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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219/344)

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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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잉! 

“으윽! 먼지.” 

영영이가 불어오는 바람에 소매로 얼른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라서 봄이 우리의 뒤를 따르는 모양인지, 개화하는 꽃들의 향기를 머금은 따듯한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우리의 등 뒤로 가끔 먼지를 몰아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하의 상류 지역은 진시황이 만리장성 세운다고 나무를 다 잘라버려 황폐해져, 모래바람이 쉽게 일어나는 지역이기 때문. 

“괜찮으냐 영영아?” 

“네, 가가.” 

목대협과 헤어지고 난 오후. 

우리는 여전히 관도 좌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난주로 향하고 있는 상태. 

경공을 못하고 무공도 모르는 나 때문에 말을 샀으면 좋았지만, 송의 말 보다는 서하의 말이 알아준다는 말에 국경을 넘어서 말을 구하려 했더니 여정이 조금 늦어지고 있었던 것. 

그래도 이제 이정도 걷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희주에서 이제 사흘 정도 걸어왔으니, 앞으로 나흘 정도만 가면 난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난주에서 잠시 쉬며 서하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아보아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발걸음을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국경을 몰래 넘어야 하니까 말이다. 

내가 무공을 모르니 들키지 않고 몰래 국경을 넘자면 밀입국을 알아봐야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걸릴 줄 모르니, 조금이라도 서둘러 난주에 도착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서둘러 난주에 도착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를 때, 조심스러운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공?” 

“왜 그러시오. 청.” 

그녀의 부름에 대답하자, 그녀가 약간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노공, 오늘은 조금 일찍 쉬면 안 될까요?” 

“설마 피곤하오? 어디 아픈 것은 아니고?” 

“아뇨. 그, 그건 아닌데. 저기 폐가가 있기에 노숙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아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지, 아니면 오고 가는 여행객들이 사용하는지, 문 한쪽 떨어진 집이 관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갈대숲 근처에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피곤한데 말하기 부끄러운가? 그러면 당연히 이슬 맞고 자는 잠이 좋진 않겠지?’ 

이슬 맞고 자는 잠에 지쳤나 하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조금 더 가서 이슬 맞고 자는 것 보다는 아내 말대로 이슬을 피하는 것이 좋으니까. 

“그러면 오늘은 저기에서 일찍 쉽시다. 기러기랑 오리도 구워 먹고. 다들 어떻겠소?” 

“와! 오늘은 일찍 쉰다! 소소야 너도 좋지?” 

“네, 영영, 오늘은 좀 더 쉴 수 있겠군요.”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둘. 

희주에서 이틀 쉬다 왔지만, 다들 말은 못 해도 피로가 누적된 모양. 

이러면 일찍 쉬는 것 확정이었다. 

“그러면 다들 저리로 갑시다.” 

“고맙습니다. 노공.” 

“고맙긴. 자 갑시다.” 

무엇을 할지 정해졌으니 아내와 소소, 영영이를 이끌고 폐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들어선 폐가는 낡은 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여기저기 구멍 뚫린 천장과 벽면이 있는 집이었는데. 침상 앞에 모닥불을 피우며 사용했는지, 바닥에 불을 피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은공, 제가 침상에 깔 갈대를 잘라 오겠습니다.” 

“가가. 저는 그럼 불을 피울게요.” 

소소가 침상 위에 깔려는지 갈대를 잘라 온다고 나가고, 영영이는 부서진 문짝이나 마른 풀들을 찾아 움직였다. 

이제 제법 다들 익숙해져 빠르게 자기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둘. 

둘은 각자의 일을 찾은 것 같으니, 나를 아내를 데리고 물가에 다녀오기로 했다. 

“청, 그럼 청은 나와 물가로 갑시다. 기러기와 오리를 한번 씻어 옵시다. 먼지를 뒤집어써 아무래도 씻어 와야 할 것 같으니.” 

“예, 알겠습니다. 노공.” 

그렇게 손이 비는 아내를 데리고 좀 떨어진 물가로 향했다. 

딱히 도움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째 아까 내가 영영이와 다툰 이후로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기 때문. 

소소와 영영이가 묻는 말에도 뭔가를 생각하느라 잘 대답도 못 하고. 

혹시라도 내 편을 들어주느라 영영이를 서운하게 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가 싶어, 아내의 기분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물가.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를 졸졸 따르는 덕구와 도착한 물가에서 아내의 물음이 들려왔다. 

“저는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냥 거기 앉아 있으시오. 손이 필요해 동행하자 한 것은 아니니.” 

“그럼?” 

“아까부터 얼굴이 어두워 혹시 고민이라도 있는가 싶어 말이오. 혹 마음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이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도 좋소이다.” 

그렇게 질문하자 역시나 당황하는 아내. 

그녀가 뭔가를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물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공···. 하, 하고 싶은 말이 있긴 있습니다.”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아내. 

아내의 물음에 씻던 기러기와 오리를 돌 위에 올려두고 대답했다. 

“그래, 한번 해보시오. 내 다 들어줄 테니.” 

“그러니까···.” 

-퐁 

갑작스러운 질문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되묻자, 옆에서 주운 나뭇가지로 수면을 낙서하듯 휘저으며 말해오는 아내. 

“예, 저기···. 음. 그러니까···. 계속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인데 그리 망설이는 것이오. 얼른 해보시오.” 

재촉하듯 묻자 부끄러운 듯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애꿎은 물만 찔러대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괴질로 고통받는 저를 구해주시고, 또, 이렇게 지금까지 아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새삼스럽기는.’ 

나 때문에 영영이를 걱정해서 그런 듯했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 

아마 계속 강만 따라 올라오다 보니 조금 우울해진 느낌이었는데, 전생에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다 보면 뭐 사람이 우울감에 강에 뛰어들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카더라 이야기가 생각나 아내를 위로하기로 했다. 

“부인, 그···. 부부는 곧 하나이고 곧 자신과 같다고 하더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않으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평생 함께할 텐데, 평생 고맙다고 할 작정입니까?” 

말을 끝내고 아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자,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도. 노, 노공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습니다.” 

-퐁. 퐁.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그녀가 찌르고 있던 강물 위로 떨어졌다. 

‘울어?’ 

살짝 당황해 아내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의 얼굴을 살피자 그렁그렁한 아내의 눈망울. 

곧 아내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센티가 내 위로에 폭발한 느낌. 

우는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테니 어깨를 빌려주기로 했다. 

얼른 옷자락에 손의 물기를 훔치고 그녀의 눈매를 닦아주며 말했다. 

“어찌 눈물을 보이시오. 당연히 앞으로 평생 함께할 텐데, 그러면 우리 죽고 나서도 영원히 함께합시다.” 

그리고는 아내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며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내도 내 손을 놓고 싶지 않은지, 내 손을 꼭 움켜쥐며 품 안에서 눈물을 흘려댔다. 

*** 

그날 밤. 

-촵촵. 

초저녁에 이미 고기를 배불리 먹고 일찌감치 잠이든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볼에 차가운 기운이 들었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자 볼을 핥고 있는 덕구. 

[덕구야! 이게 무슨 짓이냐!] 

정색하며 고개를 저으며 덕구의 혓바닥에서 빠져나오자, 왠지 허전한 침상. 

좌우를 살피자 영영이 소소는 있었는데, 엎드려 자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느껴지는 잡아당기는 느낌. 

고개를 들어 머리맡을 보자 덕구가 내 목덜미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덕구야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래도 나름 똘똘한 녀석이기에 녀석의 행동에 의구심을 가지고, 영영이와 소소의 머리를 받친 팔을 조심스레 빼낸 후 침상 밖으로 빠져나왔다. 

-탁. 타탁. 

아직 모닥불이 꺼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잠이든지 한 시진쯤 지난 상태. 

장작을 뒤적거려 아직 타다만 장작 하나는 들고는, 따라오라 말하는 것 같은 덕구를 쫓아 문밖으로 향했다. 

덕구가 나를 이끄는 곳은 폐가 근처 갈대 언덕. 

역시나 저 앞 갈대 수풀 사이 달빛 아래서, 처연한 표정으로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캬, 누구 아내인지 그냥 모든 것이 화보구나!’ 

일상생활을 해도 화보인데, 주변 분위기에 달까지. 

절로 감탄이 나오는 모습. 

‘그나저나 밤에 혼자 왜 나와 있는 것이지? 잠이 오지 않나?’ 

아내는 잠이 오지 않아서 혼자 달구경 나온 것 같았는데, 내가 딱 저기 옆에 서서 키스한다면 우리 둘이 애로 영화 아니, 멜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생각보다 밝은 달에 손에 든 나뭇가지를 흔들어 불을 끄고, 천천히 걸어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아내와 가까워져 오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오는 아내의 모습. 

아내와 좀 더 가까워지자 그녀가 입고 있는 옷차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 옷은?’ 

아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비연에게 선물 받은, 그녀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푸른 저고리와 치마. 

아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화려한 옷이었다. 

왜 갑자기 저런 옷을 꺼내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바짝 힘을 낸 모습. 

내 살짝 앞을 가고 있는 덕구를 보자, 감이 오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화려한 옷을 입고, 은밀히 덕구를 보내 나를 부른다? 

‘아, 이거 데이트 신청이었구만?’ 

아마도 우수에 찬 기분을 듬뿍 만끽하고 싶은 느낌. 

아내가 지금 입은 옷은 강남의 여름에나 입는 옷이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무공을 익혀서 추위를 그렇게 타지는 않을 것이기에 시치미를 뚝 떼고 아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원래 이럴 때는 남자가 모른 척해주는 것이 좋은 것이니까. 

“부인, 잠이 오지 않는 것이오? 옷은 어찌 갈아입은 것이오? 달빛 아래 선녀(仙女) 같은 모습이라, 날아가 버릴까 무섭소이다. 하하.” 

우리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이제는 일장(丈) 삼 미터 정도. 

그러자 이제 달빛 아래서 아내의 표정까지 드러났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왠지 슬픈 것 같은 얼굴.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자 왠지 가슴이 아릿했다. 

‘뭐지? 기분이 왜 이러지?’ 

분명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아릿한 가슴. 

아릿한 느낌에 멈칫하는데 아내가 몸을 속여 내 쪽으로 계수배를 해왔다. 

“부인, 이게 무슨···.”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에 당황할 때, 꿇어 엎드려 나를 향해 아내의 조용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다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그녀를 주시했다. 

“노공, 처음 만났을 때 제 눈을 보고 호수 같다고 하셨지요? 제 눈을 보고 그리 말씀해주신 분은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눈을 뜨니, 노공께서 저를 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는 수치심에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미소로 담담히 지금까지 자기의 속마음을 전하는 아내. 

마른 갈대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 중에도 아내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하지만 아버지께 노공께서 저를 책임져 주시겠다 약조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두더지도 제 짝이 있다고. 이런 못나고 부족한 저를 부인으로 맞아주시겠다 약조해 주신 노공께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평생 모시며 섬기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는 소녀를 부디 용서하시기 바라옵니다.” 

‘뭐!?’ 

잠시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달빛 속에서 선명히 보이는 그녀의 코에서 흐르는 코피.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서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르륵. 

“이, 이게 무슨 일이오!” 

얼른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얼음덩이라도 껴안은 듯한 차가운 냉기가 전신으로 스며들었고. 뼛속까지 치미는 냉기에 아내를 안았음에도 몸이 떨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아내가 나를 올려다보며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 되는데···. 이러시면 자꾸 미련이···. 커흡!” 

그녀의 목구멍 안에서 울컥 솟아나 흐르는 피가 그녀의 입가를 적시고, 내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등의 혈관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동시에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뭔가가 분명 잘못되고 있었다. 

“더, 덕구야! 소소와 영영이를! 어, 얼른 둘을 불러오너라! 그리고 내 급, 급을 가져오너라!” 

“월! 월월!” 

정신없는 상황에도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내기가 폭주하는가 싶어 약왕의 약을 떠올렸고, 덕구를 폐가 쪽으로 보내자 잠시 후 그쪽이 소란스러워지며, 소소와 영영이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가가!” 

“청! 이게 무슨 일인가요!? 청!” 

“청아! 가가, 일단 떨어지세요! 큰일 나시겠어요!” 

아내를 품에 안은 채 떨고 있는 내 모습에 영영이가 나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이 자리에서 얼어 죽더라도 그녀를 품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왠지 이대로 품에서 놓아버리면 영영 다시 안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 

그렇기에 영영이를 향해 소리쳤다. 

“나, 나는 괜찮으니! 급에서 약왕 어른의 약! 약을!” 

내 단호한 모습에 영영이가 덕구가 끌고 온 급에서 약상자를 꺼내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 약상자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인데, 영영이가 약상자를 연 순간 우리는 곧장 절망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달칵. 

“어, 어째서 약이!” 

“야, 약이 대체 다 어디 갔지?” 

그제야 내 급에서 빠져나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나를 감싸던 아내의 행동과 아내가 자기의 상태를 나에게 한동안 숨겨왔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아내의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 노공. 죄, 죄송합니다. 커흑.” 

“괜찮으니 마, 말하지 마시오. 조금만 견디시오! 우리 갑시다! 북해빙궁의 장모님께 갑시다! 지금 당장!” 

아내가 사과를 해왔지만, 아내의 상태를 눈치 못 채고 이 상태까지 되어버린 상황.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마 오늘 기분이 이런 것은 나 몰래 먹던 약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이대로 그, 그대를 떠나보낸다면,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구려. 영영아 나를 부축하거라. 난주로 난주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북해빙궁까지 멈추지 말고 가자 꾸나···.” 

가다가 죽더라도 한 걸음이라도 더 가야 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고, 헛되이 보내 버린 시간이 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사색이 된 영영이와 소소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자, 잠깐 만요!” 

축 늘어진 너구리를 손에 든 복면인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를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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