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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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의 말은 그러니까 격화되는 정실 쟁탈전에 깽판을 놓으라는 말이었다.
판을 뒤집어엎으라는 말.
중원은 유교 탈레반이 깊이 뿌리내려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골수까지 유교에 물든 세계.
전생의 한국에서처럼 제사를 지낼 때까지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柹), 좌포우해(左脯右醢), 어동육서(魚東肉西) 같은 없는 것까지 만들어 지키지는 않지만, 순서와 서열 이런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무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때문에 무림 세계에는 아주 독특한 문화가 존재한다.
꽌시와 체면이 중원 전체에 널리 퍼져있는 기본문화라면, 중원이라는 땅덩어리 속 무림이라는 사회에 존재하는 독특한 계급 문화.
배분(配分).
배분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알아듣기 쉽게 다른 익숙한 단어로 바꾸면 촌수(寸數).
촌수란 원래 가족 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인데, 이 촌수를 사용하는 이유는 가족 간의 높고 낮음. 그리고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를 더욱 쉽게 알아보기 위한 것.
그러니까 배분이란 중원의 무림인들이 서로의 사이가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누구의 서열이 높고 낮은지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이자 계급체계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계급체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소 철학적이라 할 수 있다.
무공이라는 것의 근원이 하나라는 믿음과는 별개로.
무공을 가진 존재들은 탈 인간급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서로의 명성과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
정치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의 말대로 무림세계가 존재하는 중원은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힘을 가진 존재는 힘을 사용하기 마련이니까.
그 때문에 무림의 인간들은 피비린내 나는 무한 경쟁보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고수들이 가졌던 무한한 자유를 어느정도 포기하고 배분이라는 사회적 계약에 자신들을 묶은 것이다.
무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무림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최상위 팔왕급의 무인들을 제외하고 실제 가진 힘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누가 누구의 제자인가? 나이와 무림에서의 명성과 위치 같은 것으로 계급을 차이를 두는 것.
무한투쟁을 방지하기 위한 계급 시스템이랄까?
그러니 배분이란 계급 시스템하에서 서로 간의 분쟁을 최대한 막기 위한 것이라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아주 흔하게 드러나는 현상인데, 왜 전생의 조폭들이 서로 만나서 트러블이 생기면 ‘아야, 니. 족보 좀 읊어봐라? 내 동출이 행님 동생인데. 니, 동출이 행님 아나?’ 이러면서 족보를 따지는 것도 같은 의미인 것.
‘사회적 계약으로 내가 너보다 서열이 높은데, 우리 이런 것으로 싸우지는 말자.’ 같은 의미를 가진 행동이라 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미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솔직히 청, 영영, 소소, 미미를 놓고 봤을 때 무림의 배분으로 따지자면, 서열이 가장 높은 것은 미미.
청이는 팔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북해빙궁주의 딸.
소소는 팔왕인 검왕의 딸.
영영이는 팔왕인 독왕의 손녀.
그런데 미미는? 팔왕 자신.
명확하게 배분을 따지자면, 미미가 가문에서 할머니의 위치라면 청이, 소소는 어머니의 위치이고, 영영이는 딸의 위치 정도 되는 것.
그러니까 지금 소소, 영영이, 청이의 정실 쟁탈전은 미미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순간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배분을 가진 미미와 정실을 두고 경쟁한다는 것은 무림의 배분상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까.
할머니가 딸의 친구를 모시고 산다?
중원 유교 사회에서 벼락이 칠 일인 것이다.
그러니 미미가 신분을 드러내는 순간.
신입생 환영회가 벌어지고 있는 화기애애한 강의실 안에서 갑자기 미미가 나타나 ‘야 나 복학생 00학번인데 내 밑으로 다 조용히 했!’하고 말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랄까?
미미에게 다가가 귓속말하며 물었다.
[괜찮겠소?]
[무림의 높은 분들이니. 아마 제 신분을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않으실 테지요. 그리고 낭군님으로 인하여 다 한 가족이 된 것인데, 설마 가족을 팔아먹기야 하겠나요?]
슬쩍 좌중을 둘러봤다.
검왕인 남궁 장인, 그리고 그 동생인 숙부님.
당가의 독왕, 그리고 당가장인.
북해 빙궁주이셨던 장모님과 제갈 장인.
마지막 부분에서 약간 신뢰감에 의심이 들긴 했지만, 믿을만한 사람들.
다들 무림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분들이니, 어디 가서 입이 싸게 입을 놀린 분들은 아니셨다.
정작 북해 장모님도 당장 미미의 신분을 알리면, 아내의 탄핵안을 막을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고 계시는 것을 보면 좋은 제안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싸움을 막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후가 문제인데···.’
깽판까지는 좋았다.
어쨌든 미미로 인하여 정실 쟁탈전은 멈출 테니까.
그러나 그 후가 문제.
정작 넷의 위치가 결정되지 않으면 혼례도 못 올리고, 만약 올린다 치더라도 그 후에 또 밀린 이자가 굴러 눈덩이가 되듯 커진 문제가 나를 찾아올 테니 방법을 생각해야 했던 것.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는데 들려오는 장모님의 날카로운 음성.
“지금 그 말씀은 우리 청이 보고 정실 자리를 내놓으라는 말씀인가요?”
-드드드드득.
“크흠. 이 정도 실책이면 다른 가문에게도 피해가 가니,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한 발짝 물러서시는 것이···.”
“제식. 화를 낼 일이 아니라. 이거 우리 두 가문도 남만야수궁과 점창의 은원 관계에 제갈가와 같이 묶여 들어가니. 조금 양보랄까?”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니, 이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지금은 마치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같지만 곧 왈칵 쏟아질 느낌.
‘모르겠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
아내가 곧 울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기에 일단 터트리기로 작정하고 어르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 어르신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응? 청운이 네가 말이냐?”
“사위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어디 해보게.”
내 할 말 있다는 말에 모이는 시선들.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내의 탄핵을 막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흠. 제가 아내를 치료하려 중원을 떠돌다 보니, 어찌 인연이 되어 연성공을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오! 사위, 연성공의 의형제란 말인가? 대단하구만!”
“청운아 그 말이 사실이더냐?”
“고놈 참. 재주가 신기하단 말이야. 그와는 또 어찌 인연을 맺은 것이더냐? 연성공이라니. 놀랄 일이구만.”
역시나 연성공의 이야기를 꺼내자 놀라는 어르신들.
중원에서 관심을 모으는 데는 역시 연성공 형님만 한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감탄이 이어지고, 마무리는 역시나 매서운 장모님의 혼쭐.
“오, 자네 연성···.”
“조용해욧!”
“아, 알겠소···.”
혼쭐이 나는 장인을 힐끗 바라본 후, 어르신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듯 연성공을 형님으로 모시다 보니. 이 중원에는 법도와 높고 낮음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네가 아주 형님을 잘 모셨구나. 청운아.”
“그런데 제가 무림인이 아닌지라 그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무림에도 중요한 법도인 배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던데, 그것이 맞는지요?”
“오오, 그래 청운이가 배분에 대해서 들은 모양이로구나. 그래, 무림에는 배분이 존재하지. 그런데 배분은 어찌 묻는고?”
갑자기 배분 이야기를 꺼내니 의조부이신 독왕께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으셨다.
왜 지금 이 시점에 배분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하신 모양.
아무래도 같은 팔왕이나 팔왕 급인 배분이라도 나이가 제일 많은 의조부께서 배분에서는 깡패인지라, 배분 이야기가 나오니 제일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다.
원래 나이 많은 분들이 서열 같은 문제에 가장 민감하시기도 하고, 더군다나 독왕이신 의조부님은 무림 최고의 꼰대니까 말이다.
외조부님께 되물었다.
“의조부님.”
“에잉. 의조부라니. 정운아, 연성공을 형님으로 모셨다면서, 어찌 그리 부르느냐? 호칭은 정확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 조부라 부르거라 사위도 자식인데.”
이미 당가 사위로 낙점받은 사위(진)이 된 나.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금 대답했다.
“예? 아. 네, 조부님. 죄송합니다. 그간 계속 의조부님으로 부른 터라.”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 말해보거라.”
“예, 해서 그 배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들었는데, 혹시 제가 만일 조부님과 같은 배분의 여인과 혼례를 올린다면, 소소, 영영이, 청이의 위치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묻자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들려오는 놀란 목소리.
제갈 장인 이었다.
“서, 설마 자네 여인이 또 있나!? 게흑! 아 아뉘···.”
그러나 자기 딸 탄핵을 막으려는 나를 헛소리로 방해하려 하자, 장모님께서 팔꿈치로 혈도라도 찍으셨는지, 제갈 장인의 입이 삐뚤어지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장모님께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사위님, 말씀해 보세요. 이이는 신경을 쓰지 말고. 아까 그 약은 그런데 하룻밤에 두 알 먹여도 되나요?”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눈치를 채셨는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미미에게도 시선을 보내시는 것으로 보아 고마움을 전하시는 느낌.
제갈 장인을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아, 약은 뭐···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먹여보면 알게 되겠지요.”
오늘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제갈 장인에게 그렇게 사형 선고를 내리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부릅뜨는 제갈 장인.
그의 시선을 딴청을 피우며 피한 뒤, 좀 전 질문에 대답을 구하듯 독왕이신 조부님을 바라보자, 조부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아아, 싸울 일이 아니라. 셋의 위치는 우리가 모두 무림인이니, 무림의 배분에 따라 정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뜻으로 물은 것인 것 같구나? 그래, 너도 이제 무가의 사위이니 무림의 배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야지. 그리고 또 배분에 대해서 배우려면 나 같은 어른에게 배우는 것이 맞느니라. 그래, 내 정확히 설명하면 이리되느니라. 그러니까···.”
무림 최고의 꼰대이신 조부님의 설명. 이 질문에 대답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분답게 조부님이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셨다.
“일단 높은 배분과 낮은 배분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무조건 높은 배분을 따르는 것이 무림의 예. 네가 만일 나의 제자이면서, 내 아들이 제자라면 네 배분은 독왕의 제자가 먼저가 되느니라. 그러니까 따져보면······. 그 문파가 이쪽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아래가 되느니라 알겠느냐?”
“예, 조, 조부님.”
한 다경이나 지속된 무림 조폭들의 족보 설명.
누가 전국구고 누가 누구의 위고 아래인지에 대한 긴 설명이 한 다경 만에 간신히 끝이 났다.
“부족한 것은, 내 다시 한번 일러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청운아 에헴.”
팔다리 다 떼어내고 핵심만 짚자면, 조부의 설명은 아내인 청이가 제갈세가 가주의 딸임과 동시에 무림 팔왕급인 북해빙궁주이신 장모님이 딸이라면 무조건 팔왕급 북해빙궁주 장모님의 배분으로 대접받는 다는 말.
다만 똥개 새끼도 자기 집에서는 대접받으니, 같은 팔왕급이라도 엄밀하게 말하면 중원 출신을 살짝 높게 쳐준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결론으로 따지면 결국 소소, 청 다음으로 영영이 순이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미미가 빠진다면.
그렇게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바로 반응한 것은 역시나 남궁 장인.
소소의 아버지인 남궁 장인이 기뻐하는 얼굴로 외쳤다.
“그래, 그렇지! 무림인이라면 무조건 배분을 따라야 하는 법. 사위가 연성공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니 역시 배운 사람이 그런지 뭔가 다르구만. 그리하면 칠대세가의 수장인 우리 남궁가가 정실의 자리가 되는 것이니, 혼란스러울 일도 없겠구만 껄껄.”
법도와 배분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소소가 정실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느낌인지라 크게 기뻐하는 남궁 장인.
소소가 그런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며 두통이 난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어르신들을 향해 남은 지뢰를 작동시켰다.
‘미미 지뢰 On’
“허면 남궁, 제갈, 당가 그 어느 가문도 정실이 될 수 없겠군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사위.”
“그게 무슨 소리더냐 청운아?”
“그게···. 조, 조용하겠소···.”
갑자기 아무도 정실을 못 한다는 말에, 동그랗게 뜬 눈들이 나를 주시했다.
‘우리 청운이 정신 나갔니?’ 같은 물음이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
얼른 미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여, 여기 이 여인이 조부님과 같은 배분이니, 무림의 배분대로 하면 당연히 정실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나 남궁 장인.
남궁 장인이 무슨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위 그게 무슨 말인가? 조실부모해 사고무탁한 소저가 어찌 나나 독왕 어르신과 같은 배분이란 말인가? 자네가 아까 무림의 배분에 대해서 잘못 들은 게로구만. 어르신 설명을 한번 다시···.”
남궁 장인의 말에 독왕이신 조부께서 다시 긴 무림 족보에 대해서 들먹거리려 하기에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장인어른 잘 들었습니다. 다만 그녀가 장인 어르신과 또 조부님과 배분이 같은 팔왕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뭐라? 팔왕?”
“그게 무슨 소리더냐 청운아, 저리 젊은 소저가 팔왕이라고? 그런 소리를 들은 바가···. 서, 설마!?”
역시 중원 조폭들의 족보를 줄줄 꿰고 다니시는 중원 대표 꼰대 조부 독왕답게, 미미를 보더니 뭔가 감이 오신 느낌.
조부님이 뾰로통한 얼굴로 미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쯪. 누가 투왕 아니랄까 봐. 이렇게 정실 자리를 슬쩍 훔쳐 가는가? 검왕, 속 좀 쓰리겠소이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