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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國公) (251/344)

국공(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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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무슨 소린가? 저, 저 소저가 투왕이라고? 투왕이라면 분명히 신풍이라든지···.” 

믿을 수 없다는 남궁 장인의 목소리. 

애써 진실을 외면하고 싶으신 모양이었지만, 미미가 남궁 장인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내 뒤에 나타났다 다시 앞에 나타나는 묘기를 펼쳐 보이자, 남궁 장인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투, 투왕 맞구만···.” 

아마 미미가 보여준 빠른 경공인지 신법이 투왕의 트레이드마크인 느낌. 

순순히 다들 미미가 투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투왕 늙은이가 제자를 들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저리 어린 소저에게 벌서 투왕의 자리를 넘겨줬을 줄이야. 에잉. 다 같이 위연구어(爲淵驅魚) 해버렸구만.” 

조부인 독왕의 위연구어라는 말은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연못에 풀어주고 말았다는 뜻으로, 결국 죽 쒀서 개 줬다는 말. 

남궁 장인이 잠시 후 분하다는 듯 목소리로 미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투왕! 그러고 보니 이건 투왕과 무림 사이의 불문율에 벗어나는 일이지 않소이까?” 

“부, 불문율 말씀인가요?” 

‘불문율?’ 

갑자기 불문율을 들먹거리는 남궁 장인. 

대체 무슨 불문율이 있길래 저러나 싶어 다 같이 남궁 장인의 말을 경청하자, 그의 입에서 놀랄만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렇소. 불문율! 투왕은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인데···. 어, 어찌 칠대세가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사위를 훔친 것이요!” 

“그,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이 있었지! 역시 검왕이오! 훔쳐 간 우리 청운이를 내놓으시오!” 

‘아니, 그런 불문율이 있었어? 하긴 그런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조차 없고, 투왕이 마음대로 이것저것 훔치고 돌아다니면, 팔왕이 아니라 무림 공적이겠지?’ 

내가 물건도 아닌데 내어놓으라는 어르신들. 

그리고 그런 불문율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미미가 내 앞에 서 있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나를 돌아보더니, 남궁 장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그것은 트, 틀려요.” 

“뭐가 틀린단 말이오! 우리 사위를 그리 훔쳐 가놓고!” 

“맞소! 그것이 훔쳐 간 것이 아니면 무엇이오!” 

역시 정치력이 높은 남궁 가문. 

이렇게 또 활로를 찾아 역으로 공세를 펼치니, 도리어 이거 잘못해서 아내인 청이를 구하려다가 미미까지 잃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미미가 결단한 표정으로 용감하게 주먹을 꼭 쥐며 대답했다. 

“제, 제가 훔친 것이 아니옵니다!” 

“아니, 이리 증좌(證左)가 명확히 있는데, 우리들 앞에서 궤변을 늘어놓을 셈이시오? 사위의 여자임이 분명하다 해놓고 아니라니! 투왕이 이젠 사람까지 훔치는구려!” 

“맞소! 맞소!” 

하지만 용감함과는 별개로 남궁 장인의 공격은 집요했다. 

이렇게 밀려버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하지만, 우리 미미는 아주 용감한 여인이었다. 

이대로 밀려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내가 나서서 어찌 무마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들려오는 미미의 외침. 

“제, 제가 훔친 것이 아니라! 나, 낭군께서 제 마음을 훔쳐 가신 것입니다!” 

“아니, 그 무슨···.” 

자기가 날 훔친 것이 아니라, 내가 자신의 마음을 훔쳤다는 고백.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러면 투왕의 마음을 훔친 나는 중원 제일의 도둑놈?’ 

미미의 한마디에 남궁 장인이 할 말을 잃고, 한마디 말로 남궁 장인을 KO. 시킨 미미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옆자리에 앉은 아내 청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끄러워 못 참겠다는 듯이. 

*** 

미미의 등장으로 제일차 정실 대전은 그렇게 흐지부지 무마되는가 싶었다. 

다들 배분은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가, 미미가 나왔다고 배분을 무시하면 된다고 하기에는 자리에 모인 어른들의 체면이 낮지 않았던 것.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은 팔왕들의 체면을 손상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미미가 했던 한마디만 아니었으면···. 

“크흠···. 그리하면 정실은 투, 투왕이 되겠군.” 

“무림의 배분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뭐 그렇게 되겠지. 그나저나 청운아 투왕은 어찌 만났느냐? 연성공에 투왕이라니. 더 놀랄 것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미미로 인해 찬물이 뿌려져 싸늘해진 분위기에, 남궁 장인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와 놀랍다는 조부님의 음성이 흘러나갔다. 

청이를 탄핵 후 정실 자리를 차지하려던 남궁 장인의 야심이, 미미로 인해 무마되었으니 당연했다. 

정실 자리가 바로 손에 쥘 것처럼 느껴졌을 텐데 코앞에서 날려버린 상황이니까. 

그러나 역시 남궁은 남궁인지, 정실은 곧바로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른 것을 노리기 시작하셨다. 

“그러면 투왕. 다른 아이들의 위치는 어찌할 작정인가? 그리고 이미 정실인 제갈가의 청이가 있는데?” 

부끄러워 아직도 청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미미에게 남궁 장인이 다시 물은 것. 

아마도 정실은 물 건너갔으니 하나 남은 소처의 자리를 공략하시려는 모양이었다. 

정말 쏜살같은 태도 변화가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건···.” 

남궁 장인의 물음에 고개를 쳐든 미미. 

미미가 나를 바라보며 멈칫했다. 

명확히 말하면 집안에서 여자들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인 나의 몫. 

하지만 내 본가에 어른이 하나도 없고 내 신분이 제갈가의 데릴사위이니, 아무래도 입지가 약해 제갈 장인이 큰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데. 

미미가 나의 여자로 확정된 이상 정실과 배분이라는 두 가지 막강한 배경으로 내 여자들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생긴 것. 

장인들도 나에게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딸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니 우리 쪽에서 결정하라는 그런 말이었다. 

미미는 아내인 청이와 소소, 영영이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눈빛을 맞춘 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낭군님께 약속받았으니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약속?’ 

미미의 약속이라는 말에 갸웃거려지는 고개. 

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 잠시 당황하자 영영이가 전음을 날려 내 기억을 일깨웠다. 

[가가, 부엌에서!] 

‘부엌이라면? 아!’ 

‘나는, 누굴 소처로 누굴 첩으로 그렇게 나누고 싶지는 않구나. 영영아. 셋 다 아니, 넷 다 내 처로 맞고 싶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방법을 찾아볼 테니.’ 

약속을 하긴 했던 것. 

내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 자리에 없었던 아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소소가 대표로 아내를 향해 이야기했다. 

“청, 은공께서는 우리 중 누구를 소처나, 첩으로 만들어 우리의 위치를 나누고 싶지 않고, 우리 넷 다 소중한 처로 맞고 싶다고 하셨어요. 꼭 방법을 찾아낸다고 하셨지요.” 

그러자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역시 저의 노공이십니다. 저도 제가 먼저 혼례를 치르기는 했지만, 언니들 중 누군가를 아래에 두고 하는 것보다 노공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어르신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하셨다. 

“그, 그게 되는가? 사위?” 

“너희들의 우애는 좋다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더냐?” 

“우리 청운이와 아이들의 마음이 아주 고운데, 저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도리어 나한테 그게 되냐고 묻고 계셨지만, 난들 알겠나? 

멋있게 던지긴 했는데···. 

“어, 그것이···.” 

생각보다 큰일이 될 것 같은 느낌에 당황할 때, 한쪽에서 들려오는 소란. 

“부, 부인. 하 한마디만 해도 되겠소?”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시려고요!” 

“내, 내가 넷 다 정실이 되는 방법을 알고 있소! 지, 진짜요! 하, 한 번만 믿어보시오!” 

“네?” 

나도 아내도 여기 모인 사람 아무도 모르는 방법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장인. 

내가 존경하는 제갈의 피가 생각보다 많이 흐려진 것에 한탄하고 있었는데, 방법이 있다는 말에 다시 보게 되는 장인. 

설마 다시 트롤링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분들도 같은 의견인 모양. 

제갈 장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제갈 장인에게로 모이고, 간절한 그 목소리에 다들 발언을 허락해달라 북해 장모님에게 부탁했다. 

“빙궁주, 한번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손해는 아닐 것 같으니.” 

“제식, 한번 들어봅시다. 중원의 제일지낭(第一智囊)이라는 지낭 제갈천이 아니오. 한번 들어봅시다.” 

어른들의 성화에 장모님이 장인에게 잘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제발 제가 존경하던 이십 년 전 제갈천의 지혜면 좋겠군요. 다른 분들의 말씀도 있으시니, 그럼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그렇게 최종 결정권자인 장모님의 허락이 떨어지고. 

장인의 별호가 거창하게도 중원 제일지낭이라는 말에 조금 의구심이 들었지만, 발언이 시작되자 제갈 장인이 막힌 뚝이 터진 듯 거침없이 이야기를 뱉어냈다. 

“사위, 분명 넷 다 정실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나?” 

“예? 예, 무, 물론입니다만.” 

“그래, 솔직히 자네가 그런 방법을 선택할 줄은 몰랐네. 하지만 그 패기 내 존중하지.” 

“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그런데 방법이?” 

갑자기 거창하게 서론을 빼는 장인. 

조금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지만, 가슴을 진정시키며 되묻자 장인이 나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가 혼례를 올리고자 하는 처자들의 가문이 어디 그냥 가문인가? 더군다나 그 가문의 어른 개개인도 중원 무림에서 가장 높은 배분을 가지고 계신 분들. 솔직히 무림에서 우리들의 사위인 자네가 정실을 열 명을 하든지 스무 명을 하든지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네.” 

“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군요.” 

“응?” 

“아, 아닙니다. 마, 말씀하시지요.” 

열 명 스무 명이라는 말에 움찔하는 가슴. 

말이씨가 된다고 말조심을 하라고 외치고 싶어질 정도였지만, 꾹 참고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제갈 장인의 이야기. 

“솔직히 자네 아내가 열 명 스무 명인 것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불만인 놈이 있으면 찾아와서 우리 모두를 꺾고 불만을 이야기하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야. 과연 그게 될지 모르겠지만.” 

불만 있는 새끼는 한번 붙고 이야기해 보자는 지극히 중원 조폭다운 결론. 

그러니까 저 말은 그냥 예법이고 뭐가 다 까고 힘으로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다른 분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 

다른 분들도 저마다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감히 팔왕 중 둘과 새외사천왕 중 하나, 그리고 남궁, 제갈, 당가가 그리하겠다는데, 어느 놈이 감히 불만을 이야기하겠나.” 

“그럼, 청운이가 그리하고자 하면 우리가 힘으로 그리 만들어주면 되는 일이니까. 에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장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힘으로 하고자 하면 중원에서 우리를 막을 사람은 없을 것이야.” 

‘오, 그러면 그냥 찍어누르고 가자?’ 

심플한 결론이긴 했지만, 지극히 빠르고 합당한 결론. 

머리를 굴리고 계략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되기까지. 

“그러면 그냥? 혼례를···.” 

그럼 뭐 나도 이제 조폭가의 사위인데, 그 정도는 그냥 고고 하자고 말하려는데 들려오는 하지만. 

“하지만 말이네. 우리 무림인들도 대송의 법을 따라야 하는 황제의 신민 아니겠나? 허니 무림에서는 모르겠지만, 대송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에 변함이 없지.” 

“그, 그러면?” 

왠지 불끈했다가 팍 기운 없어지는 상황. 

괜히 시간만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장인이 나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위 국공(國公)에 오르시게. 그리하면 대송(大宋)의 법이 자네의 의지를 꺾지 못할 테니.” 

“국공?” 

“어허, 국공이라···. 그건 확실히···.” 

“구, 국공 말입니까?” 

로멘틱한 말 한마디 던졌다가 인생 목표가 이상한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내들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국공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 

“아니, 그, 그게 되 될까요?” 

내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묻자, 장인이 턱 끝으로 아내와 영영이, 소소, 미미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자네가 그리하고자 했다지 않았는가. 그러면 저기 자네를 믿고 있는 여인들을 실망하게 할 셈인가?” 

좌우로 고개를 돌려 내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다들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양손을 모으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들. 

-꿀꺽. 

무거운 사랑이 내 어깨를 남들의 네 배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다, 당연히. 그, 그리할 수는 없겠지요.” 

결국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정해진 대답이 내 입에서 튀어 나가자, 내 대답에 넷의 얼굴이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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