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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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인이 손에든 축 늘어진 너구리의 모습으로 보았을 때 아마 매일 우리에게 사냥감을 가져다준 사람인 듯했다.
잠행복에 복면까지 한 모습으로 보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분을 감추려는 느낌.
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눈앞의 복면인이 해코지하려면 벌써 했을 것이고, 굳이 사냥감 같은 것을 가져다 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를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아내의 혈맥이 계속 꿈틀거리며 코와 입, 귀, 이제는 눈에서까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약왕께서 아내는 몸 안에 내공이 가득 차 그 내공들을 제어하려면 어서 빨리 환골탈태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위험하긴 해도 무리한 내공을 운용하거나 하지 않으면, 빙궁에 도착할 때까지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라 했는데, 그러나 지금 아내의 모습으로 보아 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몸 안의 내공들이 폭주하는 느낌.
그런 원인으로 육체에 무리가 오는 것이 분명했다.
내공 경지에 어울리는 신체가 아니라 그런지 단전에 무리가 가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들로 신체가 서서히 붕괴하는 그런 느낌이 들고 있었기 때문.
아내의 기운이 아마도 예전처럼 주변을 초토화하지 않는 이유는, 아내가 고통 속에서 최대한 기운을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던 것.
지금부터 서두른다고 아내를 살릴 리는 만무하겠지만, 이대로 손을 놓아버릴 수도 없었으니까.
이것은 나와 영영이 소소가 아내를 보내는 의식 같은 행위.
이렇게라도 하지 못하면,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견디지 못할 테니까.
복면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영영이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며, 며칠간 가져다주신 것들은 가, 감사하지만 지금 저희가 이야기할 여유가 어, 없소이다. 죄송합니다. 여, 영영아 서두르자꾸나.”“예, 가가. 흑···. 청아! 괜찮아? 조금만 기운 내 언니가, 언니가 꼭 가가와 함께 북해빙궁으로 데려다줄 테니까···. 그, 그러니까 기운 내. 흐윽···. 어, 언니랑 약속했잖아. 우, 우리 평생 가가를 같이 모시고 살자고···.”
나를 부축하다 아내의 상태를 느꼈는지 영영이는 이미 흘려대는 눈물 콧물에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
둘이 같이 지낸 세월이 긴 만큼 나보다 더한 충격인듯했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
“어, 언니. 노, 노공을···.”
슬픈 눈으로 내 떨리는 몸을 밀어내는 아내.
혹시라도 내가 아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자기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 와중에 나를 챙기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느낌.
그간 아내와의 추억들이 떠오르며, 비수같이 가슴을 찔러댔다.
‘십자든 만자든 누구든 좀 살려주쇼! 환생인지 빙의인지 왜 이리 좆 같아!’
뭐 하나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지만, 적당해야지.
절망과 분노가 나를 휘감았다.
그렇게 가슴속으로 가끔 필요할 때만 꺼내 부르는 두 분까지 찾으며 발걸음을 옮길 때, 다시금 들려오는 복면인의 목소리.
“제!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아니, 있을 겁니다!”
“예?”
“뭐라구요?”
“무슨?”
복면인의 입에서 갑자기 흘러나온 말은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말.
나와 영영이가 놀라 복면인을 바라보자, 소소가 매서운 눈으로 칼을 뽑아 앞으로 나서며 일갈했다.
-챙!
“곤경에 처한 우리에게 수작질하는 것이라면, 제 검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에요! 그리고 얼굴까지 가리고 나타나 그리 말하면 우리가 당신을 어찌 믿겠나요!?”
“아, 그, 그건···.”
복면인이 난처한 우리의 상황으로 뭔가 수작질을 하려는 것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소소.
갑자기 때 탄 잠행복 같은 것을 걸친 채, 얼굴까지 꽁꽁 싸매고 늘어진 너구리 새끼까지 들고 나타나 하는 말이 자신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라면, 소소의 반응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축 늘어진 너구리 새끼가 흘리는 침이 한참 신용도를 떨어트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소소의 말에 복면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출수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소소가 검을 들어 견제했지만, 그러나 그녀의 손은 자기의 머리 뒤로 향하더니, 자기의 복면을 그대로 풀어버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약간 매섭게 생긴 인상의 여인.
진한 눈썹이 인상적인 미인형의 여자였다.
그리고 복면을 풀어 얼굴을 드러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 오대 투왕(偸王) 백미미. 그, 그게 제 벼, 별호이고 이름입니다.”
“투왕?”
“투왕이라고요?”
투왕이라면 도둑들의 대장이라는 말인데, 이해안가는 그녀의 말과 행동.
뭘 훔치러 왔었다는 것이라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웠지만, 도둑이 먹을 것을 계속해서 잡아다 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도둑계의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선물 공세로 마음을 훔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소소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다시금 앞으로 나서며 일갈했다.
-챙!
“저희 또래의 젊은 여인이 투왕이라니, 그걸 저희가 어찌 믿지요? 허튼 수작질로 저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면 베겠어요. 물러나세요!”
“아, 아니라고요. 젠장. 아니, 지금 저만 도울 수 있다고요!”
아니라고 항변하는 여자.
그러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리고 냉기를 받던 내 몸도 한계에 달했는지, 더 이상 아내를 품에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서늘한 기운에 몸이 굳어버렸기 때문.
“크흑···.”
“가, 가가! 흐윽···. 청이는 제가 안을게요. 이러다 큰일 나시겠어요. 흐아···.”
“은공!”
“괘, 괜찮으세요? 낭. 아니, 공자님?”
내가 몸을 덜덜 떨며 주저앉자, 화들짝 놀라 달려오려던, 자기를 투왕이라고 주장하는 여인.
소소의 매서운 눈빛을 대하자, 그녀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영영이의 원망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뭐가 봄이야! 좀 더 일찍 출발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현원법사 망할 늙은이! 괜히 기다리다가 우리 청이 만···. 흐윽···.”
그래, 영영이의 말대로 조금 더 일찍 출발했으면, 그랬으면 좀 더 북해빙궁에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난주에도 못 가고 길바닥에서 이리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도 영영이의 말에 망할 땡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에 출발하면 다 잘 될 거라고 하더니, 차가운 길바닥에서 아내를 보내야 할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한겨울에 출발했다 해도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영이가 현원 법사의 법명을 들먹거리며 원망하기 시작하자, 자기를 투왕이라고 말했던 여자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래! 혀, 현원법사! 그렇지! 그, 그분께서 저를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별로 믿기 힘든 이야기.
“점점 도가 지나치군요! 저희가 현원 법사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러서세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자꾸 저희를 방해하면 베어버리겠어요!”
소소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지, 우리를 막아서는 그녀를 향해 출수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뭔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는 백미미라는 여자.
“아, 아니에요! 젠장 급해 죽겠는데!”
“무례한! 지금 청이가 죽는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 젠장 그게 아니라. 저는 화산에서부터 여러분을 따르고 있었던 말이에요! 그래, 저 영물! 덕구라고 했던가!? 저 영물이 알고 있어요! 영물아, 그렇지? 내가 화산부터 따르고 있었지! 그치!?”
“왈!”
그러자 알아들었다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짖는 덕구.
생각해보니 화산에서 나무 위를 보고 짖거나. 여정 중에 밤마다 덕구가 계속해서 짖어댄 것이 저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소소 옆에 다가가, 소소를 제지하며 다시 물었다.
화산부터 따랐다는 그녀의 말과 덕구의 반응, 그리고 현원법사가 보냈다는 말은 그냥 넘기기 힘든 말이었기 때문.
그녀의 주장에 조금 신빙성이 더해지기에 그녀에게 어찌 도와줄 것인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정말 저 여자가 도울 수 있다면, 저 여자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저 여자가 곧 아내의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이야기일 테니까.
“어, 어찌 우리를 돕겠단 말이오!?”
그러자 백미미라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부, 북해빙궁주라는 분을 얼마 전 만났어요! 그분께 저분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흐윽···.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갑자기 상황 좋게 장모님이 근처에 와있다는 말에 발끈하는 영영이.
그런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좋은 상황이 생겼을 리가 없으니, 영영이가 아내를 안고 절규했다.
북해빙궁에 있다는 장모님이 열아홉이 되면 찾아오라 했다는데, 갑자기 중원에 나타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말에 갑자기 희주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서, 설마? 그 누님이? 아니, 절대 어머니 또래가 아니었는데?’
내가 희주에서 도와주었던 아내와 닮은 익숙한 눈매를 가진 여인.
너무 익숙하고 신경이 쓰여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도망치듯 피한 여인.
그 여인이 떠올랐던 것.
“서, 설마!? 희, 희주에서 만났던, 얼굴을 면사로 가린 벽안의 여인이?”
내가 혼잣말하듯 말하자 백미미라는 여자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아, 마, 맞아요! 낭ㄱ, 아니, 공자께서 희주의 골목길에서 그분과 부딪히셨잖아요. 그분이 저에게 분명 자신이 전 북해빙궁주인데, 딸을 만나러 오셨다고 했어요!”
“정말입니까? 은공? 그런 분을 만나셨습니까?”
“가가, 정말이에요?”
나까지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밝아지는 영영이의 얼굴.
‘제기랄! 이름만 밝혔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텐데!’
이름을 물었을 때 제갈가의 류청운이라는 말만 했어도, 그 자리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이럴 일이 없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잠깐, 아내가 핏물을 다시 한번 토해냈다.
“커흡!”
영영이가 다시금 품에서 피를 토하는 아내를 보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청아! 조금만 참아! 어머니, 어머니가 근처에 계시데! 우리 어머니한테로 가자. 어머니, 보고 싶어 했잖아 그, 그렇지!?”
바이칼을 향해 무작정 가는 것보다는 좀 더 희망이 생긴 상황.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희주에서 장모님으로 추정되는 분을 만나고 사흘이 흘렀다.
그러면 장모님으로 추정되는 분은 제갈가가 있는 호북으로 향하셨을 것이니, 우리와 최소 엿새 거리가 되는 것.
여기서 우리가 엿새 거리를 쫓아가면 장모님도 다시 엿새 거리만큼 멀어질 테니, 우리가 몇 배 빠르게 장모님을 쫓거나 자지 않고 계속 달려가면 모를까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것.
더군다나 아내가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이미 희주에서 사흘 정도 거리까지 멀어졌는데, 그분이 움직인 거리까지 생각하면 열흘 거리는 될 터이고, 그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데, 그분을 어찌 찾으실 작정이오!? 그, 그리고···. 아, 아내가 과연 얼마나 버, 버틸지···.”
내가 내 입으로 아내의 사망선고를 내리는 듯한 상황.
영혼이 찢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내 말에 백미미라는 여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잠깐 그분을 살펴봐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들려오는 영영이의 목소리.
영영이가 아내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청이에게 해코지하려는 것이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걱정에 하는 말이겠지만, 가만두어도 죽을지 모르는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단 말인가?
“영영아, 지금은 방법이 없으니 한번 믿어보자꾸나.”
내 말이 끝나자 투왕이라는 그녀가 아내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영영이에게 안겨 숨을 헐떡이는 아내의 맥을 짚어보더니 말했다.
“제, 생각대로 저와 상극인 기운. 제가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아마도···.”
조금 자신 없는 대답이었지만, 이게 전부 현원법사의 큰 그림이라면, 그녀를 믿어야 했다.
우리 앞에 나타났던 푸른 눈의 여인.
봄에 출발하라는 그의 말.
그리고 그가 보냈다는 여자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방법 외에는 아내를 살릴 길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
“어찌 그분을 쫓을 것입니까?”
“전 북해빙궁주라는 분을 찾는 것은, 이걸 사용할 예정이에요. 당가의 아가씨라고 하셨으니 이게 뭔지는 아시겠죠? 그분과 만났을 때 그분이 그것을 살짝 만지셨으니, 아마 아직 흔적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건!?”
그녀가 내민 병의 들어 냄새를 맡아 보내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 영영이.
영영이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만리추종향···.”
“예, 그리고 저는 투, 투왕. 중원에서 제일 빠른 자. 어떻게든 살려서 그분 앞에 당도해 보이겠습니다.”
그녀의 말과 만리추종향이 맞고, 그녀가 중원에서 가장 빠른 경공을 익힌 여자라면, 이 모든 것이 아내를 위해 안배된 일이라는 이야기, 이제 백미미라는 여자를 믿어주는 일만이 남은 상황.
그녀를 향해 엎드리며 말했다.
“어떻게든 부인을 살리는데, 도움을 주신다면. 이 식룡 류청운이 어떤 부탁도, 어떤 것이라도, 들어줄 것입니다! 이 목숨을 걸고.”
그렇게 그녀에게 대답하자, 그녀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저도 목숨을 걸고 이분을 어머니라 생각되는 분께로 모시겠습니다. 나, 낭 아니, 공자님.”
나에게 절을 받은 것이 부끄러운지, 무척이나 떨리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