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解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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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혹시 무슨 문제가 이, 있을까요?”
장모님의 반응에 속으로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보았다.
자신을 도와준 것이 사위라는 사실이 놀랍긴 할 것 같은데, ‘이런 인연도 다 있구나?’하는 반응이 아니라 뭔가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장모님과 부딪혔던 첫 만남 때 너무 싸가지가 없지는 않았는지, 뭔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부딪힐 때 신체를 만졌다거나 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보았던 것.
그도 아니면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구해준 게 혹시 문제가 되었는지.
‘뭐지? 나 무슨 잘못 했나?’
그러자 장모님이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으며 말씀하셨다.
“아, 아니에요. 저, 저를 도운 사람이 제 사위였다니. 차, 참으로 기이한 일도 다 있구나. 그,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역시 그 건가? 중원인이 아니라서 내가 감정표현을 이해 못한 건가?’
아무래도 동양인이 서양인이 표현한 감정에 대한 반응을 공감하는 데는 문화적 장벽이 있기 마련이니, 가슴속으로 마음을 쓸어내리고 오버하며 웃었다.
“아하하, 이, 인연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장모님.”
“그래요. 참 기이한 인연이네요. 예, 참으로. 네···.”
“···”
그렇게 어색한 우리끼리의 인사가 끝나자, 영영이와 소소가 눈치를 보고 있다가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청이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북해빙궁주라는 신분인 무림의 팔 왕급 인물이니, 무림 말학으로서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법.
“처음 뵙겠습니다. 당문의 당영영.”
“남궁가의 남궁소소라 합니다.”
“예, 처음 뵙겠어요. 두 분.”
그렇게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고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손을 모으고 있는데, 장모님의 물음이 들려왔다.
“사위님. 그런데 이 두 소저는 어찌 같이 움직이시는 거죠? 북해로 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위험한 길인데도 제갈가의 무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순간 내 접대용 미소가 와장창 구겨지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꿀꺽.
장모님은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당연하게 알고 계셨다.
그런데 왜 그런 위험한 길에 제갈가의 무사들이 하나도 없고, 왜 소소와 영영이만이 우리의 일행으로 따라붙었냐는 물음.
장모님의 물음에 대답하자면 자연스레 둘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니 찔리는 마음에 자연스레 얼굴이 구겨진 것.
난관(難關).
장모님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청이 말고도 다른 아내 후보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었다.
장모님께 좋은 인상을 남기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테지만, 첫인상을 조지는데 이런 최악의 상황도 없는 느낌.
아마 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순간 장모님에게 도움을 주고 쌓은 좋은 첫인상의 이미지는 이대로 조져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답은 해야 했고, 우물쭈물 인단 말을 꺼냈다.
“저기. 이 둘은 누구냐 하면 그러니까···.”
그러나 처음 정식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딸 말고 다른 아내를 둘이나 둔 놈팡이라고 자신 신고를 해야 했으니, 당연히 궁색한 목소리로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주저하는 듯 보이자, 고맙게도 영영이와 소소가 얼른 나서 자신들을 대신 소개했다.
“저는 가가의 소처(小妻)이고”
“저는 은공의 정인(情人)입니다.”
당당하게 아내 대리와 애인이라고.
“네엣!? 소처라 정인이라고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를 위아래로 올려다보며 확인하는 장모님.
아내가 있는데, 스페어 아내와 애인이 별도로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
‘이건 나 같아도 놀랐겠어···. 결국 조진 건가?“
그러자 영영이와 소소도 혹시 내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까 싶었던지, 옆에서 얼른 설명을 거들었다.
이미 나락인 것 같았지만···.
“저희 가가는 여자를 막 좋아하는 파락호(破落戶) 같은 분은 아니세요. 중원에서 식룡이라는 별로로 이름을 떨치고 계시는 유명한 요리사세요.”
“맞습니다. 빙궁주 어른. 은공께서는 다른 이의 어려움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아주 의인이세요. 다 사정이 있어요.”
그렇게 둘이 나를 위해 변호사를 자처했지만, 장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놀라실 수밖에 없었다.
원래 소처를 들인다는 것은 아내가 아내의 노릇을 제대로 못 했을 때 들이는 것.
그러니까 아내에게 하자가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거기에 정인이라는 여자까지.
달리 말하면 아내에게 심각한 하자가 있어서 영영이가 아내 대리를 하고, 소소가 다른 부분(?)을 책임지는 느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
역시나 장모님도 그렇게 느끼셨는지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어오셨다.
“설마, 청이가 그간 빙정 때문에 아, 아내의 역할을 잘하지 못했던가요?”
‘빙정? 아, 그러면 그 냉기와 이 사태의 원흉이?’
빙정이라면 무협에 북해빙궁이 등장하면 따라오는 약방의 감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단전에 품으면 빙공을 익히거나 펼치는데 특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냉기의 결정 같은 것이었다.
냉기를 가득 머금은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내의 괴력과 지금까지 나를 생불(生佛)로 만든 원흉이 그 녀석이었다는 말.
‘빙정 그걸 생각 못 한다니!’
전생에 정말 무협지 헛봤다고 생각하며, 장모님의 물음에 얼른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장모님.”
“아니에요. 어르신.”
“절대, 아니에요.”
그러자 다시금 장모님께서 물어오셨다.
그것도 아니면 부인이 셋이나 있을 필요가 있냐는 그런 당연한 물음.
“그러면 어째서 첩도 아니고 소처에 정인까지?”
“그, 그건 이제부터 자세하게 오해가 없도록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장모님.”
“그래요? 그러면 어디 한번 들어볼까요?”
그렇게 시작된 필사적 설명.
눈물과 슬픔 없이는 들을 수 없다는, 류청운의 결혼 후 독수공방 일 년 삶을 정리하는 그런 거대한 서사가, 두 증인의 증언과 함께 장모님께 전해졌다.
한 객잔에서 시작해 중원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서사가 말이다.
“해서 가가께서 죽어가는 청이를 그렇게 구하시고는, 제갈가의 접각부가 되신 것이에요.”
“저런 아이에게 그런 병이 있었다니! 이 어미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군요. 그리고요?”
“그리고 그다음은 저희 가문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장모님은 청이가 알레르기로 죽을뻔했다는 사실에 놀라시기도 하고, 영영이의 아버지를 구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기도, 또 소소의 오라버니를 구했다는 말에 나를 바라보며 칭찬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셨다.
그리고 이야기 도중 들려오는 장모님의 조심스러운 질문.
“그런데··· 사위님.”
“예? 말씀하시지요. 장모님.”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사위가 아주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의로운 자라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여자를 좋아해서 첩실을 늘린 것도 아니고, 다들 그만한 처지와 이유가 있다는 것도.”
“예, 가, 감사합니다.”
영영이와 소소 그리고 나의 설명이 먹혀들어 간 느낌.
허리 뒤로 손을 숨기고 주먹을 꽉 쥐며 됐다고 생각할 때.
장모님께서 물으셨다.
“그런데 사위님. 제가 조금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말이죠.”
“걱정이라면?”
“저기 저분.”
장모님이 가리킨 손가락 끝에 누워있는 사람은 투왕 백미미 라는 여자.
장모님이 백미미를 가리킨 채로 다시 물었다.
“혹시 말이죠. 저분께서 우리 청이를 구해주었으니, 자. 자기를 거둬달라 말씀한다면 어쩌실 작정이죠? 그냥 뭐 걱정이 돼서 묻는 것입니다.”
“예에? 거둬 달라는 것은 그러니까?”
“첩이든 뭐든 사위의 여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이랄까요?”
그 질문에 고개를 휙 돌려 누워있는 백미미를 바라보았다.
장모님의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
생각해보니 일 도움은 일 아내라는 공식이 적용되고 있는 상태.
‘아니, 그래도 이건 당사자나 당사자의 가족을 구해준 게 아니잖아?’
하지만 내가 자기의 혈육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줘서 나에게 반한다는 공식이 백미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녀가 이유를 모르게 나를 며칠 따라다닌 것은 맞지만, 현원 법사가 우리를 도우라고 보냈다고 했으니 설마.
설마 여난을 조심하라고 한 사람이 나에게 여자를 붙일 리는 없었던 것.
거기에 도움은 내가 받은 상황이니까 말이다.
“서,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금 물어오는 장모님의 목소리.
“혹시 그, 설마가 일어난다면요?”
그 말에 나는 장모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말이죠.]
[네?]
내가 조용히 턱짓해 소소와 영영이를 가리키자, 장모님이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장모님의 물음에 영영이와 소소가 서늘한 눈빛으로 백미미라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그러자 백미미가 가위에라도 눌리는지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틀거렸다.
***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고, 마지막에 소소가 합류하는 부분에서는 움찔하기도 하셨지만, 대체로 이야기는 잘 끝났다.
“······해서. 오라버니를 구하시고, 황제께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없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의 설명을 곁들이 이야기가 끝나자, 장모님께서 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생각보다 여자가 많다는 사실에 조금 걱정이 들긴 하지만, 청이가 첫째이고 그리 아끼고 있다니. 제 마음이 그래도 놓입니다. 그래요. 그리 다정하고 멋진 남자이면 여자가 따를 수 있지···. 더군다나 중원에서 본처 말고 여자를 두는 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으니. 제가 뭐라 탓할 수도 없군요.”
아내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에 다른 허물은 덮어지는 느낌.
그리고 중원 문화를 이해하고 있으신 모양.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청이를 아껴주었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아이의 몸을 고치기 위해 중원을 헤매고, 저를 찾아 북해까지 오려 했다니. 정말 감사해요. 사위님.”
“아, 아닙니다. 장모님. 크흑···. 갸아아악!”
그리고 장모님의 칭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 나 같은 순정남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픈 아내를 위해 중원을 가로지르는 이런 대모험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청운아 너는 칭찬받아 마땅해 정말!’
장모님의 따듯한 말씀에 그간의 개고생이 보상받는 느낌.
그렇게 어깨에 느껴지는 장모님이 두드려 주심을 느끼며 한없이 감동할 때, 조금 어색해하는 목소리로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위님. 어, 이, 일 년이면 아주 힘드셨을 것 같네요.”
그래, 힘들었다.
단지 힘들다는 말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죽을 만큼 무척이나 개같이 힘들었다.
중원을 헤매는 게 좀 힘든가?
더군다나 마교놈에게 죽을 뻔도 하고.
하지만 힘들다고 할 수 있나?
“아, 아닙니다! 장모님!”
그러자 쭈뼛거리며 대답하는 장모님.
“예, 그래도 청이의 몸은 이제 곧 다 나을 테고, 그러면 그간 미루었던 것을 마음껏 해도 좋지 않을까 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응, 그래요. 이젠 마음껏···.”
“예!? 미루었던 것? 뭐지?”
장모님을 올려다보며 그런 것이 있었던가 눈을 깜빡이자 들려오는 전음.
[첫날밤.]
“헉!”
터져 나오는 헛바람.
이젠 거의 포기해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첫날밤.
세상에 서양인 어머니라 그런지 우리 장모님은 화끈하신 분이셨다.
하긴, 생각해보니 장모님은 유교의 땅인 이곳에서 꽉 막힌 선비 같은 장인을 자빠트린 선수 중 선수.
속도위반까지 하셨으니 내 불쌍한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으신 느낌.
해금(解禁)!
제작자가 해금을 허락한 상황.
내 가슴속이 미연시 게임에서 오마케 파일은 얻은 것처럼 기쁨으로 불타올랐다.
‘크흐윽! 아주 그냥 세이브를 해놨다가 계속 반복적으로 로드할꺼야!’
“감사합니다. 장모님!”
다시 한번 장모님께 넙죽 계수배를 올렸다.
그런데 그때 다시금 들려오는 조용한 장모님의 목소리.
“그런데 한가지 걱정이 있군요.”
“예? 걱정이라면?”
그러자 장모님께서 동굴 쪽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말씀하셨다.
“사위가 우리 청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아마 저 동굴 안에는 아마도 지금까지, 사위님이 알던 것과 다른 청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설마 치료가 잘못된 것입니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
지금까지와 다른 아내라니···.
내공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장애라도 남게 되거나, 빙공의 영향으로 한기가 뇌까지 미처 차도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일까?
장모님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을 때.
-쿠르릉.
마침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얼음이 무너져 내리고, 냉기가 흩어지며 입구가 드러났다.
그리고 장모님께서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자, 가서 청이를 만나보세요. 혹 예전 모습과 다르더라도 우리 사위님이라면, 그래도 청이를 아껴줄 것 같으니까요. 청이를 많이 위로해주세요.”
-꿀꺽.
장모님의 말씀에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나는 천천히 동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