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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 (204/344)

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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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大漠), 달단(韃靼 타타르)인들이 고비라 부르는 사막. 

그 메마르고 광대한 대막은 봄을 맞아 여기저기 푸른 풀들이 돋아나 작은 습지들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 겨우내 내렸던 눈이 녹아내리면서 생긴 일. 

그런 봄의 기운이 꿈틀대는 대막 한가운데 나타난 풀의 섬들을 두 인영이 빠르게 지나치고 있었다. 

-탓. 

갈색과 백색의 털옷을 입은 두 명의 여자. 

둘은 한번 내디딜 때마다 십여 장을 움직이며 빠르게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이동하던 두 여자가 멈춰 선 곳은, 저 멀리 이제는 더 이상 자라난 풀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궁주. 잠시 쉬어가시지요. 한동안 초지(草地)가 나오지 않을 듯하니까요.” 

“그럴까? 그리고 궁주라는 말은 인제 그만하거라. 궁은 이제 동생이 이었으니까 말이다. 너도 동생을 따르면 좋겠다만···.” 

면사로 얼굴을 가린 벽안 여자의 말에, 갈색 털옷을 입은 여자가 갑자기 엎드려 소리쳤다. 

“궁주께 이미 충성한 몸. 돌아가라 하시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나이다!” 

“하아···. 알겠으니 그만하거라.” 

“예, 궁주님!” 

궁주라 부르지 말라 거듭 말하는데도, 거듭 궁주라 부르는 우빙(右氷). 

빙궁부터 따라붙어 돌아가라는 말만 꺼내도 저리 죽겠다고 하는 우빙 말에 빙설화(氷雪花)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쪽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자신이 빙궁주의 자리를 버리고 대막을 건너고 있는 것도, 우설이 따라붙어 자기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도 가만 따지면 전부 그 사람 때문이었기 때문. 

애초에 궁주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멍청한 사람 같으니! 뭐가 중원에서 제일 똑똑한 가문의 후계란 말인가!’ 

평소에는 그렇게나 똑똑한 사람이 왜 자신과 연관되면 바보같이 행동하는지, 정말 모를 노릇. 

그녀가 전 궁주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넘겨받은 북해빙궁(北海氷宮) 궁주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기고, 이리 시급하게 중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남편과 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헤어질 때 바로 따라오거나 연통을 주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전 궁주이신 어머니가 하셨던 십구 년 후에 딸만 보내라는 말만 듣고, 십구 년 동안 정말 연락 한번 없던 바보 같은 사람과 당시 눈물을 머금고 떼어낸 젖먹이 딸, 둘을 보기 위해서. 

자신은 어머니의 감시를 받아 먼저 연락할 수 없어, 그렇게나 연통을 기다렸는데. 

하루 이틀 기다린 것이 십구 년. 

십구일, 열아홉 달도 아니고 십구 년! 

-뿌드득. 

다시 떠올린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주먹을 움켜쥔 그녀의 주변으로 냉기가 스멀스멀 퍼져나가자, 이제 막 싹이 오른 풀들이 냉기를 맞고, 이른 겨울 서리를 맞은 것처럼 그대로 얼어 죽어갔다. 

참다못해 어머니 몰래 도망쳐 나왔다가 대막에서 잡힌 것만 몇 번이던가! 

어머니가 냉랭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때 바로 따라와서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사정했으면, 못이기는 척 져주셨을 텐데. 

매일같이 연통도 없는 놈 왜 기다리냐고 하셨던 말씀이 귓가에 다시 한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구, 궁주님. 제가 혹시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까?” 

우설의 말에 분노에서 빠져나오자, 흩어지는 시린 냉기. 

긴장해있는 우설을 향해 대답했다. 

“아니. 예전 생각이 나서 말이다.” 

그러자 우설이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 중원에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있으신 모양이군요!?” 

“원수? 원수라면 원수겠구나.” 

그래, 원수라면 원수. 

빙설화는 중원에서 만나면, 그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제갈천! 가만두지 않겠어! 십구 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다시금 분노에 떨던 빙설화는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르고 우빙과 함께 다시 남쪽으로 쏘아졌다. 

초원의 달단 부족들의 세력이 강성해져, 여자를 약탈해가는 놈들의 풍습으로 초원은 이미 반쯤 전쟁터. 

혹시라도 딸아이가 험한 곳을 가로지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발걸음을 서둘려야 했다. 

올해가 딸과 헤어진 지 십구 년째이니까. 

*** 

대장간인 철장포가 있다는 상주 외곽에 가까워져 오자, 소소의 발걸음이 눈치채지 못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분명 넷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새 한 걸음 두 걸음 앞서나가더니 저 앞에 가고 있는 소소. 

“훗···. 소소 언니가 기다리기 힘든가 봅니다.” 

그 모습에 여자들 사이가 좀 더 친밀해진 모양인지, 아내가 소소를 언니라 부르며 웃었다. 

그리고 부엌을 빌린 김에 만든 환병을 여행 시작부터 먹고 있던 영영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검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그러는지···. 냠냠.” 

“원래 검은 잡는 자들은, 자기를 위해 만들어진 첫 검을 받아드는 순간이 가장 설레는 법입니다. 당 소저. 그리고 막곡 철장은 아무 사람의 부탁이나 들어주는 자가 아니니, 저럴 만도 합니다. 저희 화산에서도 그가 만든 검이나 수리를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자기도 매화오타쿠이자 검타쿠라고 소소를 이해할 수 있다는 목소리로 말하는 승곽이. 

그렇게 철장포에 도착하자 소소가 반가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막 대백! 천 대마(大媽)!” 

소소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요 며칠 계속해서 어딘가를 들락날락하더니, 검이 없이 불안해 그런가 싶었더니, 매일 여길 다녔던 모양이었다. 

막 아저씨 천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 며칠 사이에 친해진 모양. 

대장간은 뜨거운 풀무에서 솟아오르는 열기와 벽면에 걸려있는 검(劍)과 창(槍), 도(刀) 딱 세 가지만 걸려있는 단출한 모습. 

풀무를 살피던 두 부부가 이마에 땀을 훔치더니, 우리 쪽을 바라보며 소소에게 부름에 대답했다. 

“크허허, 소소 아가씨 왔습니까?” 

“소소 아가씨 오늘도 오셨군요?” 

“네, 오늘 완성된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들렀네요. 혹시 완성되었나요?” 

소소의 물음에 아침임에도 벌써 그을음으로 시커메진 얼굴과 손, 그을린 수염을 가지고 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활짝 만개하는 봄꽃처럼 피어나는 소소의 미소. 

잠시 후 사라졌던 남자가 안쪽에서 천에 받친 그녀의 검을 가지고 나오자, 피어난 봄꽃 같던 미소를 머금은 소소의 얼굴은 만개한 여름꽃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검 앞에서 떨리는 소소의 목소리. 

“다, 다된 건가요?” 

“한번 뽑아보시죠. 아가씨.” 

대장장이의 권유에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보는 소소. 

-스르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와 아침의 빛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했다. 

푸르고 시린 검날이 반사하는 푸른 빛. 

-휘잉. 휭. 

그녀의 손목 움직임을 따라서 그녀의 검이 기묘하게 휘어지며 사방으로 푸른 빛을 반사했다. 

그리고 신명이 올랐는지, 소소는 몇 번 짧은 초식 같은 것을 펼치더니, 만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 고마워요! 막 대백! 꼭 수투(手套)를 낀 것 같습니다!” 

“으허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아가씨 같은 분이 지금까지 다른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검을 사용하다니. 허허.” 

장갑을 낀 듯 손에 착 감긴다는 소소의 소감. 

뭐 요리 칼인 채도를 쓰는 나도 좋은 칼은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드니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다시 들려오는 소소의 물음. 

“막 대백 정말 마음에 쏙 들어요. 그리고 그건 준비되었나요?” 

“크허허, 예, 물론입니다. 아가씨. 저 막가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완성했습니다.”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철장. 

이어서 뭔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는 둘. 

그러더니 소소가 조용히 나를 불러왔다. 

“은공 이쪽으로 잠시만.” 

“나 말이오?” 

‘아, 계산하라는 것인가? 그래, 검을 고쳤으니 계산해야지.’ 

그렇게 생각 없이 계산하려 앞으로 걸어가는데 떠오르는 승곽이의 말. 

「막곡 철장은 아무 사람의 부탁이나 들어주는 자가 아니니, 저럴 만도 합니다. 저희 화산에서도 그가 만든 검이나 수리를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대장장이도 약간 장인 냄새 풀풀 나는 느낌이고, 상품은 단 3가지. 

대장간 자체도 이 집 약간 명품가게라고 광고하는 느낌. 

‘아, 이거 알고 보니 대장간계의 오마카세 집이었던가?’ 

하필이면 오마카세 집이라니. 

소소에게 돈 걱정하지 말고 팍팍 지르라고 했지만, 오마카세 집이라는 사실에 움찔하는 마음. 

여친 명품 가방 사주고 결제 금액이 통보되길 기다리는 남자가 느낄법한, 두려운 마음이 솟아올랐기에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오마카세집이라는 사실에 그래도 멋있게 결재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아도, 여자에게 고가의 선물 따위는 전생이나 현생이나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지라 걱정이 솟아오르는 것. 

거기에 내가 요리사 출신이니 오마카세집의 가격구조는 빠삭하니, 더욱 걱정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오마카세라는 것은 주인이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의 모든 실력을 상품에 담는 것이니, 부르는 게 값이니까. 

‘청운아, 괜찮아. 너 돈 많다. 쫄지 마라···. 그런데 이상하게 떨리네?’ 

마음속으로 용기를 북돋아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두려움. 

정 안되면 영영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있으니 마음을 다잡았다. 

가격을 깎으면 모양 빠질 테지만, 우리에게는 또 최후의 보루 영영이가 있으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슬쩍 돌아 영영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영영이를 만나고 난생처음으로 든든한 마음.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발걸음을 이었다. 

그렇게 약간 두려움이 드는 것은 소시민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 나가 폼을 잡은 채 소소에게 물었다. 

원래 이런 장면에서 어찌 말해야 하는지, 클리셰쯤이야 당연히 꿰고 있으니까 말이다. 

떨려도 할 말은 해야 했으니까. 

‘그게 마음에 들어? 그럼 그걸로 할까?’ 같은 말을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래, 소소. 마, 마음에 드시오?” 

“예, 은공 마음에 쏙 듭니다.” 

내 물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소. 

그녀의 표정을 보니 가격을 깎으려 영영이를 부르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소소의 표정은 아무 생각 없이 점원을 향해 일시불을 외쳐야 할 궁극의 결재를 부르는 그런 표정이었으니까. 

‘청운아 너 진짜 여자 미소에 빠져서 그러다가 큰 사고 한번 칠 것 같다.’ 

제갈가에서 노예계약을 할 때가 불현듯 떠올랐지만, 어쩔 수 있나? 

대장장이에게 가격을 물을 뿐. 

“그, 그래 뭐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그, 그래, 철장 어, 얼마나 삯을 드리면 되겠소?” 

화산과 종남도 이용한다니 바가지는 씌우지 않을 것이라 마지막 희망을 떠올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들려오는 호탕한 목소리. 

“이분이시군요? 소소 아가씨?” 

“예, 저의 은공이십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막곡이라 합니다. 허허허···. 그리고 삯은 조금 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물건이 마음에 드셔야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면 돈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니, 분명 소소가 마음에 든다고···.” 

소소가 분명 마음에 든다고 했는데, 이상한 말을 하는 철장. 

약간 시가를 외치려는 느낌이 들어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이거 바가지 씌우려고 운 띄우는 거 아냐?’ 

오마카세 집에 시가라는 궁극의 조합. 

그의 말에 이거 잘못하면 오늘 바가지 옴팡 뒤집어쓰겠다고 생각할 때,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갑자기 나를 빙빙 돌며 위아래로 내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돈 얼마나 낼 수 있을지 살펴보냐?’ 

그렇게 묘한 시선으로 내 체격을 살피던 그는 수건으로 손을 깨끗하게 닦더니, 이어서 갑자기 통보했다. 

“좀 살피겠습니다!” 

이미 살피고 있는데 뭘 더 살피겠다는 것인지.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손, 팔과 어깨, 허리를 등을 만지는 철장. 

“왜, 왜 이러나 가, 갑자기?” 

갑자기 느껴지는 그의 손길에 내가 움찔거리며 몸을 무르자, 소소가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은공. 잠시만요.” 

“아니, 뭔데 그러시오?” 

“다 살폈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소 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군요. 손잡이만 살짝 손보겠습니다.” 

내 몸을 살피던 철장이 철장포 안으로 사라지고. 

안쪽으로 사라져 뭔가 탁탁거리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그가 손에 으리으리한 목함을 하나 받쳐 들고는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뭐, 뭐야? 하나 더 있어?’ 

분명 개조만을 허락했는데, 한 대 더 뽑은 것 같은 소소. 

부잣집 출신이라 씀씀이가 장난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목함 자체도 얼마나 정성을 들여 조각했는지, 대단한 명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옆에서 소소가 채근했다. 

“은공, 어서 확인해보세요.” 

“내가 말이오?” 

“예, 은공의 채도니까요.” 

그제야 떠오른 내가 채도를 맡겼다는 사실. 

‘이거 내 것이라고? 내 싸구려 채도를 어째서 이런 목함에···.’ 

목함안에 든 것이 내 채도라는 사실에 아까보다 불안감이 폭발했다. 

분명 날이나 세워달라 했는데, 내 채도를 담았다는 목함이 내가 맡긴 채도 수백개는 살만한 느낌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건 그냥 내가 갈걸···.’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소소의 눈빛을 대하니 어쩔 수 없었다. 

천천히 다가가 목함을 받아들고 그 뚜껑을 열 수밖에. 

-달칵. 

그렇게 내 떨리는 손에 의해 목함의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 있는 것은 역시나 채도.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이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막곡이라는 철장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하하하. 어르신 것이 맞습니다. 아가씨가 부탁하신 대로 제가 좀 만졌을뿐.” 

‘이게 좀 만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목함 안에 누워있는 녀석은 내가 시장에서 산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 

이전의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에 사용하던 것은 분명히 그냥 일반적인 날을 가진, 나무 손잡이의 채도였는데. 

이것은 전혀 다른 느낌. 

일단 손잡이가 쇠로 만든 용의 꼬리였으며, 손잡이 끝에서 시작한 용은 칼등을 구불구불 타고 올라, 용 머리가 칼끝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흡사 SD 흑룡도(黑龍刀)가 아닌가?’ 

말 그대로 짧긴 하지만, 흑룡이 채도 위에 내려앉은 모습. 

칙칙한 묵빛의 SD 흑룡검이라 불러야 할 녀석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채도를 가지고 마개조를 한 모양. 

이건 이미 채도에서 벗어난 그 무엇이었다. 

심지어 으리으리한 검대와 검집까지 있었는데, 누가 보면 무림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분명 저것으로 요리하면, 식자재를 단칼에 죽여버릴 수 있을 것같은 느낌이 드는 모습.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소소를 바라보자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 

‘마음에 들죠?’라고 묻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영영이와 아내의 목소리. 

“소소 언니···.” 

“소소야···.” 

아내와 영영이가 말끝을 흐리기에 돈을 함부로 흥청망청 써서 혼내려나 싶었는데, 갑자기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소소를 칭찬했다. 

“자, 잘하셨어요! 노공께서 라면 이정도는 쓰셔야죠! 그간 제 마음이 불편했는데, 아주 잘하셨어요!” 

“뭐, 이번에는 소소가 잘했네. 가가의 별호에 맞는 아주 멋진 도(刀)야.” 

“형님 축하드립니다. 막곡 철장의 도라니. 이리 멋진 채도는 처음 봅니다.” 

이어서 들리는 승곽이의 목소리까지. 

내 취향은 아닌데 셋의 취향 저격인 모양. 

‘개쩌네?’ 하는 표정으로 셋이 달라붙어 저마다 도와 소소를 칭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소소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은공, 마음에 아, 안 드세요?” 

자기가 실수한 건 아닌가 하는 표정의 물음. 

그리고 아내, 영영이, 승곽이 그리고 뒤에 있던 다른 화산의 제자와 막곡과 그의 아내까지, 동시에 나를 바라보며 ‘설마? 이게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 있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한번 질끈 감고 대답했다. 

“아, 아니오. 와, 완전히 마음에 드오.” 

그리고 마개조된 채도 값으로 은 백 냥짜리 전표를 지급해야 했다. 

류청운 일생일대 최대 지출이었다. 

*** 

승곽이를 따라 오 일 정도 걸려 도착한 화산파. 

화산파의 입구인 매화문(梅花門)이라는 곳에 도착하는 순간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매화나무들이 가득했다. 

이제 막 개화가 시작되는지 앙상한 가지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 

오는데 오 일이면, 이제 활짝 핀 꽃을 가지고 뒷광고 조지러 갈 화산이 상주에 도착하면 종남이 작업을 할 만큼 한 상태 일터. 

안심하며 매화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장문인이 직접 맞는 환대를 받고, 화산의 장문인과 저녁을 같이했다. 

저녁 메뉴는 매화탕병(梅花湯餠), 밀지매화(蜜漬매화), 매죽(梅粥),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나서는 매화차까지. 

이 새끼들 매화를 사랑해서 다 먹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매화탕병은 매실 가루를 넣어 반죽한 매화 모양으로 찍어낸 밀가루를 닭 육수에 끓여 먹는 일종의 수제비이고, 밀지매화는 눈 녹은 물에 매실과 매화꽃을 담가 향과 맛을 즐기는 음료. 

매죽은 흰 쌀죽에 매화꽃을 넣어 만드는 죽이었다. 

다 먹고 난 소감은? 

[가가, 다 먹고 나니 매화향만 나서 토할 것 같아요.] 

먹을 것을 좋아하는 영영이도 강한 향에 토해버릴 것 같다는 말. 

좋은 것도 어지간해야지. 

이정도면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 

그나저나 화산의 장문인이 예전에 나의 요리를 제자들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다고 했는데, 대충 요리에 매화 좀 띄워서 만들어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다양한 매화 요리를 먹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무슨 음식을 만들어주어 하나 마음 한편으로 고민하며,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화산의 장문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식룡, 내 자네를 초대한 것은 일전에도 말했지만, 제자들에게 자네의 맛있는 요리를 맛보여 주고 싶어서라네. 무, 물론 사례도 할 것이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아, 물론 이리 초대하여 화산의 매화도 구경시켜주시고, 저희를 위해 맛있는 음식도 베풀어주시니 제가 그 값은 해야지요.” 

“하하, 이 사람 역시 호탕하구만.” 

슬슬 본론을 꺼내오는 화산의 장문인. 

그에게 혹시 어떤 요리를 먹고 싶은지 묻기로 했다. 

먹고 싶은 요리가 있을 테니까. 

“그럼 혹시 생각하시는 요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화산의 장문인이 아내와 영영이 소소 쪽을 바라보더니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룡, 혹시 그, 서시···.] 

“안 됩니다!” 

다시금 들려오는 그분의 존함에 정색하며 외쳤다. 

이미 그분은 그분의 가슴과 혀를 내어주셔, 뭇 중원인들에게 희생당하셨었고, 희생당하고 계시며, 희생당하실 분. 

더 이상 그분을 토막을 칠 수는 없었거니와 더 이상 그분을 유린 할 수는 없었다. 

아무렴. 

이젠 다른 분을 팔아먹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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