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정(氷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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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절받는 것에 부끄러워한 백미미라는 여자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다른 이야기는 이분을 살리고, 나, 나중에 이,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백미미라는 여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영영이에게 지시했다.
“그것을 코끝에. 당문의 사람이니 만리추종향을 어떻게 쓰는지 아시겠죠? 그리고 냄새의 흔적을 놓칠 리는 없겠지요?”
“네, 무, 물론이에요.”
“그리고 두 분은 저분을 빨리 제 등에 업혀주세요. 어서요!”
“알겠소이다! 소소, 도와주시오!”
아내를 부축해 여자의 등에 업히려 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아내가 내 손목을 붙잡고 간절히 부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 노공. 그, 그냥 노공 품에서···.”
불확실한 누군가에게 자기를 맡기지 말고, 인제 그만 자기를 보내달라는 목소리.
더 이상 고통받기 싫었던지 내 품에서 그냥 숨을 거둘 수 있게 부탁하는 목소리였다.
악문 잇몸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백미미가 나를 거들 듯 아내를 안심시켰다.
“부인, 조금만 참으시오! 조금만.”
“괜찮아요. 살 수 있어요! 중원 어디에 계시던지 숨이 떨어지기 전에 제가 그분을 찾아낼 테니까요. 어서 이분을 업혀주세요!”
그렇게 아내를 그녀의 등에 업히자, 갑자기 아내가 피 분수를 뿜어내며 큰 소리와 함께 까무러쳤다.
-푸화악!
“꺼흡···.”
“청아!”
“청!”
그 모습에 놀라 영영이와 내가 아내를 살피려 하자 우리를 안심시키는 여자.
“저희 둘의 기운이 만난 충격 때문에 그런 것이니 괜찮습니다. 지금 다시 몸의 기운이 가라앉고 있어요. 단지 혼절한 것뿐이에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만리추종향을 제 코끝에 발라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아내의 몸을 확인해보니 진짜 잦아드는 냉기.
얼굴과 몸은 피로 엉망이었지만, 숨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고통을 참아내며 달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에, 아내가 흘린 피와 백미미의 어깨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훔쳤다.
투왕이라는 여자는 아내의 냉기에 버금가는 양강의 기운을 머금은 내공심법을 보유한 느낌.
터져 나오려던 아내의 냉기 머금은 내공 기운이 밀려드는 양강의 기운 때문에 기세가 죽은 모양이었다.
‘이거면 정말 되겠구나!’
마음속에서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곧이어 영영이가 건네받은 약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병에 반 절씩 나누고, 일부는 그녀의 코끝에 발라준 후 약병을 그녀의 품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곧장 인사를 남기고 몸을 움직이려는 여자,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자, 그럼 나중에 만나요.”
“자,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예?”
급에서 하급 영단인 매화영단과 유운단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화산의 하급 영단인 매화영단과, 종남의 중급 영단이 우윤단입니다. 혹, 내력이 부족할까 싶어서···. 아낌없이 사용하셔도 됩니다.”
“여, 영단을? 아, 알겠습니다.”
두 영단이 냄새만을 남긴 채 그녀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그녀의 형체가 목례만을 살짝 남기고 바람같이 흩어졌다.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한 번에 십여 장거리를 건너뛰어 저 멀리.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소소와 영영이에게 외쳤다.
“영영, 소소 우리도 어서 출발합시다!”
“네, 가가!”
“예, 알겠습니다. 은공!”
우리도 그녀를 따라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눈을 감자 코끝 저 멀리서 느껴지는 희미한 향기의 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나풀거리는 향기의 실타래가 미미가 갈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미미는 그 실을 따라 두 다리를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한번 움직일 때 십여 장.
디디는 것은 풀밭, 작은 바위, 때로는 나뭇가지.
그녀의 움직임에 다람쥐가 놀라 나무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굴에서 나온 쥐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지기도 했다.
등에 가볍지 않은 여자를 업고 있었지만, 미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몸을 불태울 것 같은 기운이 더 이상 그녀를 한계를 제한하지 않았기에 좀 더 멀리,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좀 더 높게 뛸 수 있었던 것.
자기의 무공이 누군가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감격에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갈증이 날 때는 수풀을 지나며 이슬을 핥았고, 배고픔은 품 안의 육포를 씹으며 버텼다.
그렇게 달려 새벽의 미명이 밝아오길 한 번.
그녀에게 첫 번째 한계가 찾아왔다.
내공이 고갈되고 있었던 것. 다리가 후들거리고 갑자기 어지러운 머리.
내공 고갈의 증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등에서 단전으로 치미는 냉기.
미미의 내공이 고갈되면서, 등에 업힌 여자의 내공이 다시 기운을 키우는 모양이었다.
미미는 얼른 품 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들어 반으로 나눴다.
‘영약까지 꺼내줄 줄이야···.’
화산에서 매화영단을 받는 것은 확인했는데, 그걸 자신에게 내어줄 줄이야.
그것도 내력이 고갈될 때 먹으라니.
영단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만, 첫째가 내공을 담는 단전의 그릇을 키울 때, 그리고 두 번째가 내공 대신 내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하지만 두 번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 아깝기 때문.
두 번째 용도로 영단을 사용하면 내공을 담는 단전의 크기는 전혀 늘어나지 않고, 영단에 담긴 기운을 모두 그냥 사용해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한 알도 아니고 두 알이나 자기에게 맡기는 사람.
자기 부인을 위해서라지만, 자기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아플 때도 이렇게 해주겠지?’
그렇게 반으로 나눈 영단 한쪽을 삼키자, 가슴 속에서부터 느껴지는 매화의 진한 달콤함과 청아함이 공존하는 향.
텅 비어버렸던 단전이 이내 차오르고 넘치는 기운이 전신으로 휘몰아쳤다.
‘생각보다 강한데?’
하급 영단 반쪽임에도 가득 차오르는 단전.
그렇게 영단의 기운이 몸에 휘몰아치자, 이제 그녀의 발걸음은 십 여장이 아니라 한 번에 이십 여장을 건너뛰고 있었으며, 가끔 나타나는 관도에서 스치는 사람들도 그녀를 바람처럼 생각하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기 시작했다.
-사. 사삭. 사박.
가끔 그녀가 디디는 발걸음 소리만이 풀숲과 관도를 따라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
향기의 실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 지 사흘.
무공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경공만을 펼치기에 내공의 소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내공 고갈로 인한 위기는 계속해서 찾아왔다.
처음에는 반으로 나눈 매화영단을 두 번에 걸쳐 먹었고, 그다음에는 중급 영단인 유운단을 네 조각으로 나눠서 한 조각씩 삼켜야 했다.
그런데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북해빙궁주.
이제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가슴까지 시려오게 하고 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원래 신풍을 쓰고는 몸을 쉬어 주어야 했는데, 사흘이나 자지 않고 달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멈추고 나면 몸이 불타오를까?’
가슴은 차갑게만 식어가는데 팔다리와 머리는 열을 뿜어내는 기이한 상황.
잠까지 쏟아져 가물거리는 상황에서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만리추종향을 느끼자, 머릿속은 추종향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통증이 쏟아냈다.
“끄윽···.”
머리도 이미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나뭇가지를 피하고, 발도 자기가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상태였지만,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기 위해 몸을 날렸다.
현원 법사님의 말 대로라면 미미가 멈추지만 않으면 분명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계에 다다른 몸 상태에 지금 상태라면 몇 걸음이나 더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 그런 걱정 속에 앞에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 위로 몸을 날리자 보이기 시작하는 동굴.
‘아차!’
갑자기 보이는 막다른 지형에 두통에 길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 미미는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한 채 개울을 넘자마자 이끼 낀 돌에 미끄러져 그대로 동굴 쪽으로 처박혔다.
‘아, 안돼!’
-쿵! 촤아아아아악!
‘아, 일어나야 하는데···.’
약속을 지켜야 한다.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한다고 머리가 명령하고 있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과 다리 머리에서 열기가 뻗고 솟아오르는 열기에 몸에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새벽의 이슬을 피하고자 찾아든 동굴.
-똑. 똑. 똑.
가부좌를 틀고 앉아 빙백신공(氷白神功)을 대주천(大周天)하고 있는 빙설화의 귓가에. 동굴 안의 돌기둥들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잡념을 떨치기 위해 내공심법을 운용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일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잠도 오지 않고 가슴이 설레고 있었던 것.
내공심법을 운용 중에는 잡념을 떨쳐야 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잡생각들.
그녀는 대주천을 일찍 마치고 곧바로 그냥 생각에 빠져들기로 했다.
‘그 사람 때문일까? 아니면 봄이라 그럴까?’
중원은 완연한 봄이었다.
짧은 여름과 긴 겨울만이 있는 북해와는 다르게, 사방에 파릇하게 피어나는 풀, 그리고 꽃, 지저귀는 새소리.
자기의 남편, 제갈천을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 계절이었다.
빙설화의 이름같이 꽃을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서 허락된 중원행.
중원 구경을 위해서 호위 몇 명과 찾아왔으나, 갑자기 마교의 놈들에게 습격받아 자기 외에는 모두 하나둘 죽어버리고, 그렇게 몰린 벼랑 위였다.
“크흐흐흐. 네년만 죽으면 이제 새외놈들과 무림은 치고받고 싸울 테지? 안타깝지만 대업을 위해 죽어줘야겠구나. 크하하.”
“더러운 놈들! 내가 죽더라도 어머니께서 너희 놈들을 가만두시지 않을 것이에요!”
“그 어머니는 아마도 우리가 아니라 중원 놈들을 족칠 것이니라! 크하하! 그러니 그만 죽거라!
마교 주구의 칼이 떨어져 내리려던 순간.
-깡!
”누구냐!“
칼을 튕기는 쇠구슬과 멋있게 나타난 그 사람 제갈천.
“멈춰라! 어디 배도(背道)한 무리기에 감히 여자를 핍박하느냐! 무림의 동도들이여! 저 배도한 무리를 처단합시다! 쳐라!”
“““와아아아아아아!”””
“이런 제기랄 어찌 알고 무림의 놈들이! 대업이 코앞이거늘! 모두 빠진다!”
그의 뒤편으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에 놀란 마교의 주구들이 도망치고, 달려온 그가 자기의 손을 거칠게 붙잡으며 말했다.
“튀, 튑시다!”
“예!?”
갑자기 왜 도망치자고 했는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가문의 무사 셋만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
풀숲을 흔들며 마구 소리를 지르니, 사람이 많은 줄 알고 마교의 무리 들이 도망갔지만, 금방 눈치채고 되돌아올지 모르니 도망가자는 말이었다.
처음에 도망치며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알고 보니 무공도 자신보다 약하고···.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용기를 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무공이 약하더라도 지혜로 마교 놈들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모습이 통쾌하기도 했고.
그렇게 그의 가문으로 도피하다 보니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결국 그의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배 속에 아이가 생긴 상태였다.
무림의 은원관계와 양 가문의 반대로 이렇게 이십 년이나 헤어져 있었지만, 한 번도 잊어보지 못한 얼굴.
자기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에 미우면서도 그리운 얼굴이 그였다.
‘천, 어찌 변하셨을까?’
그리고, 젖먹이 상태에서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딸.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딸의 작은 손과 푸른 눈.
딸과의 마지막 이별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제발 엇갈리지만 말기를···.’
그렇게 빙설화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 때였다.
-쿵! 촤아아아아악!
뭔가가 떨어지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동굴 밖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화급히 뛰어나가 밖의 상황을 살피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쓰러진 둘.
“당신은?”
얼굴은 처음 보지만 익숙한 옷차림과 기운에 자기가 살짝 도움을 준 여자를 살피자, 그녀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헉헉거리며 대답했다.
“허억, 허억··· 저, 저 말고. 따, 따···.”
-털썩.
“따? 이봐요! 괜찮은 가요!? 이봐요!”
일단 누가 추격해 오는 것은 아닌가 싶어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살피고, 갑자기 혼절한 여자의 맥을 짚어보자, 큰 부상은 아니었다.
단지 내공이 고갈되어 혼절한 상태.
그녀를 누이고 일단 그녀가 부탁하려 했던 옆의 여자를 살폈다.
말라붙은 피로 얼룩진 푸른 옷과 얼굴.
이상하게 창백한 피부.
-두근두근.
그리고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가슴.
“설마 죽었나?”
혹시 몰라 맥을 짚자, 느껴지는 미약한 맥.
그리고···.
죽어가는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어, 어째서!? 어째서 이게 여기에!? 이게 여기 있으면, 아, 안 되는데!?”
말을 더듬으며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콰드드득! 콰지직!
그러자 빙설화의 기운에 반응해 쓰러진 여자의 주변으로 폭사 되는 맹렬한 한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냉기가 주변을 혹한으로 만들었다.
빙정(氷精)!
헤어지며 젖먹이 딸에게 넣어주었던 반쪽의 빙정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완벽한 한 조각, 아니,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맹렬한 한기를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청아! 내 딸!”
쓰러진 여자를 허겁지겁 품에 안은 빙설화의 입에서 딸이 이름이 터져 나왔다.
이십 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꿈에 그리던 딸이, 참혹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