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약(靈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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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섰으니 서두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준비할 것이 많았던 것.
곧이어 헐레벌떡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서 요리를 준비해야 했으며, 요리를 만들 냄비도 준비해야 했다.
“영영아, 점소이에게 지필묵연을 빌려와 주지 않겠느냐?”
“네, 금방 다녀올게요.”
잠시 후 영영이가 빌려온 지필묵연을 이용해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이건 뭐죠? 노공. 뭔가를 만드시려는 건가요?”
내가 그리는 그림을 보고 무엇인지 궁금해 물어오는 아내.
난을 치는 것도 아니니, 내가 그리는 그림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세부적인 크기가 쓰여 있으니, 뭔가를 만든다고 생각은 하는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물건인지라 감을 못 잡는 느낌.
“아 이것은 냄비라오. 혹시 돌아다니다가 철장포(鐵匠鋪)를 보았소?”
“아, 제 쪽에는 철장포가 없었어요.”
만들 것이 있어 도면을 그리는 것이기에 혹시 대장간을 보았는지를 묻자, 보지 못했다는 아내.
그런데 옆에서 약간 흥분한 듯한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공, 제 쪽에 있었어요! 여기 철장(鐵匠)은 아주 뛰어난 자인 것 같았어요! 제 검을 보더니 얼마나 칭찬하던지! 제 검에 푸른 빛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하늘빛이라고, 만져보고 감탄까지 했다니까요!”
갑자기 이상한 기어가 들어간 소소.
평소에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칼 이야기가 나오니, 그녀는 거침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평상시 정속주행에서 5단 기어로 바로 넘어가 버린 느낌.
심지어 모르는 자에게 검까지 보였다니, 검 이야기가 나오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얼굴의 소소에게서, 눈 녹은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계곡처럼 이야기가 쏟아져 내렸다.
“벨 때 손맛이 어떠냐 물어서 제 소감을 알려주었더니요. 검이 제가 아니라 오라버니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까지 눈치를 채더라니까요? 그래서 그와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부인에게 차 대접까지 받고, 나중에 검을 가져오면 저에게 맞게 손을 봐준다고 했지만요. 저희가 며칠이나 머물지 알 수 없어서···. 물론 손을 보지 않아도 베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응? 아···. 그,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요.”
‘검타쿠 확인.’
한참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소소의 반응에 당황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우리 셋의 시선을 느낀 소소.
그제야 소소가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은공. 제가 검 이야기만 나오면···.”
영영이는 먹을 거, 소소는 검.
둘의 취향은 아주 확고했다.
그리고 갑자기 든 생각.
‘그런데 아내인 청이는 뭘 좋아하는 거지?’
고개를 돌려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짓는 아내.
소소의 반응이 재미있는 모양.
그녀의 미소에 나중에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라고 대답할 테지만, 말이다.
‘이것 참···. 나란 놈.’
아무튼 소소의 반응을 보니, 대장간 쪽은 소소에게 맡겨야 할 모양.
웃으며 소소에게 부탁했다.
“소소. 그러면 내 대장간에 부탁할 것이 있는데, 그자에게 검을 한번 보아달라 하는 게 어떻겠소? 우리가 며칠 더 있을 듯한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마 오라버니에게 받은 검을 계속 그대로 쓰고 있던 모양인데, 원래 오덕들은 튜닝을 참을 수 없는 법.
그것이 또 자신에게 맞춤 튜닝이라면, 당연히 해줘야 했으니까.
그러자 떨리는 소소의 목소리.
“그, 그래도 되나요!? 괘, 괜찮은데 말이지요···.”
두 주먹을 꽉 쥔 손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대답.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저, 정말로요? 정말 정말?”
그녀의 물음에 황제께 내려받은 은자를 전표로 바꾸기도 했고, 여행에 챙긴 돈이 제법 되는지라, 그녀에게 모든 오타쿠들의 희망 무제한 튜닝을 허락했다.
“돈이 많이 들어도 되니, 잘 보아달라고 하시오.”
그러자 소소의 붉은 입술이 떡하고 벌어지며 들려오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
“그, 그렇게나? 가, 감사합니다. 은공!”
“아, 그리고 가는 김에 내 채도(菜刀)도 가져가 한번 손봐달라고 해주겠소? 한번 손볼 때가 되었지. 날을 좀 세워 달라고 해주시오. 종이에 그린 것도 준비해달라 해주시고.”
“아, 알겠어요! 은공!”
그렇게 그린 도면을 소소에게 부탁하고, 먹을 것은 영영이를 시키기로 했다.
“영영아, 손님들이 오면 요리를 대접해야 하니, 점소이에게 내가 적어주는 재료들을 준비해달라 부탁하거라.”
“네, 가가. 그런데 여기 요리사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요?”
“거의 할 것이 없으니 이대로 준비해만 달라고 하거라. 준비는 내가 밤에 내려가서 할 테니.”
“예, 은공.”
그렇게 둘에게 지시가 끝나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제일 중요한 일인가요?”
자기도 당연히 임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아내.
그녀에게도 임무를 맡겨야 했다.
지금 저 말은 첫째 아내의 위엄을 위해, 나에게 제일 중요한 일을 맡기라는 말이었으니까.
머릿속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어서 나에게 제일 중요한 임무를 내어놓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 흑사(黑紗)형에 처하겠어요!’
다른 건 다 양보하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는 빠질 수 없는 느낌.
“다, 당연히 주, 중요한 일을 마, 맡겨야지. 부인은···. 그, 그렇지! 약재를 좀 사다 주시겠소?”
“어떤 약재 말입니까?”
“천초(茜草)를 좀 사다 주시오.”
그래, 이 요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아내에게는 이걸 부탁하기로 했다.
“천초요?”
“정확히는 천초근(茜草根)이 좀 필요하오.”
***
이튿날 밤.
이맘때쯤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일찍 저녁을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늦어지는 화산과 종남의 연락.
긴장이 풀려 차나 한잔할까 테이블에 앉았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형수님, 저 승곽입니다.]
‘아 시바! 이런 때 갑자기!’
승곽이었다.
차를 마시려다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이빙하듯 침상으로 몸을 던졌고.
그러자 침상 위에서 아래 있는 덕구와 장난을 치고 있던 영영이가 얼른 나를 받아 침상에 눕혔다.
[가가, 얼른 누우세욧!]
그리고 그렇게 내가 눕자, 영영이가 아내와 소소를 향해 신호를 주었다.
[됐어. 소소야 청아.]
“누, 누구신가요?”
[형수님, 저 백승곽 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승곽이.
그리고 바짝 쫄아 있는 승곽이의 뒤로 두 명의 남자가 헐레벌떡 들어서 침상 쪽으로 달려왔다.
앞에 선 것은 역시나 화산파 장문인 태청양.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식룡! 이게 무슨 일인가!”
“크윽···. 자, 화, 화산의 장문인께서 여긴 어찌···.”
“이, 이 사람 누워있게 인사불성이라더니, 그나마 정신을 차렸구만! 다행이네!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왔네!”
몸을 일으키는 척을 하자, 나를 다시 눕히며 화산의 장문인이 뒤의 승곽이에게 소리쳤다.
“아니, 승곽아 어찌 네 거짓을 사부인 내게 고하였느냐!”
“예? 거짓이라니요? 아, 아닙니다. 사부님.”
거짓을 고했냐는 물음에 정색하는 승곽이.
하지만 화산의 장문인은 그런 승곽이를 분노해 다그쳤다.
“네, 분명 식룡이 한 대 맞고 혼절했다 하지 않았느냐!”
“그, 그렇습니다. 사부님.”
“어디 이게 한 대 맞은 얼굴이란 말이냐! 대체 종남의 녀석들과 무슨 짓을 한 것이야!”
화산의 장문인이 오바를 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게 머리에 멍들어본 사람은 안다.
나도 전생에 야구장에 놀러 갔다가 공 받는다고 깝치다 얼굴을 공에 맞아본 적이 있는데, 이게 처음에는 혹이 날 뿐이지만, 혹이 가라앉으면 멍이 들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피멍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 멍이 주변으로 퍼지는데, 아마 거울을 못 보긴 했지만, 목과 어깨 그리고 얼굴 절반 정도를 멍과 피멍이 덮고 있을 터.
안에서 생겼던 출혈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대가 아니라 집단 린치당한 얼굴이 되어버리는 것.
맨날 튼튼한 무림인들만 보다가 일반인인 내가 다친 것을 보니, 가늠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억울하다는 표정의 승곽이.
약조한 것이 있으니 도와주기로 했다.
저러다 승곽이 지는 매화꽃과 함께 화산의 봉우리에서 뛰어내릴 것 같았으니까.
“아, 아닙니다. 장문인 한 대 맞습니다.”
한 대가 맞는다고 변명해주었지만, 화산의 장문인은 이유가 어쨌든 승곽이를 조질 모양이었다.
아무튼 승곽이 잘못이라는 느낌.
“아니, 한 대가 맞단 말이오? 그렇다면 더욱 말도 안 되는 일. 살초를 펼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상처가 남는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리고 승곽이가 직접 그런 것도 아니니···.”
“어허, 이 사람 승곽이가 혼날까 그러는 것인가? 하여튼 이 사람 인품하고는. 내 그러면 저놈을 참회봉에 일 년만 가두겠네. 제갈가의 접각부를 이리 만들었으면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크게 일이 번질까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승곽이가 수금 조직원 총책임자였으니, 무조건 처벌 확정이라는 느낌.
승곽이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주며 괜히 아픈 척을 해주었다.
‘승곽아 형은 할 만큼 했다.’
“동생은 죄가 없는데, 크윽···.”
“이런,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데 신경을 쓰게 했구만, 걱정하지 말게 내 자네를 위해서 본문의 영약을 가져왔음이니. 이거 한 병 먹으면 금방 나을 것이야. 아무렴.”
‘무, 무슨 약!? 여, 영약!?’
영약이라는 말에 솔깃한 귀.
그간 돈이나 인맥 챙길 생각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인연도 없었던 영약.
내가 인사불성이라니까 영약을 챙겨온 모양이었다.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그것.
통도 크셔라.
아, 이거 종남 도와주는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영약까지 받아먹고 종남을 도와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이 아무래도 양심이 있으니까.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화산의 장문인을 바라보자, 그가 뒤를 보며 말했다.
“약당주(藥堂主) 어서 가져온 것을 꺼내 보게.”
“예, 장문인.”
그러자 약당주라는 늙은이의 품에서 나오는 작은 병 하나.
그가 전생에 약국가면 많이 볼 수 있는 강장제 사이즈의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영단이 다 만들어졌으면 좋았겠지만, 마침 다리는 과정이라 그대로 가져와 약효는 좀 떨어져도 자네를 일으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네.”
그의 말에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약을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한테 쓸 일이 생겨 제조 중인 단약 한 알분의 엑기스를 뽑아왔다 뭐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곧바로 안 먹은 것보다 나을 것으로 생각하며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그래도 저게 어디냐. 저걸 먹으면 더 건강해지겠지? 산에 오르거나 길을 걸을 때 숨이 차지도 않을 것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얼마나 대단한 영약인지를 물었다.
“그, 무슨 약인지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아, 매화영단(梅花靈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탕약이니 매화영탕(梅花靈湯)이라고 불러야 하나?”
“매화영탕!”
매화 오타쿠 아니랄까 봐 네이밍센스가 좀 구렸지만, 약당주라는 노인이 작은 병의 마개를 열자 흘러나오는 진한 향기.
-뿅
병을 열자마자 흘러나오는 진한 매화의 향기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는 작은 병.
나도 모르게 내 머리가 영약을 향해 마중을 나가기 시작했다.
쭉 내밀어지는 입과 자연스럽게 거북목이 되는 머리.
그렇게 혀까지 마중을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위중한 병자에게 되다만 단약을 먹인단 말인가?”
그러자 나에게 다가오던 병이 뒤로 물러나며 병의 마개가 닫혔다.
‘아니, 누가 지금 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분위기 조지냐?’
눈앞에서 멈춰진 영약에 짜증 나는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자, 엄청 푸근하게 생긴 남자가 메기수염을 어루만지며, 역시나 뒤로 두 명의 남자를 끌고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식룡, 처음 뵙겠소. 나 종남의 장문인 천무자라 하네. 좋은 일로 만나면 좋았을 것을,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만나게 되어 미안하네.”
‘아, 원조집 주인.’
푸근하게 생긴 것이 딱 원조집 주인처럼 생겼다고 생각할 때, 그가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종남 제자의 ‘실수’로 사경을 헤매게 했다니 먼저 사과하겠소. 내 그래서 식룡의 몸을 돌보기 위해서 ‘영단’을 챙겨왔으니, 되다만 영약 말고 이걸 드시게. 본문의 유운단이오!”
그리고 그가 품에서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자, 하나의 백색 영단이 나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은빛이 도는 새하얀 알약.
자르르 흐르는 윤기와 유운단이라는 이름이 걸맞게 높은 산 구름을 머금은 듯한 그런 드라이아이스 효과가 영단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영단을 향해 속으로 인사했다.
‘아, 안녕···.’
역시 원조집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