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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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凍), 돈(燉), 로(滷), 변(邊), 소(燒), 에···. 훈(燻), 오(熬), 화외(火畏), 국(焗), 작(炸), 증(蒸), 자(煮), 초(炒), 으···. 그리고···. 아! 천(川), 취(脆), 고(烤), 탕(湯), 팽(烹), 전(煎)!”
점심 장사가 끝난 오후.
가련이가 구구단을 외듯 내가 알려준 요리법들을 달달 외우며 어시장으로 향하는 나를 따르고 있었다.
요리법의 개요에 대한 가르침을 준 지 벌써 보름.
스물한 가지 요리법을 외우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가련이가 청이나 나만큼 똘똘하지는 않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오로지 구전으로만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련, 힘들면 내가 글로 써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겠습니까?”
“예!? 어, 그, 그것이···.”
가련이가 알려준 것을 너무 못 외우기에 청이가 글로 적어 가르쳐주려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가련이가 까막눈이라는 사실.
전생에도 중원에는 일반인 문맹률이 높은 편이었는데, 송 시대 그것도 여자인 가련이. 거기에 평민이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한자 또 어렵기도 하고···.’
결국 계속해서 알려줄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암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凍).”
내 한마디에 하늘을 바라보며 뭔가를 떠올리는 가련이.
가련이의 입에서 곧 대답이 들려왔다.
“고기와 연골을 조린 국물을 차갑게 해 단단하게 만들어 잘라먹는 요리법입니다. 여름이나 더운 곳에서 만들기 좋은 방법입니다.”
“고(烤).”
“고, 그러니까 ‘카오’ 숯불이나 화로에 직접 굽는 요리를 말합니다.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집니다.”
“천(川).”
“음···. 아! 끓는 물이나 육수에 살짝 데치는 요리법입니다.”
“그래, 아주 잘했다. 그 정도면 통이다.”
“토, 통!”
내 통이라는 말에 가련이가 주먹을 꽉 쥐고 기뻐했다.
보름간 가련이를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은, 그렇게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는 않지만, 노력파라는 것이었고.
통이라는 말만 하면 아주 기뻐서 열심히 한다는 것.
‘통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은가?’
통이라는 말에 기뻐하는 가련이를 보며 피식거리며 웃자 옆에서 영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가, 가련이 그만 괴롭히고 얼른 가요. 전대백이 오늘 좋은 물건이 들어왔다고 집에 가기 전에 가져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알겠다. 어서 가자꾸나.”
“낭군님, 어서 가요.”
미미, 영영이 가련이와 저자를 찾은 이유는 저자에서 물고기 고르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마침 전대백이 우리를 위해 괜찮은 물고기를 잡아두었다고 가지고 가라기에 전대백의 가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전대백의 가게에 도착하자 전대백이 반가운 목소리로 우릴 맞았다.
“아이고 류 대인 어서 오십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아니, 무슨 선물을 해준다고 그러시오. 전대백. 영영이 때문에 남는 것도 없을 텐데.”
뭐 아들이 바다에서 잡아 오는 것이라서 파는 것이 남는 것이지만, 상당히 저렴하게 우리에게 물건을 공급해주는 것을 아는지라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전대백이 멋쩍은 미소로 대답했다.
“헤헤, 뭐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버니까요. 여기 이거 두 마리 가져가시지요.”
그가 내민 것은 은색의 쫙 빠진 몸에 깨알 같은 검은 점.
등 지느러미가 특징적인 물고기 화로(花鱸)였다.
“오, 이거 화로 아닌가? 초여름부터 화로가 살이 오르니 조금 아쉽긴 해도 맛있어질 때군.”
“류 대인, 복주는 더운 지방이라 지금도 충분히 살이 올라 있을 것입니다. 헤헤”
“오, 그렇소? 아니, 이런 귀한 선물을···.”
“앞으로 잘 봐주십사 해서···.”
전대백이 손을 비비며 내민 것은 큼지막한 화로 그러니까 농어 두 마리.
뜬금없이 나한테 잘 보일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전대백이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그런데···. 화월루가 대인 것이 되신다는 소문이···.”
‘벌써 그 소문이 났나?’
왜 뜬금없는 선물인가 했더니 뇌물인 모양.
“어허! 이 사람이! 그냥 주는 선물은 아니었구만···.”
“죄, 죄송합니다.”
정색하듯 외치자, 전대백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훼이크.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뭐가 죄송한가. 앞으로 우리 가게 생선을 자네 것만 쓸 테니 걱정하지 말게. 단 좋은 물건을 주어야 하네.”
“헉! 가, 감사합니다요.”
‘나도 이런 상황에서 한번 놀라게 하고 싶었어. 항상 놀라는 처지였거든.’
접대하는 처지에서 접대받는 처지가 되자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가고, 전대백이 배를 갈라둔 농어를 포장해주는 사이 가련이 교육도 쉬지 않았다.
“가련아 잘 보거라 생선을 고를 때는 항상 눈과 아가미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란다. 이리 눈이 맑고 투명하고 아가미가 선홍색인 것이 잡은 지 얼마 안 된 생선이라는 뜻이지.”
“아가미. 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련이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뻐꾹. 뻐꾹.
뻐꾸기 소리는 새끼를 찾듯 한참을 울다 사라졌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미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조금 후였다.
“미미, 얼굴이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낭군님. 그냥 속이 불편해서.”
***
‘어째서 이리 썰렁한 것이지?’
포대륜은 한밤중 느껴지는 서늘함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서늘함이 느껴지는 원인을 찾자 활짝 열려있는 창.
분명히 잠들기 전 하인들을 시켜 창문을 닫아두라고 했는데, 고리를 제대로 걸지 않은 모양이라 생각하며, 대륜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침상 위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눈앞에 열린 창 달빛에 드러난 검은 그림자.
“히익!”
-슈슈숙
놀란 포대륜이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갑자기 몸으로 몇 줄기 강한 바람이 날아들었고.
그 날아든 바람에 몸 몇 군데가 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며 살이 출렁거렸다.
“누, 누구! 커흡!”
그리고 다시 소리를 치려 하자, 검은 그림자가 입을 틀어막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참, 살이 쪄서 혈도가 잡히지 않는 놈은 또 처음일세.”
대륜의 입을 틀어쥔 손아귀의 힘.
그 바람에 대륜의 볼이 비명을 지르듯 누군가에 손아귀에서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대륜이 정신을 차리고 열린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달빛에 자기 입을 틀어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것은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
입을 틀어쥐고 손날을 자기의 목에 댄 사내의 모습에 포대륜이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끼힉!”
포대륜이 이렇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림에 떠도는 격언 때문이었다.
노인과 여자, 아이를 조심하라는 무림의 격언.
침입자의 머리가 희끗희끗해 나이가 많아 보임에도, 관병들이 경계를 서는 자기의 집에 이렇게 손쉽게 침입한 것을 보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닐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자객! 내, 내가 한밤중에 자객을 맞을 만큼 뭔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심우현에서 해 먹은 것이?’
포대륜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간 자신이 했던 일 중에 누군가의 원한을 살만한 일이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포대륜 자신 정도이면 그래도 정직한 편이었다는 자체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누군가에 의해 틀어막혀진 숨구멍.
정확히는 그의 볼과 함께 입을 막고 있는 것이지만, 양쪽에서 틀어쥔 볼 때문에 코가 눌려 숨이 막혀오고 있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숨 막힘에 대륜이 몸을 부들부들 떨 때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나쁘게 대하지는 않겠다. 노부는 그저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왔을 뿐이니까. 만약 소리치면 이 자리에서 죽일 테지만, 내 말에 성실하게 대답한다면 조용히 대담만 듣고 사라질 것이니라. 알겠느냐?”
끄덕끄덕.
한가지 대답만 해준다면 목숨을 보전해 준다는 말에 포대륜의 고개가 재빠르게 끄덕여지고, 틀어쥔 볼살 때문에 막혔던 코가 뚫리며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푸하! 허억! 허억!”
“응? 아 숨이 막힌 것인가? 미안하게 되었구만.”
자객은 정말 자신을 해할 마음이 없는지 포대륜이 숨을 돌릴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포대륜은 숨을 돌리자마자 자객을 향해 물었다.
“누, 누구시오. 대체 왜 야심한 밤에 보, 본 복주지주의 처소에 침입한 것이오. 대, 대송의 관리의 침소에 침입하다니 관이 두렵지 아, 않소?”
포대륜의 질문에 호선으로 바뀌는 사내의 눈매.
사내의 눈매가 미소를 짓는 것 같더니, 복면 안쪽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 자네에게 장부를 준 사람.”
“자, 장부? 그게 무슨? 헉! 서, 설마!”
갑자기 장부를 준 사람이라는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지만, 장부라는 말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
얼마 전 황 씨 부자를 참했던 사건에서 의제인 류청운이 가져왔던 화월루의 장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장부에 출처에 대해서 의논하다가 의제인 청운이 투왕이 가져온 것으로 하고 모든 것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
“투, 투왕···.”
포대륜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짐작한 상대방의 정체가 흘러나오고, 상대방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투왕이네.”
포대륜의 말을 맞는다고 확인해주는 투왕.
그 말에 포대륜의 눈이 질끈 감겼다.
‘크, 큰일이구나. 투, 투왕이 직접 나타나다니.’
투왕이 나타났다면 분명 자신의 별호를 팔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던 의제인 류청운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 순간 그 얼굴이 조금 얄미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간 승차에부터 이번에 큰 도움까지, 아우에게 도움을 받은 것만 몇 번이던가.
처음에는 승차를 목적으로 줄을 대기 위해서 의형제가 되었지만, 자신이 제갈각 어른을 모른다고 했을 때도 자신의 사정을 듣고 도리어 자신을 감싸던 동생이 아니었던가.
제식들이 무림인이고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투왕과 같은 무림 팔왕이기는 했지만, 거긴 아무래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곳이기에, 그쪽까지 가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 자기가 그냥 혼자 뒤집어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피를 나눈 것이나 진배없는 의형제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 아무래도 내가 안고 가야겠구만.’
목숨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으니, 투왕이라는 별호를 가진 자가 자기의 말을 어기지는 않을 터.
포대륜은 마음을 진정하고 투왕에게 대답했다.
“투, 투왕이셨구료. 왜 찾아왔는지는 짐작이 가는구료. 내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이 포대륜 죄, 죄인을 잡아들이기 위해서이나 무림에 명망 높은 투왕의 별호를 마음대로 사용했으니,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리겠소.”
그렇게 투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들려오는 투왕의 목소리.
“아니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네. 자네야 그것을 받은 것뿐이라는 사실은 알고있네. 그러니 그것을 자네에게 진짜 가져다준 사람이 알고 싶은 것이라네.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알겠는데, 화월루가 오 층으로 이루어진 전각이며 그 주인이 오 층 한 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내 이미 확인했네. 기와에 난 발자국도 확인했고 말이야. 그러니 그 아이와 어찌 알게 되었으며 지금 어디 있는지 어서 알려주시게.”
‘뭐라고? 설마?’
투왕의 말에 포대륜은 아무래도 무공을 익힌 의제의 제수 중 하나가 몰래 장부를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고, 누가 가져왔는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눈을 질끈 감은 채 대답했다.
“모, 모르오. 그냥 화화루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만 들었소! 저, 정말이오.”
그러자 목뒤를 움츠러들게 하는 기운이 포대륜을 감쌌고 투왕이 분노하며 말했다.
“하오문 놈들은 그냥 끌어들인 것일 뿐일 텐데 나를 바보로 아는가!?”
“하, 하오문!?”
“내 화화루도 가보지 않았는지 아는가? 기녀부터 점소이까지 하오문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놈이 없었는데. 감히 나 투왕을 능멸하면 내 아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탱탱하던 포대륜의 살이 주르륵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이 투왕이 살기를 쏘아내는 것이 분명한 상황.
-쉬이이이이.
바지 아래 춤이 따듯해지고, 두 눈이 초점을 잃어갔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투왕이 뭔가 완급을 조절하고 있는 느낌.
포대륜은 치욕스러운 상황에서도 의제를 지키기 위해서 소리쳤다.
“나, 나를 이, 이리 능욕한다 해도 결코 내 의제를 팔아먹을 수는 없소! 차라리 이 목숨을 가져가시오!”
“응?”
그러자 자신을 향해 눈을 깜빡인 투왕이 포대륜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아, 자네의 ‘의제’가 가져다준 것이구만?”
‘이, 이런 바보같이!’
“아, 아니오. 사, 살기를 맞아 말이 헛나온 것이오!”
살기에 정신이 없어 말이 헛나온 상황.
포대륜은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투왕은 포대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미소를 지은 눈으로 인사말을 남겼다.
“내 자네의 ‘의리’에 감탄했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의제에게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의동생인 청운이를 밀고해버린 것 같은 이 상황을 비웃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투왕의 그런 목소리에 포대륜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렇기에 포대륜은 뭔가 변명하려 했지만. 투왕은 열린 창문으로 빠르게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 그것이 아니···. 아, 아닌데···.”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침상 위에서 포대륜이 이불을 부여잡고 좌절했다.
‘이, 이게 아닌데···.’
그리고 잠시 후,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의제에게 경고라도 해주어야 했던 것.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없느냐!”
오줌 지린내를 풍기는 포대륜의 외침에 번을 서던 관병들이 몰려들었고.
복부 지주의 추한 모습에 깜짝 놀란 관병들은, 길길이 날뛰는 지주의 성화에 허겁지겁 복청 류가장으로 말을 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