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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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國公).
그러니까 무협 세계에서 흔히 등장하는 왕야(王爷)라는 지위의 뜻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황실 혈통은 아니지만, 독특한 중원의 정치체제 하에서 황제에게 봉작 받은 왕 또는 제후를 가리키는 존칭.
중원을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가 다스리고 있다고, 중원을 절대왕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중원은 원래 고대부터 봉건사회를 지향했다.
다만 수많은 제후와 왕들을 거느린, 저 위에 있는 존재가 황제인 것뿐.
연성공 형님의 선조이신 공자님도 봉건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았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래서 중원은 한나라 이후 왕정에 들어섰음에도 봉건제가 가미된 중원만의 독특한 체제인 군국제를 유지하기도 했고, 황족과 공신을 분봉하는 제도 자체를 근대까지 유지하기도 했다.
칭호가 익숙한 왕야가 아니고 국공인 이유는 송 시대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신종(宋宗) 때 모든 제후를 제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국공(國公)이라는 칭호를 일괄적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명예직으로 말이다.
그러니 제갈 장인의 말은 결국 나보고 제후가 되라는 말이었다.
최고의 명예직을 얻으라는 말.
제후가 되면 표면적으로 소국의 왕정도 되는 위치를 얻으니, 황제에게 ‘제가 처가 좀 많은데 다 정실 시켜도 될까요?’하고 물으면 ‘너 정도는 그냥 해라. 그런 건 집안일인데, 뭐 그런 사소한 걸 다 묻고 그러냐?’ 같은 대답이 나오게 되니까 말이다.
무림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삼대 세가 처첩 사건을 무림에서는 힘으로 관철하고 중원에서는 권위로 관철한다는 것.
-삐그덕. 삐걱.
삐걱거리는 마차 안, 눈을 감았지만, 국공이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정말 이렇게 해서 국공이 될 수 있을까? 이거 실패하면 아내들 볼 면목이 없는데.’
그렇게 삐걱대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국공에 관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귓가에 아내들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트리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공, 저기 보입니다. 복주(福州)입니다!”
“가가. 복주에요! 복주가 보여요.”
“이제 얼마 안 가면 은공의 고향이군요.”
“낭군님? 아직 주무시나요?”
아마도 복주에 도착한 모양.
복주에 도착했는지 아내들이 설레는 목소리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차 가득 향긋한 분내가 퍼지고 있었다.
내 객잔에서 벌어졌던 일차 정실 대전 이후, 우리는 나의 고향인 복청(福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모든 것은 국공이 되기 위해서였다.
무공도 익히지 못했고, 이 몸이 원래는 일개 서생이었지만, 과거를 볼 정도의 학문을 쌓은 것도 아니기에 내가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국공이 되려는 것이다.
그 무엇도 아닌 요리 말이다.
요리로 어찌 국공이 되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갈 장인이 내게 터무니없는 계획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나는 요리로 태후께 제서를 한번 받은 상태.
거기에 연성공의 의형제라는 지위까지 있으니 이게 마냥 헛소리만은 아니었던 것.
이미 황실에 내 존재를 각인시켰으니, 그들이 내게 명예직을 내릴 정도의 공을 쌓아 어필만 하면 된다는 제갈 장인의 설명.
다만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내 처가들은 아주 쟁쟁한 가문들이지만 내 자체가 아무래도 명성이 조금 빠진다는 것이었다.
식룡(食龍)이라는 별호야 아무래도 후기지수 중에 내리는 칭호이다 보니, 무림에서의 명성이 아직은 아무래도 부족했고, 송 전체를 봤을 때도 연성공의 의형제만을 내세울 수 있을 뿐이니 표면적인 명성이 더 필요했다.
개뿔 꽌시 빼고 나 본래 류청운이라는 인간이 스팩이 부족했던 것.
해서 우리 쟁쟁한 처가들에서 류청운 스팩을 쌓아 국공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위의 뜻과 딸아이들의 뜻이 저렇다니, 저희 가문들이 힘을 모아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넷 다 정실이라. 그것 아주 재미있겠구나. 가주 청운이를 지원해줍시다.”
“물론이지요. 아버지. 청운아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세 가문이 힘을 합치면, 그깟 국공 하나 힘들겠느냐?”
“사위, 정말 그런 뜻이라면, 우리 남궁가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한번 마음껏 해보시게.”
세 가문의 의견은 서로 딸들의 위치로 싸우거나, 딸들이 원치 않는 위치가 되어 가문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나를 국공으로 만드는 것으로 모였다.
국공에게 딸을 준 것이 가문도 없는 남자에게 딸을 준 것보다 뽀대가 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원래 전생 거대 조폭들도 사위가 좀 빠진다 싶으면, 돈으로 회사의 회장을 만들기도 하고, 정계나 법조계에 사위를 얻어 돈으로 승진시키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로 시작된 스팩 쌓기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계 거점확보.
호북의 제갈세가, 안휘의 남궁세가, 사천의 사천당가와 같이 나 류청운을 내세울 수 있을 만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일 만만한 곳이 내 본가가 있는 복건.
이미 내 본가인 류가장이 존재하고, 포 형님을 통해서 혹시 모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
거기에 강남 개발로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한창 커지고 있는 곳이기에 기회가 많은 곳이었다.
또한 주변에 큰 세력이나 문파들도 없기에, 세 가문이 다른 곳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원을 퍼부을 수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다른 문파나 거대세력이 있으면, 세 가문에서 실질적 도움을 주기 힘든 일도 발생하니까.
그래서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복건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낭군님은 더 자게 둘까요?”
“그러지요. 미미 언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이어가자 들려오는 아내들의 대화 소리.
“은공의 본가가 기다려집니다.”
“미미야 오늘은 먼저 복주에서 기루에 들려야 해.”
“기루?”
“응,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거든.”
“아, 하오문이라는?”
“응. 가가께서 그 여자를 통해서 요리집을 열 위치를 알아본다고 하셨거든.”
류청운 국공 만들기 프로젝트 첫 단계 거점확보의 방법은 이랬다.
안휘의 남궁가는 검으로, 사천의 당가가 독으로 유명하고, 호북의 제갈세가가 뛰어난 머리로 유명하듯, 복주에서 요리 집을 열어, 복건류가 하면 요리 명문으로 알려지게 하는 것.
요리 명문 복건류가.
그것이 우리의 일차 목표였다.
그 때문에 복주의 실세인 비연을 만나 괜찮은 개업 자리를 알아보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내들 사이에서 자는 척을 이어가자 마차가 이동하는 느낌이 들고, 잠시 후 바람에 섞인 짠 내가 콧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차가 아무래도 복주 시내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
자는 척을 하다가 정말로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이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과 목소리.
“낭군님, 인제 그만 일어나셔야 할 것 같아요.”
미미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왔다.
“아, 깜빡 잠이 들었구려. 벌써 도착했소?”
“예, 낭군님. 화화루(花花樓)에 도착했습니다.”
눈을 비비고 옆자리를 보자 청이와 영영이는 이미 안쪽에 기별을 넣으러 간 모양.
소소와 미미만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일단 마른세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뒤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오랜만에 보는 화화루.
높은 전각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디 보자, 이전해와 달라진 것이 없구나.”
익숙하고 화려한 화화루의 모습.
마침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점심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라 화화루의 앞은 아직 한적했다.
그리고 그때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려왔다.
“공자니임~”
닫혀있는 화화루의 입구가 아닌, 옆에 식당 쪽에서 사용하는 문에서 달려 나온 비연이 내 쪽으로 나풀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던 것.
‘나 공자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아주 급하게 달려나왔어요.’라는 어필을 하기 위해서 버선인 말(襪)만을 신은 채로 말이다.
아주 그냥 여우가 따로 없는 모습.
뭐 영영이와 청이가 무서워 달려와 끌어안거나 그러지는 못하고 달려오다 멈춰 서겠거니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움직인 두 사람이 있었다.
“으엑.”
반갑게 달려오다 뭐에 걸린 것처럼 멈춰선 비연.
점멸하듯 사라진 미미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막아 세우고, 소소가 그녀의 배에 검집을 차단바처럼 사용해 내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 한 것이었다.
비연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소와 미미를 향해 물었다.
“누, 누구셔요?”
그러자 미미와 소소가 손가락과 검집으로 그녀의 이마와 배를 꾹꾹 눌러 뒤로 밀며 대답했다.
“류청운님의 실인(室人)입니다.”
“류청운님의 실인(室人)입니다.”
이어서 비연의 입에서 믿을 수 없고 놀랐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도 아직 안 믿기니까 말이다.
“네에? 더, 더 늘었어?”
그녀들이 본인을 아내인 실인이라 호칭하는 것은 장인들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
미미는 자신이 자신을 허락한 것이지만 말이다.
내 국공 만들기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장인들이 약속한 것 두 가지 중 하나 때문이었다.
장인들이 약속해 준 두 가지는 내가 국공이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할 것이고, 거기에 대외적으로는 아직은 쉬쉬할 필요가 있지만, 대내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혼례를 올리기 전에 자기의 딸들과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었다.
무한한 지원과 함께 자기의 딸들을 허락한 것.
유교 탈레반이 장악한 점령지에서 정말 통큰 결단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조치였다.
대출을 풀로 당겨준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장인들은 아주통 큰 것들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내 생각처럼 공짜가 아니었다.
담보조차 없는 신용대출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가지 담보를 요구가 있었던 것이었다.
“네엣! 저, 정말 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라고요?”
무한한 지원과 딸들을 허락하는 대신 류청운이라는 내 유일한 개인 자산에 가압류를 걸고 싶다고 통보해 온 것이었다.
내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세 가문 통합 데릴사위 제안이 온 것.
국공이 되면 사위든 데릴사위든 처첩이 몇이든 비교적 자유로우니···.
“그래, 어떤가? 자네와 딸들이 원하는 대로 다들 정실이 될 수 있게 우리 세 가문이 지원할 것이니, 우리 모두의 데릴사위가 되는 것은?”
“그래, 청운아. 우리 당가도 가솔들 앞에서 가문의 전통을 어기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하니, 네가 데릴사위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구나.”
“사위 그래 주면 우리 남궁의 대도 끊기지 않을 테니, 부디 그리 결정해 주면 좋겠네.”
‘아니, 이래도 되는 거냐고···.’
영혼까지 저당 잡히게 된 상황에서 영영이와 소소를 바라보자 둘은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이며 내 결단을 종용했다.
[가가, 그냥 한다고 해버리세요. 어차피 한 가문 데릴사위나 두 가문 데릴사위나 그게 그거잖아요? 그리고 말 한마디면 제가 영원히 가가의 것이 되는 거잖아요? 얼르은.]
[은공, 아버님의 말씀대로 해주시면 제 마음이 조금 편해지겠습니다. 저 때문에 가문의 대가 끊긴다니 조금 마음이 아프네요. 아, 아기는 제가 은공과 노력해서. 최, 최대한 마, 많이 낳아 양쪽 가문을 번창하게 하는데 히, 힘쓰겠어요. 응. 은공이 원하시는 만큼···.]
실로 악마 같은 유혹.
달콤한 속삭임에 고개가 자동으로 끄덕여지고 멍한 얼굴로 장인들에게 되물었다.
“저, 그, 그러면 소소, 영영이의 모, 몸값은?”
사람이라는 것은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삼아 발전하는 것이 사람.
이미 청이와의 혼례 때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적이 있는 터라 몸값에 관해서 확인하려 하자, 두 장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 어제 제갈 가주에게 물어보니, 자네가 청이 소저를 데려갈 때 실로 멋진 말을 했다지? 나도 그 정도면 되네. 하하하.”
“청운아, 나도 욕심은 없으니 세 가문이 같은 금액이면 되지 않겠느냐? 하하.”
‘아, 이거 인생 나락이구나. 영원한 노예 확정이로구나···.’
망연한 표정으로 영영이와 소소를 바라보자 둘이 전음으로 냉큼 물어왔다.
[가가, 뭐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욕심 없으니까. 청이랑 비슷하면 돼요.]
[은공, 그, 도, 돈이 없으시면 저는 조금도 괜찮아요.]
그러나 여기서 다른 금액을 이야기했다가는 세 가문의 차별을 두었다거나 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세 아내들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가버릴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래요, 저는 은 한 냥에 사 왔으니 소중하지 않다 이거죠?’ 부부싸움 단골 멘트가 정해질 것은 분명했다.
장인어른들에게 넙죽 절하며 대답했다.
“이, 류청운 장인어른들께 어, 억만금씩을 빚졌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삼아 발전하는 것이 사람이라는데, 나는 사람 새끼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 사람 새끼 아니구나···. 크흑.’
그나마 위안은 내 대답에 영영이와 소소가 예전의 아내처럼 활짝 웃어주었다는 것이었다.
“가가! 가, 감사해요. 어, 억만금이라니!”
“은공! 너무도 감사하고 멋진 말씀이에요. 억만금···.”
가슴속 눈물 두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