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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239/344)

밥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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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 어르신 주, 죽여주시옵소서!” 

중원 제일 검. 

그러니까 중원 제일의 칼잡이가 앞에 나타나 자기 딸을 왜 허락도 없이 데려갔느냐 물으면, 생각해볼 것 없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이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그의 칼보다 신속하고 빠르게 대가리를 박는 것. 

가능할까 싶긴 했지만. 

‘이게 되네?’ 

전생이라면 지극하고 지고한 죄송함의 마음을 담아 그랜절을 박았겠지만, 내가 지금 할 것은 중원의 그랜절이라 할 수 있는 오체투지(五體投地). 

내 몸이 공중을 붕 하고 날았다가 배부터 땅으로 다이빙했다. 

-철퍼덕. 

안면과 복부로부터 수영장에 배부터 다이빙한 느낌의 통증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새로 나타난 남궁세가 장인 후보 당선확정자를 향해 시체처럼 엎드려 배를 깔고 대가리를 처박았다. 

검왕이 미소를 짓고 있다지만, 중원에 칼 쓰는 놈 중 상당히 많은 수가, 처웃으며 칼질을 할 수 있는 냉혹한 자들이며 동시에 사이코패스들. 

그런 행동이 얼마나 흔하면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사자성어까지 있겠는가. 

웃으면서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고. 

그러니 일단 박고 보는 것. 

“남궁현 형님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감히 남궁의 보배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취하고 말았으니. 저 식룡 유청운 입이 열 개로 할 말이 없습니다. 주, 죽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뒤통수가 따갑게 쏘아지는 시선. 

잠시 후 검왕의 입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해드려야겠군.” 

-스캉. 

‘아, 아니. 립서비스 인데요?’ 

체면상 해드린 말에 검왕이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드는 소리에, 불 위에 올린 마른오징어처럼 쪼그라드는 내 가슴. 

그런 쪼그라든 내 심장에 검왕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런데 내 가문에서 내쳤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니, 죄를 지었지만, 목숨을 거둘 수는 없고. 처음 생각대로 어디 한 군데를 자를까 하는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어디가 좋으려나?” 

그 말에 회음부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 

격투기를 보다가 누군가가 로우 블로 맞는 것을 봤을 때, 모든 남성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각이 하반신을 찾아왔다. 

맞은 것도 아닌데, 허전해. 

‘이제, 고작 한번 사용했는데!?’ 

일 년간 개고생해서 이제 고작 한번 시운전을 해봤는데, 몸과 이별해야 하는 분신. 

-꿀꺽. 

망연한 현실에 몸이 파들파들 떨릴 때 검왕과 나 사이를 무엇인가가 가로막았다. 

갑자기 생기는 그늘에 고개를 쳐들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소의 가녀린 어깨와 등. 

오늘따라 그 가녀린 등과 어깨가 괜스레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소소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는 말이 내 신체의 일부인지 아니면 전체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소소가 검왕을 막고 있는 모습에 풀리는 긴장. 

잠시 후 검왕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내 농이 좀 과했나.” 

높은 위치에 있는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 

자기 혼자만 재미있어 죽는 유머 감각. 

들은 사람은 심장 마비로 죽고. 

살해 적인 유머 감각에 맥이 탁 풀릴 때, 검왕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일어서게 얼굴이나 다시 보게. 내 이러다 딸에게 미움을 받고 말겠군. 사위.” 

‘그 미움, 이미 받고 계신 모양입니다만.’ 

이미 소소에게 잔뜩 미움을 받고 계시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는 느낌. 

소소는 집에서 호적 파서 나왔다며 집에도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 했었기에, 장인을 원망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인은 눈치 없이 그걸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일어나라는 말에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소소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일으켰다. 

[가, 감사해요. 은공.] 

들려오는 감사의 말과 소소의 붉어진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을 위해서 자기 아버지인 검왕에게 오체투지를 박아준 것을 감사하는 모양.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일어나자 검왕이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아, 소소의 검이 예전과는 또 다르더구나.” 

“맞습니다. 형님. 또 한 몇 걸음 나아간 것 같습니다.” 

몸을 일으키고 둘의 대화를 듣자 그제야 아까 검왕과 소소가 뭘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검에 미친 분들 아니랄까 부녀가 만나자마자 칼로 인사를 한 것이 분명했다. 

왜 전생 무협에도 보면, 검쟁이들은 몇 년 만에 만나서는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지 않았던가. 

‘어지간하구나. 진짜.’ 

“사위도 아주 잘 생기지 않았더냐? 성아?” 

“예, 형님. 인물이 훤칠합니다. 하하.” 

어쨌든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고, 소소를 내 여자로 받아들인 것으로도 크게 화를 내고 계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어서 앞자락을 털고 있자 장인이 웃는 모습으로 나를 돌아봤고, 그제야 장인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기름을 발라 가지런히 정돈한 머리. 

이마에 흘러내린 한줄기 애교 흰머리. 

조각처럼 깎아진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 

남궁현 형님이 나이를 먹으면 저런 모습일까? 생각되는 그런 모습. 

그가 이 중원의 검왕. 

중원 제일 검이며, 말보다 검이 빠른 자, 중원 조폭 사시미 연장질 끝판왕. 

내 새로운 장인이었다. 

아니, 새로운 장인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장인? 남궁 장인? 뭐 암튼 그런 사람인 것. 

‘생각해보니 호칭도 복잡하구나.’ 

일단 옷을 단정하게 가다듬고 소소를 옆에 세우고 계수 배부터 올리려고 했다. 

유교 사회에서 큰절은 필수니까. 

그러나 칼을 든 손으로 나를 가로막는 소소. 

-척. 

소소가 내 앞을 손에 쥔 검으로 가로막으며 남궁 장인에게 물었다. 

“아직 제 물음에 답변해주지 않으셨어요.” 

무슨 말인가 싶어 소소와 장인의 얼굴을 살피자, 장인 뒤편에 서 있는 무사들 뒤 여기저기에서 영영이의 만두 머리가 솟아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곧 영영이의 전음이 들려왔다. 

[가가, 둘이 마주치자마자 그냥 아무 말 없이 칼부터 뽑아 들어서, 저도 무슨 내용인지 몰라요.] 

장모와 청이는 무슨 필살기 같은 것을 배운다며 근처 뒷산으로 출타한 상태. 

혼자 남아있던 영영이가 둘이 왜 저리는지 모른다고 알려왔다. 

그러면 무슨 일 때문인지를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했다. 

소소는 집을 나와 은거하려고 했었다고 말했었고, 가문에 진절머리가 난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아무리 검이 좋다지만, 오라버니를 그렇게 만든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오라버니인 남궁현은 내가 구했고, 그 후에는 우리와 같이 다니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다가, 북해에서 오신 장모님의 이야기에 가문에 가서 빨리 인사를 해달라고 했던 상태. 

그런데 장인이 나타났으면 인사를 빨리할 수가 있으니 잘되었다고 해야 했지만, 뭔가 장인에게 화가 난 상태로 보이는 소소. 

아마도 소소의 물음은 형님인 남궁현과 연관된 일이 확실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는 상황. 

‘뭐지?’ 

그렇게 둘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장인의 입이 열리며 신기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형제혈적검무의미(兄弟血積劍無意味). 말이더냐?” 

오라버니의 피와 희생 위에 쌓아 올린 검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 

아마 소소가 한번 이야기했던, 집에 써두고 나왔다는 서찰에 쓰여 있던 내용 같았는데, 그 안에는 소소의 고민과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자기를 향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장인에게 남기는 물음.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냐는. 

검과 가문이 자식인 오라버니보다 소중하냐는. 

그렇기에 나를 만났을 때 검이 그리 갈피를 못 잡고 고민하고 있었을 터. 

역시나 소소의 대답이 이어졌다. 

“예.” 

‘집에 인사를 드리고 나와 혼례를 올리고 싶기는 한데, 아버지를 보니 예전 생각에 화가 나는 모양이구만.’ 

소소는 약간 그런 것이 있었다. 

화가 나면 마음은 안 그런데 정작 밖으로 하는 행동은 좀 다른. 

나나 영영이나 청이 한 테는 그런 적이 없다지만, 자기 오라버니를 구하려고 일면식도 없는 내게 검을 맡기려 해놓고, 정작 형님을 보니 토라져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이미 마음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아마 지금 소소도 장인이 왜 그랬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답은 뻔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가문을 이을 장자가 스스로 포기할 만큼 소소가 빛났고, 장인도 아들의 그런 마음을 도저히 포기시키지 못할 만큼 소소가 뛰어났기 때문. 

결국 내 여자가 잘났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저건 일종의 속상함을 나타내는 투정. 

소소의 검을 얼른 내리고 서로 노려만 보고 있는 것 같은 부녀 사이로 끼어들어 말했다. 

“자, 소소. 장인께서 오셨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장인어른을 이 자리에 계속 세워둘 셈이오?” 

“···” 

“장인어른 얼른 들어가시지요.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자 역시나 슬쩍 물러나는 소소와 못 이기는 척 따라 들어서는 장인. 

“예, 은공.” 

“그래, 알겠네.” 

‘소소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결국 둘이 판박이. 

아무튼 갑자기 분위기 살벌해진 둘을 식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식모에게 안쪽에 방 둘을 비우도록 지시했다. 

하인과 점소이가 쓰는 방이 하나씩 있었는데, 점소이는 식당에서 재우고 여자 하인 둘은 식모가 데리고 자는 걸로 하고 말이다. 

점소이가 좀 불쌍하지만, 원래 점소이는 식당에 의자 붙여두고 자는 것이 이쪽의 평균적 점소이 대우니까. 

그렇게 대충 교통정리를 하고 테이블을 다시 찾자 역시나 이어지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

일단 어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객잔을 찾은 남궁 장인에게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어찌 오셨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가 찾아뵈려 했었습니다만.” 

“그런가? 하지만 나도 마냥 기다리기는 힘들어서 말이야.” 

“예? 기다리신다면?” 

“집에 제서가 도착했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더군.” 

“아, 제서. 그, 그렇군요.” 

정말 여러모로 골치 아픈 제서였다. 

황후는 그냥 조용히 불러서 금이나 은이나 주면 되지, 왜 여기저기 제서를 뿌려댔는지···.

결국 봄이 되었으니 제서가 남궁가에 도착했고, 그로 인해 놀란 남궁 장인이 호다닥 내가 있는 것으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제서라는게 참 그렇다. 

이게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 하면, 소소와 나의 혼례 영장이 갑자기 도착한 느낌이랄까? 

혼례 보충역이나 혼례 2등급도 아니고, 혼례 현역 1등급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은 그런 느낌. 

장인의 말대로 영장이 도착했으니, 어쨌든 혼례를 올려야 했다. 

혼례 거부는 징역이 아니라 사형이 될 테니까. 

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 장인이 물어왔다. 

“그래, 해서 묻는 것인데, 자네는 소소를 어떤 위치로 맞아들일 생각이신가?” 

“예, 어떤 위치라면?” 

“내 자네가 이미 제갈가의 여식과 혼례를 올렸음을 알고 있다네.” 

“예, 그, 그러시군요.” 

장인의 말에 움찔하는 몸. 

첫 대면부터 다른 여자 있다는 걸 들킨 놈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 느낌. 

“해서 묻는 것이네. 이미 올려진 혼례이고, 더군다나 무림의 명사(名士)들을 모시고 올린 혼례인데. 그것을 무르거나 바꿔 달라는 것은 아니네만. 우리 가문의 체면이 있어 말이야.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내 아들은 가문을 이을 명분을 잃었네. 더군다나 제서에는 처로 기록되어 있는바···.” 

장인이 말끝을 흐렸지만, 대충 감이 왔다. 

혼례 자체는 어찌할 수 없으니, 최소 첩은 면하게 해달라는 말. 

남궁가도 지금 상태라면 원래 소소가 데릴사위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문의 대가 끊어지게 생겼으니까. 

소소와 내가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서 장인에게 보내주어야 할 상황. 

그런데 상황이 이리되어버렸으니, 가문의 체면과 대를 생각해서 최소 첩은 면하고, 대를 이을 자식을 데릴사위처럼 보내달라 부탁하는 것. 

하지만 소처 자리는 이미 영영이가 꿰차고 있는 상태,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스러운 상황에서 나보다 소소가 빨리 대답했다. 

“저는 첩도 상관없어요.” 

영영이의 자리를 밀어낼 수 없다는 말일 테지만, 그것은 우리끼리의 이야기이고, 장인은 소소의 말에 참지 못했고, 소리쳤다. 

“뭐라! 소소,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저는 첩도 상관없다고 하였어요.” 

“뭐라!” 

살기라도 서로 뿜어대는지 등골이 서늘한 분위기. 

여기서 나올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남은 이야기는 바, 밥 먹고 하실까요?” 

일단 둘을 화해시켜야 이야기가 될 것 같았기에 식사를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먹으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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