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왕문(偸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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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 뜬 태양이 대해(大海)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호수의 표면을 반짝이며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오의 따가운 태양을 피해 정자에 오른 한 노인이, 커다란 호수를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이고는 감탄했다.
“캬하···. 좋구나. 내 제자를 다 가르치면 말년은 이곳 항주(杭州) 서호(西湖)에서 보내려 다짐했었지만, 그날이 올 줄이야.”
노인의 입에 술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너무 달아 사당처럼 또는 꿀처럼 느껴지는 달콤한 술.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제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별호까지 넘겼으니, 이제 말년을 이 서호에서 은거하며, 제자가 말년을 위해 마련해준 재산으로 편하게 노후를 보내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싸구려 황주이지만 술은 어느 때 훔쳐 마시던 귀한 술보다 달콤했으며, 서호의 풍광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노인이 태양을 피한 정자로 불청객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저쪽에 자리를 잡으시지요. 대주.”
“그러세 소삼랑.”
노인이 한참 풍광을 즐기며 술병을 기울이는데 들려온 두 남자의 목소리.
“언제봐도 서호는 아름답구나. 아니 그렇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선객이 있으시군.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노인장?”
노인은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그간의 버릇대로 재빠르게 목소리의 두 남자를 살폈다.
‘허리춤의 칼, 은자 세 냥짜리. 옷, 철전 마흔 개짜리. 신발은 어디 보자···. 오! 가죽신! 귀한 것이로군! 아, 이게 아니지. 은거 전의 버릇이 자꾸···. 이거 빨리 고쳐야 하는데···.’
이제는 이런 것을 살필 이유가 없을 정도로 노년을 보낼 돈은 차고 넘쳤는데, 자꾸 예전 버릇이 나오는 노인.
대충 옷차림을 살피니 표사 정도로 보이는 두 사람이었기에, 노인은 자기 버릇을 고치리라 다짐하며 두 남자를 향해 얼른 대답했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술잔과 요리 두어가지를 들고 온 것으로 보아, 자신과 비슷하게 서호를 바라보며 술이나 한잔 기울이러 온 것으로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러시오. 뭐···. 정자가 내 것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노인장.”
“고맙습니다. 노인장.”
“뭐 고마울 것까지야.”
그렇게 노인이 정자 한편을 내어주고 다시금 술병으로 목을 축이자, 두 남자의 도란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주님 그럼 이곳까지 도착했으니, 아까 해주시겠다고 하신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허허, 이 사람 급하기는. 먼저 이 술잔부터 받으시게.”
“예, 하하. 제가 좀 급했군요. 알겠습니다.”
-꼴꼴꼴꼴.
조용한 정자에 술 따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후 서로 잔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대주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삼랑, 이번에 혼자서 표물을 가지고 복주까지 잘 다녀왔다지?”
표물이라는 말에 움찔하는 노인의 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표물의 이야기가 나와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상황.
노인은 바로 전 예전 버릇을 버리기로 해놓고 자신도 모르게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귀한 표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뭐 귀한 것이라도 옮긴 것인가?’
“예, 대주님. 다 살펴주신 덕분에···.”
“그래, 그래서 부른 것이야.”
“예?”
“축하하네. 자네도 이제 해성표국의 일급 표사네.”
“예? 이, 일급 표사! 감사합니다. 대주! 감사합니다!”
‘까, 깜작이야! 아, 승차한 모양이구만. 그럼 기쁠 만하지. 그나저나 그놈 목소리 한번 우렁차구나.’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깜짝 놀란 노인.
외침에 깜짝 놀라고 말았지만, 표국의 일급 표사가 되어 기뻐 지르는 소리 같기에 노인은 기대하던 마음을 접고 관심을 끄기로 했다.
‘괜히 좋다 말았네···. 그나저나 내가 왜 좋아했지?’
“하하, 이 사람 감사는 내가 아니라 어르신께 해야지.”
그렇게 두 남자가 서로 축하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대주라는 남자가 소삼랑이라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복주에서 별일은 없었나? 뭐 재미난 일이라든지.”
“재미난 일 말씀입니까? 아! 그렇지! 제가 복주에서 재미난 일을 겪었는데 말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래, 한번 해보게 무슨 재미난 일인가?”
신경을 끄려 했는데 재미난 일이라니 또 귀가 자동으로 기울여졌고, 노인은 또다시 남자들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대화에 집중했다.
“제가 이번에 복주에 도착해 하루 쉬고 있을 때였는데 말입니다. 늦은 아침을 먹으려 저자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공당으로 마구 몰려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당으로? 죄인이라도 잡혔나?”
“예, 밀주를 만들고 홍국을 밀매한 부자가 잡혔는데, 알고보니 그자들이 복주 기루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화월루라는 곳의 주인이라고 하더군요.”
“아니, 화, 화월루 말인가?”
“아십니까?”
“그럼, 알다마다 화월루라면 복주에서 한때 가장 큰 기루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화화루가 더 크다지만. 내 복주에 갔을 때 한번 본 적 있지. 그런 큰 기루에서 밀주와 밀매라니. 허허. 그런데 놀랄 일이긴 한데, 재미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놀랍긴 한데 재미난 일은 아니지. 아무렴.’
대주의 의견에 절로 끄덕여지는 노인의 고개.
그때 소삼랑이라는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주님 이제부터가 아주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데 복주지주가 관병을 보내 밀주를 만드는 곳에 들이닥쳤을 때 이놈들이 이미 만들던 술을 다 버려 증좌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군요.”
“허허. 아주 주도면밀(周到綿密)한 놈들이 아닌가? 그래,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재미있어지는 이야기에 노인의 엉덩이가 슬금슬금 둘 쪽으로 움직이고, 소삼랑이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예, 한데 관병들이 들이닥쳤을 때 다 버리긴 했지만, 이미 완성된 술 한 항아리가 밀주하던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주 어른은 그것이 밀주한 술임을 밝혀내려 하셨는데, 화월루의 주인은 이것을 관영주창에서 사 온 것이라 주장하는 상황, 관영 주창의 관리인도 그것을 확인해주어 복주지주 어른께서 아주 난처하게 되셨습니다.”
“그, 그래서 어찌 되었나?”
갑자기 들려온 물음에 대주와 소삼랑이라는 남자가 노인을 바라봤다.
‘아차! 이야기가 재미있어 나도 모르게···.’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끼어든 상황.
노인이 둘의 시선에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라 참을 수가 없어서···. 크흠···.”
그러자 웃으며 노인을 향해 말하는 대주.
“하하하. 노인장 합석하시겠소? 사해가 동도인데 이리 오시오. 우리 술과 요리가 적지 않으니.”
“그, 그래도 되겠소이까? 감사하오.”
노인이 새로 합류하자 술잔이 한번 돌아갔고, 술잔이 돌아가는 것이 끝나자마자 노인이 다시 소삼랑이라는 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어찌 되었소?”
“아, 그렇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복주지주 어른이 아주 난처하게 되었다고 했지.”
“아아, 그렇소. 복주지주 어른이 아주 난처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런데?”
소삼랑의 말에 대주와 노인이 소삼랑의 입을 주시했고, 노인이 조바심에 소삼랑이 표사 보다는 이야기꾼에 더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할 때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기서 재미난 인물이 등장합니다.”
“재미난 인물?”
“복청 류가장의 주인이라는 자인데, 복주의 항구에서 천하제일 류가 유육면이라는 요리를 파는 자입니다.”
천하제일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닌데, 범인들이 쓸데없이 요리 따위에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붙였다는 사실에 노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천하제일 류가 우육면? 허허, 참 광오한 이름이 아닌가?”
“노인장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직접 먹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그릇에 고기를 이리 수북하게 쌓아주는데······.”
‘아니 누가 요리 이야기 해달랬나.’
갑자기 재미난 이야기를 하다 말고 요리 이야기에 침을 튀기는 소삼랑이라는 남자.
노인이 속으로 짜증을 내며 소삼랑이라는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그래서 어찌 되었소?”
“······아차차 내 정신 좀 봐라. 츄릅. 얻어먹은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대주님도 노인장도 꼭 복주에 가시면 천하제일 류가 유육면을 꼭 드셔보십시오. 후릅.”
뭐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침을 두 번이나 삼키는 그의 모습에 노인은 복주에 한번 그걸 먹으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자가 자기의 제자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맞았다.
제갈세가가 머리가 똑똑하고 지혜가 많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접각부인 데릴사위까지 지혜롭다는 사실에 감탄했고, 그 제자의 혀가 술에 들어간 물맛이나 항아리에서 나는 맛까지 맞추었다는 말에 대주와 노인이 감탄했으니까 말이다.
“대단하구먼.”
“허허. 술에 그런 맛이 느껴진다는 말인가?”
술에서 그런 것을 느꼈다는 말에, 노인과 대주 그리고 소삼랑이라는 자까지 각자의 술잔에 담긴 술에서 뭔가를 느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셋이 멋쩍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자 소삼랑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말했다.
“뭐 아무튼 그래서 복주지주 어른의 판결이 이어졌는데···.”
“오, 그래, 판결! 그래서 개작두에 허리가 끊겼나?”
“그런 나쁜 놈들은 개작두 행이 맞겠지요. 노인장.”
역시 이런 이야기의 대미(大尾)는 작두형.
대주와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는 소삼랑.
“복주지주께서 벼락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투왕이 직접 훔쳐다 준 장부와 내 의제의 제자가 맛본 술이 명백한 증거! 이는 너희들의 주장대로 너희가 절대로 무고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투왕이 직접 훔쳐다···. 응?”
맞장구를 치는데 들려오는 뭔가 이해 못할 이야기.
노인이 눈을 끔뻑이며 소삼랑에게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예? 노인장이 가는 귀가 어두우셔서 못 들으셨군요. 너희가 절대로 무고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 말입니까? 아주 호쾌하지 않습니···.”
“아니, 그 말 말고···.”
“어, 내 의제의 제자가 맛본 술이 명백한 증거!?”
“아니, 그보다 앞에.”
“투왕이 직접 훔쳐다 준 장부?”
투왕이 직접 훔쳐다 준 장부라는 말에 노인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감히 투왕의 이름을 사사로이 팔 미친놈들이 있을 리는 없으니, 일인전승 문파인 투왕문(偸王門)의 오대 제자이자 장문인이 된 오대 투왕.
자기의 제자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만 것 같았으니까.
그리 길지 않은 투왕문의 역사 중, 여자의 몸으로 최고의 재능을 가졌으나 도둑질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자기의 제자.
백미미.
그녀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버럭 소리쳤다.
“뭬야!?”
그러자 들려오는 소삼랑이라는 자의 목소리.
“어이쿠 까, 깜짝이야! 왜, 왜 그러시오. 노인장?”
그 말에 노인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아니오. 그래, 토, 통쾌해서 그렇소. 아하하하하.”
“아하. 난 또. 정말 호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그렇소. 하, 하하 정말 호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소.”
노인은 어색하게 둘에게 어울려 준 후 곧바로 소피를 보러 간다며 자리를 피했다.
“내 잠깐 소피 좀 보고 오리다.”
“알겠습니다. 노인장.”
“그러시오.”
그리고 곧바로 제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복주로 몸을 쏘아냈다.
이름조차 훔쳐서 사용해 이름마저 없다는 사대 투왕 본인이 직접 말이다.
***
노인이 사라진 서호(西湖)의 정자에 남겨진 대주와 소삼랑.
둘은 노인을 잠깐 기다렸으나 노인이 되돌아오지 않자 둘이 먼저 술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아무래도 큰일인가 봅니다.”
“그럼 먼저 한 잔씩 돌려볼까?”
그렇게 먼저 술을 한 잔씩 돌리려 했지만 비어버린 술병.
소삼랑의 이야기에 빠져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금방 세 개의 술병이 비어버리고 만 모양이었다.
소삼랑이 빈 병을 털며 대주에게 말했다.
“대주님 술병이 이미 비어버린 듯합니다.”
“그래? 그럼 슬슬 되돌아가야겠네. 자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술병이 비어버리는 것도 몰랐구만.”
“하하. 그러면 항주에 가서 한 잔 더 하시지요.”
“그래, 그럴까? 노인에게 인사도 못 하고 떠나야겠구만.”
그렇게 정자를 떠나려고 할 때였다.
대주가 신발을 신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그의 신발.
가죽으로 만들어 저자에서 큰돈은 주고 산 것인데, 그 신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의 신발이 있던 자리에는, 천으로 만든 다 찢어진 신 한 켤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 신!”
분노한 대주의 목소리가 노을 지는 서호의 붉은 수면을 더욱 붉게 만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