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자(單子)와 첨자(帖子)
.
사위가 큰 사고를 친 상황.
“처, 청운이 이노···.”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황당함과 분노가 제갈천을 휘감고 있었다.
그렇게 분노로 눈앞에 붉어질 때 들려오는 우내총관 허적의 전음.
[고, 고정하시고 일단 소저를 안으로 들이시지요! 보, 보는 눈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니고 남만야수궁주의 딸이 아닙니까? 무사들의 입단속은 제가 시키겠습니다!]
허적의 전음에 정신이 번쩍 든 제갈천.
그렇다. 잘잘못은 나중에 사위에게 따지더라도 일단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던 것.
그러니 허적의 말대로 이 상태로 저 소저를 세가의 문 앞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남만야수궁주의 딸이 직접 제갈세가를 찾아온 것이 퍼져나가 만약 점창파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세가 앞에 야수 궁주의 딸을 내어놓으라며 점창파가 몰려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직 점창과 남만야수궁의 은원관계는 완벽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니까 말이다.
얼른 저 소저를 세가 안으로 빨리 들여야 했다.
우내총관 허적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그, 그래, 진정하고 수습부터.’
제갈천은 정신을 가다듬고 남만야수궁주의 딸에게 대답했다.
“처, 청운이는 지금 집에 없지만, 그래도 머, 먼 길을 오셨으니. 소저,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어, 없다고요? 하, 어쩌지? 어디 멀리 갔나요?”
사위가 없다는 말에 난감해하는 야수 궁주의 딸.
그 먼 남만에서 아이를 배어 아이 아빠인 사위를 찾아온 모양인데, 세가에 없다니 난감할밖에.
같은 딸 가진 아비로서 야수궁주의 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사위와 청이는 얼마 전 남만야수궁에서 약왕을 찾아 복건에 도착해 청이의 치료를 한번 시도했다고 했고, 사위의 본가를 맡아 관리할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보내달란 서찰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르니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아직 복건에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
“복건에서 온 연락을 마지막으로 청운이가 현재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나, 일단 우리 가문에 온 손님이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소저. 머, 먼 길 오느라 배도 고플 테니 말이오.”
“청운이도 없는데 그래도 되나?”
제갈천의 제안에 머뭇거리는 야수 궁주의 딸.
제갈천은 좀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한시라도 빨리 세가 안에 넣어두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으니까.
“그 먼 남만에서 제갈가까지 왔으니, 시, 식사라도 하고 며칠 푹 쉬었다 가는 게 좋지 않겠소? 맛있는 요리를 준비할 테니 들어갑시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야수 궁주의 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은혜에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친구들이 좀 있는데 괜찮나요?”
“치, 친구?”
“예, 친구들을 좀 데려와서···. 안되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야수 궁주의 딸.
친구를 데려왔다는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얼른 그녀를 세가 안으로 들여야 했으니까.
제갈천은 얼른 야수 궁주의 딸을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안되긴 되다마다 다 부르시오. 그깟 친구들. 몇 명이나 되겠소.”
“아! 감사해요!”
-삐이익.
제갈천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감사를 전한 야수 궁주의 딸은 손가락 두 개를 입 안에 넣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소리가 세가 밖에 울려 퍼지자마자 세가 밖 저 멀리 풀숲에서 소란이 일이 시작했다.
-월! 월월!
-우끼끼끼끼.
그리고 곧이어 원숭이와 개들이 세가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자, 다들 들어가자. 청운이네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신 데. 이리 들어가면 되나?”
당황한 제갈 천의 귓가에 다시금 야수 궁주 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야수 궁주 딸을 따라 개와 원숭이들을 줄을 서 제갈가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호북 제갈세가에서 때아닌 개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
‘회임(懷妊)한 것이 사실일까?’
제갈가의 식당에서 개, 원숭이와 어우러져 식사하는 야수 궁주의 딸을 보고 있는 제갈천의 생각이었다.
두꺼운 겨울옷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배가 많이 나와 보이지도 않고, 먹을 것도 너무 잘 먹는 모습.
“맛있지 얘들아? 중원 요리도 먹을만하구나. 근데 이건 너무 기름지다.”
-월!
약간 그런 의심이 들고 있을 때.
“우욱···.”
제갈천의 의심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식사하던 야수 궁주의 딸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괘, 괜찮으시오. 소저?”
당황한 제갈천이 그녀에게 상태를 묻자 야수 궁주의 딸이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예, 괘, 괜찮아요. 실례했어요. 어떤 중원 음식은 좀 기름지군요.”
구역질하는 그녀의 모습에 질끈 감기는 눈.
음식이 기름지다고 변명하지만, 처녀가 헛구역질할 리가 있나···.
우내총관도 자기처럼 의심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전음이 날아들었다.
[저것은 아마도 입덧. 회임을 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긴 남만야수궁의 딸씩이나 되는 아가씨가 뭣 하러 남만에서 이 먼 제갈가까지 와서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회임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그냥 제갈천 자신의 희망이지.
‘그래, 이미 벌어진 일.’
제갈천은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고 이걸 어찌 처리할지나 궁리하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확인해볼 것은 과연 남만야수궁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개나 원숭이가 따라왔다지만 사람인 호위무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혹시 회임한 것이 두려워 아버지 몰래 나온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확인해보려는 것이었다.
어른들 모르게 둘만 저지른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 소저 혹시 소저의 아버님이신 야수궁주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는가? 서, 설마 둘만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니겠지? 그 아기···. 말이네.”
“아기? 아, 그럼요. 아버지도 식구가 늘어나는 일이니 아주 기뻐하셨는걸요. 청운이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그렇구만. 아, 아버님도 알고 계셔···. 더군다나 기, 기뻐하신다니···.”
이미 야수 궁주도 알고 있다는 말.
더군다나 기뻐했다니, 사위 청운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
솔직히 무공을 못하는 거 빼면 어디가 빠지는 놈이 아니니 그럴 수 있었다.
좀 전까지는 자신에게도 복덩이였으니까.
회임이 확실해졌고 남만야수궁의 궁주도 둘의 관계와 회임 사실까지 알고 있다니, 제갈천은 일단 가문의 식구들을 데리고 이 사태를 의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가문에 큰일이 날 수도 있는 문제, 이런 것은 가문의 어른들과 상의하는 것이 맞으니까 말이다.
“소, 소저, 그러면 식사 맛있게 하시고, 혹시 부족한 음식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시오. 나는 그 가문에 일이 있어서···. 불편한 일이 있으면 사람을 붙여줄 테니 그 사람을 통해서 알려주시고, 말이오.”
“네? 아. 알겠어요. 감사하옵니다. 얘들아, 필요한 것 있으면 더 말해. 필요한 만큼 주신대!”
-우끼끼끼!
-월!
제갈천을 향해 인사하고 다시 짐승들과 식사를 이어가는 야수 궁주의 딸.
그녀를 뒤로하고 제갈천은 얼른 가주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문의 좌, 우내총관과 어른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허적, 어서 가문의 어른들과 내외 총관들을 소집해주게. 급하네! 무엇보다 급한 일이니, 당장 가주전으로 달려오라 이르게!”
“아, 알겠습니다. 가주!”
제갈천의 명령으로 허적이 가주전 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가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제갈세가의 어르신들을 가주전으로 뫼셔라! 급하다! 가주의 명이시다!”
“알겠습니다. 우내총관!”
그렇게 가주의 명이 떨어진 제갈세가 내부는 때아닌 난리 통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사들이 가문의 어른들이 모여 사는 세가 뒤편 마을로 달려가고, 세가 내부에서 중책을 맡은 인물들이 허겁지겁 가주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가주전 내부에서 근엄한 제갈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문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이니, 좋은 의견이 있으면 누구라도 말씀해 주시오.”
그러나 제갈천의 그런 말에 당황하는 사람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허적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가주님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
아무래도 너무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
“······내 딸을 두고 그놈이, 남만야수궁주의 딸을 회임시켰지 뭡니까! 어찌 부부간의 신의도 없이. 아주 실망스러운 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불쌍한 딸···.”
제갈천은 가문의 어른들을 불러 모은 회의에서, 자기의 딸인 제갈청을 두고 몰래 남만야수궁주의 딸을 회임시킨 사위에 대해 성토를 했지만, 다 같이 사고 친 사위 놈을 비난하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난은 제갈천 자신에게 쏟아졌다.
자신의 성토를 듣고 물어오시는 고모님.
“가주, 그렇다면 청이의 남편이 남만야수궁주의 딸을 회임시켰다는 말입니까?”
“예, 고모님!”
제갈천의 대답에 아버지가 청이에게 내공을 물려주고 돌아가신 후, 이제 가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인 고모님께서 제갈천의 말에 눈을 감은 채 대꾸하셨다.
“그럼, 모두 가주의 잘못이군요.”
“예?”
모두 제갈천 자기의 잘못이라는 고모님의 따끔한 말씀.
당황한 제갈천이 고모님께 되물었다.
“어, 어찌 그것이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
-탕!
그러자 눈을 감고 계시던 고모님이 탁자를 후려치며 꾸짖듯 말씀하셨다.
“그래, 엄히 말하면 가주의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이겠지요.”
“예?”
“오라버니가 돌아가시고 가주가 가문을 잘 이끌기에 너무 가주에게 맡긴 것이 내 실수입니다. 세가 내부의 일과 사람을 단속하는 일은 안주인이 없으니, 여자인 제가 챙겼어야 하는데.”
가주의 잘못에서 고모님의 잘못이 된 사위의 잘못.
고모님의 자기 잘못이라는 말에 제갈천이 당황할 때, 고모님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주, 청이가 아내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필히 첩이나 소처라도 들여줘야 함이 맞는데, 어찌 그냥 둔 것입니까?”
“예? 그, 그것이···.”
“청이의 어미가 없으니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한번 출가했던 몸이라 세가의 일에서 너무 뒤에 물러나 있었더니···. 모두 제 불찰입니다···.”
그래, 고모님 말씀이 맞았다.
만약에 권세 있는 가문의 사위였다면 당연히 소처든 첩이들 사위에게 보내줘야 했던 것.
딸이 합방도 치를 수 없는 몸인데, 소처도 첩도 들여주지 않은 것은 자기 잘못이 맞았다.
“접각부이고, 또 부모 형제 하나 없는 몸이니. 내심 소홀히 대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고모님의 물음이 날카롭게 제갈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 없지도 않았던 것.
혼례를 치르기 전에 딸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숨기지 않았던가.
만약 권세 있는 가문이었으면 혼례가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거늘.
자신이 이십 년 동안 독수공방(獨守空房)한다고 사위에게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자신도 아내와 생이별하고 무척이나 힘들었지 않았던가.
좀 더 챙겨줘야 했거늘.
제갈천은 고모님의 말씀에 그제야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고모님.”
“이제 잘못을 아시겠습니까?”
“며, 면목 없습니다. 고모님.”
“내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도 청이를 위해서 아픈 것을 고치겠다고 중원을 돌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아이가 참다못해 한번 실수한 것 가지고 어찌 그리 박하게 구시는 겁니까?”
제갈천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눈을 지그시 감자.
고모님의 몰려든 세가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이 문제는 가주의 부끄러운 허물이니 다들 못 들은 것으로 하고 물러가세요! 제가 가주와 독대해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서슬 퍼런 고모님의 말씀에 다른 가문의 어른들과 총관들이 사라지고, 고모님께서 제갈천을 향해 말씀하셨다.
“이유가 어쨌든 사위의 아이를 가졌다니 그냥 둘 수 없는 법. 홑몸도 아니라니 가문에 있게 하고 싶지만, 아직 남만야수궁과 이야기도 되지 않았고. 점창과의 문제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면 최대한 그녀를 남만까지 잘 모시고, 아버지인 야수궁주에게 청운이 대신 귀한 예물과 단자(單子)와 첨자(帖子)를 넣어 혼담을 넣도록 하세요. 그것이 가주의 도리입니다. 사위도 우리 세가의 식구이고 자식이 아닙니까.”
“아, 알겠습니다. 고모님.”
고모님의 말씀에 풀이 죽은 제갈천은 모두가 떠난 가주전에서, 다시 일주차를 들이키며 조용히 신부의 가문인 남만야수궁으로 보낼 단자와 첨자를 쓰기 시작했다.
「류청운(劉靑雲)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출생(出生)···.」
상대방이 새외사천왕이라는 중원 팔왕과 같은 위치인 남만야수궁의 궁주이기에 최대한 예를 갖추어야 했으니, 정중한 혼담을 넣는 예에 맞추어 청운이의 출신지와 이름 같은 것을 적는 것.
그 후에는 새외 사람들이니 중원과 혼례 문화가 어떤 차이가 있을지 살펴보는 문제와 소처나 첩이냐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것은 혼담을 넣고 나서 야수궁쪽과 상의하기로 하고 말이다.
뭐 점참파의 문제가 좀 걸렸지만, 일단 중원 문파들 모르게 비밀리에 남만에서 둘의 혼례를 치르게 하고, 그것은 제갈가가 나서 화해를 주선하는 것으로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호르륵.
왠지 아까는 달콤했던 차의 끝맛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