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왕(偸王) 백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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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
구름이 짙게 낀 송나라의 수도, 동경 개봉부 황궁의 어두운 밤.
황궁의 태후전 뒤편 후원에서 번을 서던 황실 금군들이 큰 나무를 향해 창을 겨누며 외쳤다.
“누구냐!”
분명 갑자기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번을 서던 황실 금군 무리의 수장인 아장(牙將)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태후전과 가까운 곳이니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나무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아장의 손짓에 금군들은 기민하게 나무를 둘러쌌다.
그렇게 아장의 지휘에 병사들이 나무를 포위하고, 그중 무공이 제일 높은 아장(牙將)이 나무를 살피기 위해 나무로 다가서자, 나무 위쪽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울음소리.
“부, 부엉. 부엉.”
구슬픈 울음소리의 주인은 익히 알고 있는 묘두웅의 울음소리.
아마 묘두웅이 봄이 되어 쥐라도 잡으러 나온 듯싶었다.
“뭐야, 묘두응(猫头鹰 올빼미)인가?”
“봄이니 쥐를 잡으러 나왔나 봅니다. 아장.”
“좀 예민했나? 가자! 교대에 늦겠군.”
“예!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아장은 소리의 정체가 묘두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휘하 금군을 이끌고 발걸음을 돌려 후원 밖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더 지체하다가는 교대에 늦을 수 있기 때문.
그렇게 금군들이 헐레벌떡 후원의 문밖으로 사라지자, 아까 금군둘이 둘러쌌던 나무에서 무엇인가가 툭하고 떨어져 내리더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제기랄. 큰일 날 뻔했네. 뭐든지 마지막 순간이 제일 위험한 법이라더니. 살다 보니 늙은이 말이 맞을 때도 다 있구나! 망할 놈의 개 같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누군가의 구시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짙은 먹구름이 살짝 걷히고 보름달이 드러나자, 나무 아래 몸을 웅크린 것은, 얼굴과 머리까지 검은 천으로 가리고, 온몸을 빈틈없이 꽉 조여 맨 잠행복을 입은 한 명의 사람.
머리에 두른 천 사이에 드러난 사납고 날카로운 눈빛과 조여 맨, 몸의 굴곡으로 봤을 때.
묘령(妙齡)으로 짐작할 수 있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백미미.
그녀가 잠행복을 입고 황실에 담장을 넘은 것은, 그의 사부가 내린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미미야, 병신같이 실수하지 말고! 진정하고 마지막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녀는 일단 자기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행술(潛行術)을 펼쳐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최후의 시험에 실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지금 실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던 것.
-스윽.
그렇게 그림자에 녹아든 백미미가 향한 곳은 황실의 태후전.
그 태후전의 지붕 위였다.
‘아직 늦지 않았겠지?’
예민한 녀석에게 들키는 바람에 잠시 지체된 상황.
황실이야 이번 일을 위해서, 벌써 몇 번이나 침입했기에 들어오는 길이라든지, 태후전의 위치,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물건이 언제쯤 나타나는지 정도는 파악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미미는 얼른 지붕 위에 몸을 눕혔다.
늦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이번에 실패하면 다시 열흘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늙은이가 시험이 실패했다고 할지도 몰랐기 때문.
시험에 실패하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려 그녀가 기다리는 물건이 나타나기를 고대할 때.
-삐거덕.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궁녀 서너 명이 태후전에서 빠져나와 미미가 지나왔던 후원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떳나!?’
미미는 곧장 안력을 돋운 후 궁녀들의 손과 품을 살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에 어둠 속에서 궁녀들이 든 등롱에 비친, 까만 흑사(黑紗)로 만든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궁녀 하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떠, 떴다!’
그녀가 고대하던 그 물건이 궁녀의 손에 들려 후원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
-두근두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미미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전신 세맥으로 돌렸다.
단전에서부터 빠져나온 기운이 무엇보다 두 다리에 집중되고, 미미가 그의 사부에게 배웠던 기술 중에 가장 쓸만한 기술이 그녀의 몸으로 펼쳐지려 하는 순간이었다.
전신의 근육이 시위처럼 긴장하고, 그녀 자체가 화살이 되어 쏘아지려 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기회.
이제 뒤는 없었다.
이걸 쓰고 나면 내공의 운용을 멈춘 순간, 한동안 내공을 더 이상 쓸 수는 없으니까.
성공한 후 목표했던 물건을 가지고 빠져나가던지, 아니면 실패하고 몸만 빠져나가든지 둘 중 하나라는 이야기.
내공을 불꽃처럼 몸속에서 불태우며, 마음속으로 초식의 이름을 외쳤다.
‘신풍(迅風)!’
그렇게 내공의 힘으로 미미의 몸이 지붕에서부터 후원에 들어서는 궁녀들 뒤로 화살처럼 쏘아지고, 미미의 빠른 속도를 따라 같이 몰려드는 거센 바람.
미미는 재빠르게 야행복 양쪽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열어 가루들을 흩뿌렸다.
그러자 그녀가 제일 끝에 선 궁녀의 뒤에 도착함과 동시에 흙먼지 바람이 그녀를 따라 궁녀들에게 쏘아졌다.
“웬 바람이!?”
“꺄으. 모래가!”
갑자기 불어온 모래바람에 궁녀들이 기겁하며 눈을 가리고, 거센 바람에 등롱의 불까지 꺼져 한순간 암흑이 되어버린 순간!
이미 미미가 목표했던 물건은 미미의 손에 들려 황궁 후원의 담을 넘어 궁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공이야! 기다려라! 늙은이! 이제 이 짓거리도 끝이야!’
미미의 가슴이 성공으로 미친 듯이 고동치고 있었다.
***
신풍을 쓴 미미가 불어오는 바람처럼 도착한 곳은 개봉부 밖 다 쓰러져가는 도관(道觀).
그 쓰러져가는 도관에 들어선 미미의 전신에서는 미세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배운 내공심법이 몸을 식히는 중이기 때문.
몸에 약간의 탈력감이 밀려오고 있어 몸을 쉬어야 했지만, 성공으로 기쁜 이 순간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늙은이와 정리할 것이 있었기 때문.
그렇게 도관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향한 곳은, 도관 안 다 찢어진 원시천존의 천존상(天尊像) 앞.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 낡아 찢어진 천존상이 매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쿠궁.
그러자 들려오는 기관진식(機關陣式)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그녀가 서 있던 장소 옆에 계단이 드러났다.
드러난 계단으로 미미가 들어서자, 계단은 곧 사라져버렸고, 계단 안쪽 통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커다란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보물의 언덕.
여기저기 켜진 등롱의 빛에 반짝이는 금과 은, 비단과 보석들.
이미 사라졌다는 저 고대의 보물과 이름은 한번 들어봤을 법한 명검과 무기들까지.
그 유명한 황궁의 보고(寶庫)도 이렇게 화려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백미미의 속에서는 열불이 솟아올랐다.
‘개 같은 늙은이!’
왜냐하면 저 보물의 반 이상은 그녀가 훔쳐다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늙은이의 말에 속아, 그의 제자가 되어 무공연습이라며 원치 않은 데도 해야 했던 끊임없는 도둑질!
실패하면 관병들과 부잣집에서 고용한 무사들에게서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야 했으며, 이름도 얼굴도 없는 현상금이 붙어야 했다.
그러나 그 짓거리도 이제는 끝이었다.
품 안의 그것은 그의 사부가 요구한 마지막 물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이 원치 않는 노예 생활을 끝낼 물건이기 때문.
미미는 품 안을 더듬어 물건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렇게 품 안의 물건을 확인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쉰 목소리.
“그래, 크흠. 물건은 가져왔느냐?”
물음과 함께 등롱이 만든 공동의 빛의 그늘에서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노인의 이름은 없었다.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무림인들은 그를 별호만으로 이렇게 불렀다.
투왕(偸王).
도둑놈의 왕. 도둑질의 왕.
그래, 멋들어지지만 결국 도둑놈 새끼인 것.
그리고, 자신은 멋모르고 그의 제자가 된 도둑년.
백미미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품 안에서 흑사로 만든 그것을 꺼내 늙은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그것을 날렵하게 낚아챈 늙은이가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설마 다른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나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늙은이의 물음에 터져 나오는 뾰족한 외침.
분명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부려 먹으려는지 트집을 잡으려는 늙은이.
‘개 같은 늙은이 진짜 끝까지!’
속으로 백미미가 분노할 때, 투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확인해볼까?”
‘확인해볼 방법이 있으면서 그랬던 거라고?’
자신을 자꾸 떠보는 듯한 말에 다시금 가슴속에 치미는 분노.
백미미가 분노에 몸을 떨자, 늙은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던진 흑사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아, 아니, 미, 미친 늙은이! 그, 그걸 왜! 냄새를 맡아요!”
백미미가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가 훔쳐 온 것이 태후가 열흘에 한 번 갈아입는 말흉(抹胸)이었기 때문이었다.
옷 안에 입어 여성의 가슴을 가리는 것인데, 그것을 냄새 맡다니.
미미의 전신에 소름이 솟아올랐다.
‘미친놈의 늙은이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아 실성했구나!’
늙은이의 미친 짓에 놀랄 때 확인(?)을 끝낸 늙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태후도 늙긴 늙었군. 예전에는 꽃향기가 났는데 말이야···. 뭐 아무튼 태후의 말흉이 맞으니, 내기는 너의 승리다 미미야.”
이제 그가 어떻게 태후의 체향을 알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늙은이가 순순히 인정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이제, 약속대로 백미미 자신의 자유의 몸이었다.
“흐아아아! 드디어!”
백미미의 가슴에서 설움이 복받쳐 오르고,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무사와 관병, 개 따위에게 쫓기던 십오 년.
그 설움의 세월에 눈물이 폭포수 같이 흘러내렸던 것.
백미미의 꿈은 원래 내조지현(內助之賢)이었다.
현숙한 여자가 되어 남편을 돕는 여인이 되는 것.
그것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이었기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 저자에서 배고픔에 만두를 훔치다 늙은이의 눈에 든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
하고 싶지도 않은 도둑질을 하며 살아와야 했던 것.
배고프지 않게 해주고 무공도 가르쳐준다는 말에 속아 늙은이의 제자가 된 것이 실수였다.
그의 제자가 된 첫 삼 년 동안에 배운 것이라고는, 저자에서 사람들의 전낭을 터는 방법.
그리고 그 사이사이 개라든지 묘두웅같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그가 가르쳐준 무공(?)이었다.
결국 이런 건 안 배운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나서야 무공을 가르쳐 주기는 했는데, 주로 훔치고 도망갈 때 쓸 경공과 들키지 않는데 필요한 잠행술(潛行術) 같은 것이 주류.
그가 투왕(偸王)이라는 도둑놈 중 도둑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제자가 되고 오 년이나 흐른 후였다.
놀라 도둑놈 따위의 제자는 하기 싫다니, 일인전승(一人全勝)의 무공이라 제자를 그만두려면 사지 근맥을 끊고, 머리에도 충격을 가해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
그러니 제자를 그만두거나 도망칠 수도 없었거니와 도망을 쳐도 귀신같이 찾아와 다시 잡아가니, 계속된 도둑질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백미미였다.
하지만, 얼마 전 늙은이가 자신에게 제안했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내는 시험인 여섯 가지 도둑질에 성공하면, 자신을 원하는 데로 살게 해준다는 것.
물론 정상적인 도둑질은 하나도 없었다.
동경 제일 부잣집에 들어가서, 그가 자기의 남성을 위해 먹는다는 단약을 훔쳐 오라든지.
추밀사 집에 들어가서 추밀사의 첩이 추밀사의 애간장을 녹일 때 쓰는 침향을 훔쳐 오라던지.
뭐 그런 더러운 물건들을 훔쳐 오라는 주문들이 이어졌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태후의 말흉을 훔쳐 오는 것.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났기에 설움과 기쁨에 백미미가 몸을 떨었다.
그렇게 눈물 콧물을 빼며 기뻐하는 백미미의 귀에 들려오는 늙은이의 말.
“자, 그럼 무릎을 꿇거라.”
‘무릎? 그래, 까짓거 마지막이니 꿇어줄 수 있지.’
백미미가 조심스레 무릎을 꿇자, 늙은이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투왕이라는 별로는 아주 특별한데, 이것은 어디서 내려주거나 누군가가 붙여주는 별호가 아니다. 전대 투왕에서 지금의 투왕으로 전해지는 별호. 네 재주가 나를 넘었으니. 이제 네가 투왕이다. 오대 투왕 백미미 이제 네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
“뭐, 뭐라고요!?”
내조지현(內助之賢)의 삶을 원했지만,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결국 왕 도둑년이라는 별호였다.
‘이 개 같은 늙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