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탕과 홍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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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문인이 물러나고 침상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환자인 척 연기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
“아이고, 아픈 척하는 것도 힘들구나···.”
멀쩡한데 아픈 척하는 것은 생각보다 고도의 집중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했다.
혹시라도 두 고수에게 들킬까, 말을 하거나 움직일 때도 나이롱환자인 것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전생에 자동차 사고 나이롱환자들은 대체 병원에서 몇 달씩 어떻게 누워있는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노공.”
아내의 말에 같이 고개를 주억거려주는 영영이와 소소.
‘그래, 내가 제일 고생하긴 했지. 항상 장해 청운이는.’
얻어맞는 것에서부터 처소에서 감금 생활까지 내가 제일 고생하는데 맞긴 했다.
그렇게 대견한 나 자신을 칭찬할 때.
둘의 손에 들려있는 두 가지 영약이 식탁 위에 놓였다.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두 영약의 모습.
화산과 종남 둘을 적당히 화해시킬 건더기만 만들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보험사기를 친 것처럼 되어버린 상황.
보상금이 좀 세게 나온 느낌이 있었지만, 양쪽에서 챙겨준다니 어쩔 수 없었다.
뭐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기어코 챙겨준다는데 내가 어쩔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먹고, 이 집안의 사내이자 가장으로서 우뚝 ‘설’ 수밖에.
“그런데 가가, 가가가 다치셨다니까 화산과 종남에서 놀라긴 했나 봐요. 두 문파의 장문인들이 며칠 만에 영약까지 싸 들고, 이리 헐레벌떡 달려온 것을 보니까요.”
-달칵.
신이 난 목소리의 영영이가 영약이 든 상자를 향기를 맡아보고 다시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오빠인 내가 좀 멋져 보이는 모양.
피식 웃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찌 먹는다? 큰 거? 아니면 작은 것부터?”
무심코 던진 한마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를 제외한 셋에게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모양이었다.
곧바로 셋에게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아까 전음으로 나에게 말했던 내용들의 연장선.
“그냥 드셔도 몸에는 좋으시겠지만, 그러면 기운 대부분이 소실되니. 너무 아깝습니다. 역시나 내공심법을 익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래도 제갈가의 내공심법이···.”
역시나 내공심법을 익히는 게 좋을 거라는 아내의 의견.
은근슬쩍 제갈가의 내공을 추천하는 아내였다.
그러나 그때 항상 모든 것을 아내에게 양보하던 영영이가 그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영영이의 의외의 모습.
“청아, 물론 제갈가의 내공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가께서는 식룡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계시니, 앞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고 먹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자면 잘못해서 독 같은 것을 드실 수도 있을 테고, 당가의 내공을 익혀서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가 할아버지께 당가의 상승 심법을 전수해달라고 해볼 테니까 말이야, 청이 너도 좋지? 그치?”
뭔가 그럴듯한 의견이지만, 요리사가 무슨 독을 먹을 일이 있겠나.
영영이가 자기가 ‘생각’을 해봤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이미 이건 잘못된 제안이었다.
영영이는 생각보다는 몸이 먼저 나가는 아이니깐.
분명 나에게 당가의 내공을 익히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말일뿐.
그러자 소소도 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은공께서는 요리를 위해 채도를 사용하시니, 검가인 저희 남궁의 심법이 좋지 않을까요? 채도를 쓰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게 소소의 말까지 끝나자 세 여자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고, 셋의 눈에서 빠직거리며 불꽃이 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까지 서로 양보하고 화기애애했는데, 지역구 조폭 가문이라 그런지 무공만큼은 서로 양보하지 못한다는 그런 기 싸움.
타 조직의 내공은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꿀꺽
셋의 모습에 이거 말을 잘못하면, 오늘 우리 집안 콩가루 되겠다고 생각할 때, 셋의 입이 동시에 벌어지며 똑같은 물음이 들려왔다.
“노공, 그래서 노공은 어떤 내공이 마음에 드시죠?”
“가가, 그래서 가가는 어떤 내공이 마음에 드시죠?”
“은공, 그래서 은공은 어떤 내공이 마음에 드시죠?”
분명 그동안 나를 굴려댄 그분께서 이젠 나의 행복을 바랐지만, 이렇게 큰 행복을 바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긴 했지만, 이렇게 크게 행복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어···.’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제기랄!’
그렇게 셋이 기세등등하게 자신과 같은 내공을 얻길 원했지만, 그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다, 당장! 세, 셋 다 배우겠소!”
정작 내가 셋의 압박에 못 견디고, 그러면 내공 셋을 지금 당장 배우겠다고 배를 째자 셋 다 당황했으니까 말이다.
“예?”
“아니, 가가, 내공심법은 많이 배운다고 좋은 것이 아니에요!”
“은공, 하, 하나만 하시지요!”
내공심법이란 가주들이 허락해야 배울 수 있는 것인데, 가문에서 호적 파왔다고 주장하는 소소조차도 지금 당장 내공 전달해달라는 내 말에는 한발 물러섰다.
“지, 지금 당장은 안되고요, 일단 아버님에게 허락받아야 하니까요. 하, 하지만 배우겠다고 하시면, 아무래도 허락도 받기 쉽고, 제가 어떻게든 허락받아낼···.”
내공심법이야 가문의 기밀이나 마찬가지니, 다들 내가 세 가문 내공심법을 배우기를 원하기는 해도 막 지르지는 못하는 느낌.
“그러면 일단 허락받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도록 합시다.”
내 결론에 셋이 다시 시선을 주고받더니 암묵적 합의에 도달했다.
“알겠습니다. 노공.”
“예, 가가.”
“예.”
영약에 유통기간이 있을까 봐 조금 후달리긴 했지만, 나는 나의 운명을 조금 보류하는 것으로 가정의 평화를 지켜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집행 유예인가···. 잘못해서 가중처벌이 되진 않겠지?’
있어도 먹질 못하는 영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앞에 있어도 먹지 못하는 것이 지금 내 처지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했다.
‘정말 먹고 싶구나!’
괜스레 영영이처럼 두 영약의 향만 들입다 들이켰다.
***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모처럼 객잔 일 층으로 향했다.
이따 밤에 장문인들과 훠궈를 먹기 위해서는 훠궈의 육수를 준비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훠궈란 중국식 샤부샤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약간 다르다.
샤부샤부가 끓는 탕에 고기나 채소를 살짝 익혀 먹는 요리라면, 훠궈는 국물에 재료들을 때려 넣고 푹 익혀 먹는 요리.
뜨겁게 끓어오르는 육수에 얇게 자른 고기와 채소들을 넣고 살짝 익혀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가 아니라 육수가 듬뿍 베게 푹 익혀 먹는 것이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원래는 그냥 냄비에 끓여 먹는 요리였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냄비를 반으로 나눠 두 가지 육수에 재료를 익혀 먹는다.
그 두 가지 육수를 홍탕(紅燙), 백탕(白燙)이라 부르는데, 백탕은 희고 담백한 육수이고, 홍탕은 붉고 고추와 화초가 들어간 매콤한 맛이 특징.
그 육수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는 것이다.
객잔 부엌으로 들어서자 점소이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어르신 부탁하신 것은 다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래, 고맙네.”
“혹시 더 부탁하실 것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쇼.”
이놈이 이리 싹싹한 것은, 내가 영영이를 통해 재료를 준비해달라고 돈을 넉넉히 주고, 남는 것을 심부름 값하라고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 주인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 객잔을 유산으로 넘겨받은 남자라는데, 알고 보니 과거시험 준비하는 서생이라고.
객잔에 관심이 거의 없어 한 달에 한 두어 번 정도 와서 보는 정도이고, 점소이가 거의 반쯤 객잔의 주인을 맡고 있었다.
송 시대 공시 장수생인 주인이 객잔에 관심이 없으니, 객잔이 잘될 리는 없고.
요리사가 아프다는 말도 알고 보니, 아픈 게 아니라 그만둔 것이라고.
그러다 보니 점소이가 벌어들인 돈 중 일부 금액을 주인에게 주고, 남은 것은 자기가 먹는 모양인지, 우리가 와서 쓰는 돈에 저리 싹싹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쓰지 않았지만, 제가 어제 깨끗하게 청소해두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부엌은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던지 나무로 된 도마나 이런 것들이, 바싹 말라있는 느낌이었다.
도마가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는지, 마르다 못해 갈라져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가 사용한다니, 깨끗하게 해두긴 한 느낌이긴 했다.
부엌을 한번 살피고 점소에게 제안했다.
“자네, 내 심부름 삯을 더 쳐줄 테니, 요리하는 걸 좀 도와주겠나?”
“제, 제가 말입니까? 저는 요리는 잘 못하는뎁쇼?”
요리를 도와달라는 말에 난처해하는 점소이.
그렇지만 나도 점소이 따위에게 요리 보조를 맡길 생각은 없었다.
“아, 불이나 피우고 물이나 떠오고 하면 되네.”
“그런 일이라면 제가 도와야지요! 말씀만 하시지요.”
삯을 준다는 말에 점소이가 신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그러면 간만에 훠궈 좀 만들어볼까?”
제일 먼저 할 일은 백탕을 만드는 것.
점소이에게 솥에 물을 채워 불을 지펴달라 부탁하고, 곧바로 닭을 손질했다.
-탕. 탕.
점소이가 준비해 준 닭의 배를 가르고, 객잔 부엌에 있는 채도로 닭을 뼈를 분리했다.
내 채도는 철장(鐵匠)인 대장장이에게 맡긴 상태이니, 객잔의 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
-스윽.
채도 제일 안쪽 모서리로 닭의 허벅지의 결을 가르며, 닭의 다리뼈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칼끝이 부드럽게 매끄러운 닭 다리뼈의 표면을 타고, 칼끝이 그렇게 닭뼈의 표면을 탈 때마다 갈라지는 근육의 결.
부드럽게 갈라지는 근육의 길을 따라 칼끝을 움직이자 그 끝에서 곧 연골이 느껴졌다.
손목을 부드럽게 돌려 근육의 말단 부분이 달라붙은 연골의 연결부위를 끊어주자 힘을 잃은 통통한 다리 살.
곧이어 다리뼈가 완벽히 분리되어 닭의 몸통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렇게 살과 뼈, 연골을 분리.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솥으로 던져넣었다.
닭뼈를 바르는 것은 백탕의 기본 베이스인 닭 육수를 내기 위함.
전생에 훠궈를 배울 때는 이 요리의 기원이 상주(商周)시대에 이른다고 배우긴 했으나, 당시에는 맹물에 끓여 먹었던 요리이고, 송 시대쯤에는 소나 돼지의 뼈를 이용했다고 배운 기억이 난다.
하지만 두 장문인을 모시고 식사하는 장소에서, 천한 돼지의 육수를 낼 수는 없었기에 전생의 백탕에 맞춰 기본베이스는 닭으로 정한 것.
소만으로 내는 것보다 닭이 주재료이면 더욱 깊은 맛이 나니까 말이다.
닭의 뼈를 잘라 냄비에 던져넣고, 다음으로 넣은 것은 소의 뼈.
백탕은 한가지 뼈로 끓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뼈를 넣어 진한 육수를 우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소뼈가 차례대로 솥으로 잠수하고, 이어서 넣은 것은 생강, 쪽파, 양파.
닭과 소뼈의 잡내를 잡기 위해 재료들을 추가했다.
“아, 그리고 내(奶 우유)는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요.”
우유를 찾는 내 물음에 얼른 우유를 가져다주는 점소이.
백탕의 육수에 웬 우유냐 싶겠지만 전생 설렁탕집의 육수에 프림을 넣는다는 말처럼, 백탕의 진한 맛과 색을 위해서는 우유는 필수.
-콸콸콸.
그렇게 우유까지 넣고 나자 백탕 준비가 완벽히 끝이 났다.
이제 육수가 끓어오르면 위에 약간의 구기자와 대추를 던져주는 것만이 남은 일.
이제 홍탕을 준비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식사하고 저자에 나갔던 아내가 부엌으로 들어섰다.
“노공, 다녀왔습니다.”
“오, 파는 곳을 찾았소?”
“예, 알고 보니 이곳이 섬서가 천초(茜草)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더군요. 해서 천초근(茜草根)을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침 일찍 저자로 나선 것은 내가 부탁했던 것을 찾기 위해서.
쉽게 구했다는 것을 보니, 부탁했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부탁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홍탕에 들어갈 가장 중요한 재료 천초근(茜草根).
아내에게 천초근을 부탁한 이유는, 백탕은 전생의 조리법대로 구현할 수 있었지만, 가장 문제점은 홍탕.
홍탕에 들어가는 다른 재료야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고추.
매운맛이야 후추와 화초, 등 초, 마초, 수유를 이용해 낸 기름을 넣어 매운맛을 살린다 해도 색을 낼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이었다.
홍탕의 붉은색을 내는 것은 고추니까 말이다.
고추가 아직 전해지지 않은 송 시대에 붉은 홍탕을 만들 방법이 없었던 것.
그런 이유로 내가 생각한 대체품은 천초근.
소소의 붉은 입술처럼 붉은 비단을 염색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약재로도 쓰이는 천초.
한국어 꼭두서니.
그것이 내 대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