 요리를 만들었던, 계성원에 인접한 황궁의 서문.
서문이 황제와 태후가 기거하는 전각과 가까우므로 서문으로 간다고 했다.
마차를 달려 한참.
마차가 멈추는 느낌에 조금 열린 틈으로 밖을 확인하니, 불을 밝힌 서문 밖에 금군이 경계를 서다가 서문 앞에 멈춰 선 마차를 보고 다가와 물었다.
“이 밤중에 누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그러자 이헌이 마차 밖으로 머리를 빼 귀찮은 듯 대답했다.
“나, 태감 이헌이네. 좀 지나감세.”
“이, 이헌 태감!? 문을 열어라. 이헌 태감님이시다! 실례했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태후의 측근이라더니, 파워가 막강한지 이헌이 귀찮은 듯 이야기하자 열리는 황궁의 서문.
그렇게 문이 열리고 마차가 들어가는 듯했지만, 우리를 멈춰 세우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이 밤에 누구길래 서문을 연단 말이냐?!”
‘이거 분위기 갑자기 싸한데?’
뭔가 분위기가 싸하다고 생각할 때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장(牙將). 이헌 태감이십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장이라면 금군의 쏘가리. 소대장이란 말.
금군 소대장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했느냐?”
“예?”
“마차 내부를 확인했느냔 말이다!”
“예? 아니, 이헌 태감의 마차 이온데···. 어찌.”
-퍽퍽
밖에서 병사들의 곡소리가 들려오고.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흑차 문제로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는 모두 확인하라 했거늘. 어찌 그냥 보낸단 말이냐!”
밖에서 들려오는 쏘가리의 목소리에 이헌 태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벌컥
갑자기 열리는 마차의 문.
마차 문이 열리고, 안으로 뭔가 ‘나 FM임’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 둔 것 같은 남자 하나가 갑옷과 투구를 쓴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등롱으로 우리를 비춘 후 뭔가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헌 태감이 맞으십니까? 어대(魚袋)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어대란 송나라 관원들의 신분증 같은 것.
태감의 신분증을 까보라는 대단한 놈. 역시 쏘가리였다.
원래 간부 중, 가장 사고를 잘 치는 것이 쏘가리니까 말이다.
“태감께서도 아시겠지만, 흑차 문제로 밤에 황궁으로 들어가는 모든 마차와 어대를 확인하라는 명이 떨어졌으니 협조해 주시지요.”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태감 이헌이 그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너무 FM으로 보이니, 괜히 큰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부탁하는듯한 모양새.
“어허, 임무에 충실한 것은 알겠지만, 나와 최근 내가 맡은 환관 아이 둘 뿐이니 들어가게 해주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어대를 보여주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헌 태감이 맞으시는군요. 그런데 다른 분은 어대를 보여주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니, 나만 보여주면 되었지, 무슨 둘 다 본단 말인가?”
이헌이 변명했지만, 굳어진 내 얼굴.
그의 물음에 내가 당황하자 그가 나를 등롱으로 비추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헌 태감 어른 저자도 분명 환관이란 말이지요?”
“그렇네. 내 이번에 맡은 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의 물음에 이헌이 환관이 맞는다고 대답했지만, 금군의 쏘가리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내 바지춤을 지적하며 되물었다.
“그런데 환관인 저자의 바지춤이 어찌 저리 불룩한 것이지요?”
“뭐? 뭐라!?”
그의 지적에 태감이 놀란 눈으로 내 바지춤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낭패라는 표정.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그런 당황한 느낌.
“아니, 이, 이 사람아 뭐가 부, 불룩하단 말인가! 어두워 자, 자네가 잘못 본걸세.”
“바지춤이 저리 불룩한데 말입니까? 그쪽 분 잠깐 내려보시겠습니까?”
‘흐, 흑차에 실려있는 남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목이 달아난다고 하지 않았나? 잘못이면 이거 목이 떨어지겠구나!’
나를 끌어내리려는 아장 말에 당황할 때였다.
“거기 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기에 이리 시끄러운가?”
누군가에 목소리에 나를 끌어내려던 아장이 옆을 보며 대답했다.
“지휘사(指揮使) 어르신. 지금 흑차로 의심되는 마차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뭐라 흑차? 어디.”
-척척척
갑옷을 입은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가 나고, 곧이어 마차의 문에 머리를 들이미는 또 다른 남자.
그가 등롱으로 마차 안쪽을 비춰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외쳤다.
“저놈인가! 그럼 어떤 놈이 흑차를 안으로 들이려···. 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지휘사.
지휘사라면 오백 명 정도의 병졸을 거느리는 중대장 같은 위치.
그가 태감 이헌을 확인하더니 지진 난 동공으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충 지휘사 반갑네. 오늘 번인가?”
썩소를 머금은 이헌의 인사.
전충이라는 지휘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이헌 태, 태감 어르신···.”
“자네가 오늘 번이었으면 내 미리 이야기해두는 것인데, 급한 일인지라···. 그나저나 밑에 아장을 잘 두었구만. 아주 쓸데없이‘충직’해.”
-콱!
이헌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들려오는 충격음.
그제야 무슨 일인지 눈치챈 지휘사가 팔꿈치로 아장을 찍어버린 모양이었다.
“커흑!”
자기 배를 움켜쥐며 사라지는 아장.
지휘사가 아장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로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래, 수고하게···. 아차. 내 잊을 뻔했구만.”
그러나 마차가 막 출발하려는데 뭔가를 잊었다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기는 이헌.
그가 냉랭한 표정으로 지휘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살살하게 살살···. 실수 좀 했기로서니 사람을 죽이면 되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주, 죽이라는 말인가? 환관들이 여자들만큼 독하다더니···’
그렇게 다시 황궁 안으로 마차가 출발하자 뒤에서 뭔가를 두드리며 푸닥거리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퍽! 빡!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이야! 이 멍청한 놈!”
“커흑, 저는 황명을···.”
“황명!? 태후께서 지금 수렴청정하시는데, 그 황명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 그리고 태후의 식사를 책임지는 이헌 태감의 체면은 생각지도 않은 것이냐! 멍청한 놈!”
울부짖는듯한 지휘사의 목소리.
시대와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어느 군대나 쏘가리는 문제가 큰 모양이었다.
***
황궁 서문 입구에서 목이 떨어지나 싶었지만, 간신히 도착한 황궁 안.
황궁에 도착하자 눈이 가려지고 이헌 태감의 손에 이끌려 어떤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렇게 눈을 가린 채로 한참을 걸어. 눈을 가린 안대를 풀고 나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주방.
여러 가지 재료들이 깔끔하게 준비되어 좋은 향이 솟아오르는 곳이었다.
“자, 여기서 요리를 하면 되네. 특별한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곳이지만, 내 몇 명의 선공과 심부름할 아이들을 준비해두었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게나. 그리고 요리가 끝나고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말하면 내게 연락해 줄걸세. 그럼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는 나에게 당부를 남기고 곧바로 사라졌고, 나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훑었다.
‘황실 주방이라.’
송나라에 전생한 후 처음 보는 최고급 설비의 주방.
전생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이정도면 초호화 초대형.
품에 들고 있던 웅장이 담긴 단지를 도마에 내려두고 손을 한번 풀었다.
-우두둑 우둑.
그리고 요리를 돕기 위해 모인 자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어디 태후께서 드실 웅장이나 한번 만들어볼까? 불을 올려주시오!”
“예! 어르신.”
태감이 말을 잘해두었는지, 내 부탁에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