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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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내 처소에서 미미와 잠들었던 나는 옆자리가 허전한 느낌에 눈을 떠야 했다.
그리고 문밖의 참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절벽 위에 뜬 달빛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야행복을 입고, 같은 야행복을 입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미가 내 시야에 들어왔던 것.
“왜, 왜 찾아오셨나요?”
“그런 짓을 하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았더냐? 네가 나를 꼭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 않았더냐?”
“저도 이제 행복해지고 싶다고요! 흑···.”
“아무래도 좀 더 훈육이 필요한 것 같더구나. 흐흐. 그냥 내게 돌아오거라.”
‘이, 이게 대체 무슨 대화지?’
내가 처소에서 미미와 자고 있던 이유는, 아무래도 청이의 오마케가 해금되어 모두 같이 자는 것은 불가능해, 같이 자는 것은 순번제가 되고 말았는데, 오늘은 미미의 차례였던 것.
그러나 저자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던 미미는 어쩐지 잠이 들기까지 어두운 얼굴이었고, 자다 깨보니 문밖에 저런 상황이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어, 어째야 하지.’
혼란스러운 상황.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전생하고 내 혈액형이 항상 궁금했는데, 지금 이 순간 내 혈액형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A형이 맞는 것 같은 느낌.
그도 그럴 것이 야밤 문밖에 미미가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고도 문고리를 부여잡고 나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외도 장면을 목격했을 때 A형은 문고리를 부여잡고 울고, O형은 뛰어 들어가 싸우며, B형은 경찰서에 고발하고, AB형은 그 모습을 음흉하게 바라본다고 했던가?
미미가 외도 같은 것을 할 리는 없겠지만, 대화 내용이 뭔가 이해가 되지 않아 나서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때.
“자, 돌아가자!”
남자가 미미의 손목을 틀어쥐었고, A형이라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문짝을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섰다.
“멈추시오! 남의 부인에게 대체 무엇 하는 짓이요!”
그렇게 처소 밖으로 뛰어나가자 놀라는 미미와 더 놀라는 복면의 남자.
“나, 낭군님···.”
“뭐, 뭐라 부인? 낭군? 설마 혼례를 치른 것이냐!? 그냥 좋아하는 놈이 생긴 줄 알았더니. 허허!.”
“그 손 당장 놓으시오!”
허겁지겁 달려가 남자의 손목을 부여잡자 도리어 확 꺾이는 내 팔.
남자의 손에 의해 내 팔목이 뒤로 돌아갔다.
‘아, 모양 빠져···.’
“아! 아아! 이, 비겁한 새끼가 팔을 꺾네! 너 내가 팔만 풀리면 뒤졌다.”
꺾여진 팔에 뒤로 고개를 돌리고 버둥거리자, 미미가 남자를 향해 빽하고 소리를 지르며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사부님! 놓으세요! 낭군님 괜찮으세요!?”
“사, 사부?”
미미의 사부라는 말에 번쩍 드는 정신.
미미에게 듣기로는 사부라면 분명히 전대 투왕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미미가 어린 자기를 잡아다가 앵벌이 시킨 나쁜 놈이라고 하긴 했지만, 무림에서 처할아버지인 독왕이나 장인인 검왕 급이라니 대우를 해줘야 했다.
아니 얻어터지지 않으려면 일단 사과해야 했다.
전대 투왕에게 이 새끼라고 해버렸으니까.
“죄,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투왕 어르신. 제 부인의 손목을 함부로 잡기에 나쁜 놈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무림 말학(末學) 류청운이라 합니다.”
그러자 그의 복면이 내려지고 나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무림인도 아닌 놈이 말학은···. 그나저나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보니 미미에게 들은 모양이로구나.”
“예, 어르신. 어릴 때부터 미미를 키워주신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미미가 항상 고마운 분이라 한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약간의 립서비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미미의 눈이 등잔만 하게 부릅떠지며 나를 바라봤다.
대체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묻는 눈이었지만, 나는 미미의 손을 잡아 내 뒤로 숨기며, 꾹 쥐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래 사회생활 다 그래.’
의외라는 표정으로 미미와 나를 바라보는 전대 투왕.
“그래? 미미가 그랬다고? 크흠. 나를 원망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부모를 잃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을 키워줬는데 원망이라뇨. 미미는 그런 금수 새끼만도 못한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미안하다 미미야!’
미미가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내 말에 전대 투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미미가 마음이 여린 아이긴 하지.”
미미의 시선을 느끼며 투왕을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
“그, 그나저나 투왕 어르신. 이 야심한 밤에 어찌 담을 넘으신 것입니까? 그냥 찾아오셨어도 제가 극진히 대접했을 텐데요. 제 부인의 부모 같은 분이 아닙니까?”
그러자 전대 투왕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투왕이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 보았더냐? 아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고 있는 걸 보니 말재주가 있는 놈이로구나. 내 묻겠다. 너희 둘이 혼례를 올린 것이 맞더냐?”
“예, 어르신. 아직 혼례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미미를 제 부인으로 맞아 평생 해로하기로 약조하였습니다.”
“마, 맞아요!”
좀전의 서운함에 보상이라도 하듯 미미의 손을 미미의 손을 꾹 쥐며 대답하자 심각한 표정으로 되묻는 투왕.
“미미가 어떤 신분인지 알고 내린 결정이더냐?”
“예, 물론입니다. 어르신.”
내 대답에 그가 턱을 쥐고 뭔가 생각에 빠지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천륜에 어긋나니 둘을 떼어내는 것도 힘들겠군···. 이거 어쩐다···. 투왕씩이나 돼서 훔친 것을 관아에 가져다주는 패륜과도 같은 일을 저지른 것 같아 놀라 쫓아왔더니, 그건 큰일도 아니었어···.”
“어, 어찌 그러시는지요?”
‘아니, 훔친걸 누구주면 패륜이냐고···. 그나저나 화월루의 장부 때문에 투왕이 언급된 일로 오셨구만···.’
결국 나 때문에 미미를 찾아왔다는 말에 미미에게 조금 미안해졌고, 전대 투왕의 난처한 목소리에 이유를 묻자, 투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미미의 지아비니, 이정도는 알아도 괜찮겠지. 자네 투왕이라는 별호와 투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본 후배, 무림에 대한 배움이 일천 해 많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투왕이 팔왕 중 일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뭐 다들 그 정도는 알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투왕이 전대 투왕에게 별호를 넘겨받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계율이 넘겨지네.”
“세 가지 계율 말씀이십니까?”
미미에게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이기에 미미의 표정을 확인하자 난처하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
그녀 대신 투왕이 말을 이었다.
“그래, 세 가지 계율. 첫째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반드시 잡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두 번째가 제자를 키워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큰 도둑질로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해야 하는 것이지. 셋 다 아주 중요한 것이라 반드시 지켜야 하네.”
‘참 별 도둑놈 같은···.’
계율도 참 도둑놈답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런 것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큰 도둑질을 해야 한다는 것만 빼면 숨어 살며 제자 하나 키우면 되는 일.
미미가 원하는 삶과도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괜찮을 것이라는 대답했지만, 전대 투왕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아비가 있는 아이에게 지아비의 눈을 피해 도둑질을 하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말에 깜짝 놀라는 미미.
설마 그렇게 이야기할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미미가 전대 투왕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내가 이리 말할 줄 몰랐더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미미.
그 고갯짓에 투왕이 멀리 달이 뜬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무(武)가 아무리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을 근본으로 삼고있어도, 부부간의 도리는 천륜인데, 지아비를 속이거나 근심하게 할 일을 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결혼한 부인이 도둑질하러 다니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느냐···. 그나저나 계율은 어쩐다.”
답 없는 날도둑인 줄 알았는데 유교의 근본은 지키는 모양.
‘역시 유교 사회구만. 계율이라···. 잠깐?’
그의 말에 번뜩이는 생각.
결국 계율이란 일종의 계약.
슬쩍 미미와 전대 투왕이 묶인 계약의 조항을 머릿속으로 살펴보니 맹점이 훤히 드러났다.
‘계약이라는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르고. 글자 하나만 틀려도 계약 사기를 당하는데 이런 허술한 계약이라니. 현대 계약의 매서움을 보여줘야겠어.’
현대에서 전생한 나로서는 미미가 묶인 계율이 너무 허술한 계약이었던 것.
전대 투왕에게 곧바로 대답했다.
“어르신 생각해보니, 미미는 아마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큰 도둑질을 했습니다.”
“응? 했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미미를 번갈아 바라보는 투왕.
그에게 미미가 어떤 큰 도둑질을 했는지를 설명하기로 했다.
들으면 누구라도 깜짝 놀랄.
“물론이지요. 제갈세가, 사천당가, 남궁세가의 공동 접각부를 훔쳐 남편으로 맞았으니, 사람들이 깜짝 놀랄 일이 아닙니까?”
“뭐!? 제, 제갈세가, 사천당가, 남궁세가의 접각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놀라는 투왕.
그에게 이 복잡한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 그것이 어찌 된 것이냐 하면···. ······해서 그리된 것입니다.”
“아니, 자네에 비하면 우리는 도둑놈도 아니구만, 진짜 큰 도둑놈은 자네가 아닌가? 투, 투왕의 사내로 진정 부, 부끄럽지 않은 놈이구나···. 아니, 부끄러운가? 아무튼. 미미야 저, 정말 대, 대단하구나?”
그러자 투왕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미를 바라보며 그녀를 칭찬했고, 그 칭찬에 미미가 조금 부끄러운 표정에서 도도한 얼굴로 표정을 싹 바꾸더니,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 맞아요. 뭐, 제가 그랬지요. 호, 홀랑 훔쳐버렸지요.”
“그, 그나저나. 무림의 불문율은?”
아마 구대문파 칠대세가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말하는 것 같은데, 훔침 당한 당사자들이 오케이라면 문제가 될 리가 없는 것.
“당가의 독왕께서도, 남궁가의 검왕께서도, 또 제갈세가의 가주께서도 도둑질당하는 것을 허락한 바이니 괜찮습니다. 또한 다른 투왕들도 못 한 칠대세가의 것을 훔쳤으니 더욱 큰일이 아닙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아니, 그렇긴 한데···.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해야 하는데···.”
전대 투왕이 그게 맞느냐는 투로 중얼거렸지만 어림없었다.
“그, 세인이라는 것도 몇 명이라고 명시되지 않았고, 이미 투왕께서도 놀라고 독왕 어르신과 검왕 어르신 그리고 새외무림의 북해빙궁주도 놀랐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게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미미가 잡혀가기도 쉬워질 텐데 그러면 첫 번째 계율을 어기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독왕, 검왕에 부, 북해빙궁주까지? 하긴 많이 알려지면 그간의 일 때문에 관병들이 들이닥칠 테고 끄응···.”
내 말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겠던지 전대 투왕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제자는 어찌할 것인가? 도둑놈을 키우는 것을 허락할 텐가? 내 가문을 훑어보니 무가는 아니더라도 사대부 가문인 것 같은데···.”
“그야···.”
전대 투왕은 사대부 가문에서 도둑질이라니 말도 안 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우리 집안 뭐 엄마가 마교 장로니까.
도둑놈 제자야 어쨌든 미미를 아내로 맞았으니, 배달꾼 하나 키운다고 생각하고 허락해주면 될 일.
그 정도야 허락해준다고 대답하려는데 미미가 먼저 나서 투왕에게 물었다.
“그, 그것만 해결되면 되나요?”
“그야 당연하지 않겠느냐?”
“확실한 것이지요?”
“그래, 관아에 장부를 훔쳐다 가져다준 일은 불문에 붙이고, 내 그것만 확인되면 안심하고 돌아가겠다.”
그러자 미미가 내 팔을 낚아채더니 다시 처소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가요. 낭군님.”
“응? 어, 어디를 간단 말이오?”
“미미야 대답은 하고 가야지?”
미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 나와 전대 투왕.
우리 둘의 질문에 미미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미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대답했다.
“보, 보면 몰라요? 제, 제자 마, 만들러 가지!? 제자 만들어야 하니까 얼른 돌아가세욧!”
“뭐, 뭣!?”
“!”
-쾅
미미는 다시 고개를 획 돌리고는 나를 끌고 처소 안으로 들어와 문을 쾅 하고 닫더니, 나를 침상 쪽으로 밀어 넘어트리고는 자기 머리를 묶은 끈을 거칠게 풀어냈다.
그러자 비단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릿결.
미미가 고개를 털며 좌우로 머리를 흔들자, 타이즈 같은 야행복에 비단 같은 머릿결이 공중에 퍼지는 조합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어지는 미미의 조금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
“오늘 밤. 나, 낭군님의 아, 아기씨를 훔치러 가겠어요.”
나를 기쁘게 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반영해주는 미미.
아아···. 그녀의 말에 나는 오늘 밤 정말 몹시 나쁜 탐관오리가 되고 싶었다.
너무 나쁜 놈이라서 전 재산 탈탈 다 털려버릴.
‘내 속죄하는 의미에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몽땅 내어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