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5화 (285/344)

모용세가(慕容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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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는 새벽. 

장사를 위해 복주로 가기 위해 모인 류가장의 대문 앞. 

미미의 등에 업혀 축 늘어진 나를 보고 다들 의아하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노공? 설마 몸이 편찮으신 겁니까?” 

“가가? 왜 이렇게 축 늘어지셨어요? 사람이 늘어진 해삼 같애!” 

“응? 미미 언니는 왜 얼굴이 그리 반질거리시는 거지요?” 

간밤 몹쓸 탐관오리였던 나를 혼쭐 내주기 위해 찾아온 천사 소녀는 무척이나 가혹한 소녀였다. 

나의 모든 것을 홀라당 빼앗아 저항의 의지를 꺾어버렸던 것. 

그 때문에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결국 축 늘어질 수밖에 없던 것이었는데, 나는 축 늘어져 있고 미미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니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금방 들통이 났다. 

“서, 설마? 합방을?” 

유경험자인 청이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 

“하, 합방!? 언니, 저희의 약조가···.” 

“미미 언니, 너무해! 다 같이 혼례식까지는 기다리기로 해놓구!” 

소소나, 영영이는 장인들에게 부인의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은 허락받았지만, 혼례식에 혹시라도 배가 부른 상태가 될까 봐 합방까지는 허락받지 못한 상태. 

보통 중원 혼례식은 먼저 길일을 택하고 손님들이 찾아올 시간을 생각해 반년 전쯤에 초대하는지라 잘못하면 손님들 앞에 배부른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유교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니, 합방이 잠시 유예된 것. 

때문에 미미도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영영이나 소소의 혼례식까지는 합방을 미루기로 했었는데, 혼자 속도를 위반해버렸기에 영영이나, 소소의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해요. 둘 다. 하지만 어젯밤에 늙은···. 아니, 사부님이 찾아오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도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으니까요.” 

“네? 사부님? 사부님이면 전대 투왕? 밤에 찾아오셨다고요?” 

“언니, 제자를 만들어요?” 

결국 미미의 입에서 어젯밤 일의 자초지종이 흘러나오자, 다들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은 별도로 표현되었지만. 

“몰라! 나도 그러면 오, 오늘부터 하, 합방할래!” 

괴도 소녀의 협행이 다른 여인들을 감복하게 해버린 모양. 

가입 문의가 쏟아지고 ‘씨도둑’이 ‘류청운과 사 인의 씨 도적단’으로 탈바꿈하려 하고 있었다. 

‘청운아 정신 차려 이러다 진짜 죽는다!’ 

도적단이 활동을 시작하면 나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닐 것이 분명했기에 영영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축 늘어진 몸에 열리지 않는 입. 

미미의 등에서 자꾸만 감기는 눈을 떠보려 애쓸 때, 다행히도 영영이를 제지하는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영, 나중에 배가 부른 상태로 혼례를 치르려 하나요? 날이 잡혔는데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워져 오면요? 가문에 폐가 될 겁니다.” 

“치···.” 

‘오늘도 살아남고 말았군.’ 

유교 사회에서 혼례 전에 부인행세를 하는 것만 해도 통 큰 결단이었는데, 속도위반 아기 혼수까지는 결단코 불가능한 이야기. 

미미야 가문이나 부모가 없어서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영영이나 소소의 입장은 달랐기에 영영이는 심술 난 표정으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결론이 지어지자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당황스럽다는 청이의 목소리. 

“그나저나 오늘 우리 장사는 어쩌죠? 노공께서 저러신데?” 

“아···.” 

“그러네요. 가련이 화화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미미 언니, 그런데 대체 뭘 어쩌셨길래 가가가 저래요? 합방이 남자한테 힘든 거였나?” 

장사 걱정 마지막에 들려온 영영이의 물음, 

그 물음에 미미가 부끄러운 듯 말을 흐렸다. 

“어젯밤 뭘 좀 많이 훔쳤더니···.” 

“훔쳐요?” 

“훔쳐?” 

끝나는가 싶었던 어젯밤에 일에 대한 의혹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 

결국 장사는 하루 쉴 수밖에 없었다. 

미미도 경공을 길게 펼치기는 조금 힘든 아픔이 있었고, 나도 일어날 수 없으니 당연한 수순. 

소소가 화화루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님과 가련이에게는 이야기를 전하기로 해 경공으로 혼자 복주로 달려갔다. 

그렇게 밝아오는 아침 소소가 복주로 향하고, 그사이 우리는 헐레벌떡 말을 달려온 관병을 맞아야 했다. 

“가가, 소소가 떠나자마자 관병들이 찾아왔어요. 급한 얼굴로 포형인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고 하는데요?” 

“그래? 그럼 가보자꾸나.” 

영영이의 말로는 집에 들이닥친 관병은 아장 하나와 그를 따르는 관병 둘. 

셋 다 말을 타고 달려왔다는데, 다리가 풀려 걷기가 힘들었으나 어떻게 말을 할 정도로는 회복된 체력. 

소소가 떠나기 전 내 처소 뒤편에서 잘라다 준 대나무를 지팡이 삼아 접객당에서 그들을 맞기로 했다. 

그렇게 쾡한 눈으로 접객당에 지팡이를 짚으며 들어서자 놀라 소리치는 관병들. 

“헉! 서, 설마 늦은 것인가! 류, 류 대인 어젯밤 투, 투왕에게 습격당하신 것입니까!? 괜찮으십니까?” 

“그, 그것을 어찌?” 

‘아니, 이 사람들이 미, 미미가 투왕인 것을 어찌 알았지? 그리고 어젯밤 내밀한 개인 사정을?’ 

미미에게 습격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아장의 말에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아장이 서찰을 내밀며 대답했다. 

“지, 지주 어르신 댁에도 어젯밤 투왕께서 찾아오셨다 합니다. 여기 서찰.” 

“형님댁에도? 아, 그러면?” 

미미는 어젯밤 나와 함께 있었으니, 우리 형제가 투왕에게 습격(?)당한 것은 맞는데, 형님과 나를 방문한 투왕은 다른 투왕이 분명했다. 

그렇게 관병의 리더인 아장이 내민 서찰을 받아서 펼치자 드러난 것은, 눈물진 포 형님의 필체였고. 

살기에 쏘여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장부의 출처를 말하고 말았다는 눈물 어린 고백이었다. 

‘일반인이 살기 쏘였으면 그럴 수 있지. 나도 한번 죽다 살아났는데.’ 

제갈 장인에게 쏘였던 살기를 떠올리자 몸서리가 쳐졌고, 형님이 어제 나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에 살짝 죄송해졌다. 

“형님은 괜찮으시오?” 

아장에게 형님의 상태를 묻자 그가 관병 둘을 얼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한 아장이 은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지린 것일 뿐 다치시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크흠.] 

[저, 저런···.] 

어젯밤 우리 의형제에게 투왕이 방문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방문한 투왕도 습격의 방식도 자못 다른 듯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죽을 수 있었던 밤이었지만, 내가 좋아죽는다면 형님은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었던 모양이니까. 

결과도 좀 비슷했지만, 나는 천국을 형님을 지옥을 경험한 어젯밤. 

나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형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답장을 써 형님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렇게 소식을 전한 관병들을 돌려보내고 점심때가 지나자 소소가 되돌아왔는데, 소소 또한 관병들을 동반한 상태. 

혹시 아침에 찾아왔던 관병들이 다시 돌아온 것인지 확인했지만, 아침의 놀라운 소식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진 관병이었다. 

“은공, 저희에게 제서와 함께 화월루가 내려졌다 합니다!” 

“정말인가요!? 소소 언니?” 

“정말이야 소소야?” 

“정말입니까? 소소?” 

후원 정자에 늘어져 있는 나에게 기쁜 목소리로 외치는 소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관병의 무리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는데, 마침 우리 집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연유를 물으니. 복주에 제서가 도착해 우리 집으로 그것을 알리러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해서 제가 모시고 왔지요! 황제께서 제서를 내려 은공의 충의를 치하하시고 그 상으로 화월루를 내리셨다 해요!” 

복주 류가 반점 본점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 

늦은 봄 칠대세가회(會)가 삼 년 만에 황산(黃山)의 남궁 세가에서 열렸다. 

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칠대세가 회. 

처음에는 구대문파들의 회인 구파일방회(九派一幇會)에 맞서 세가들의 일치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회였지만, 이제는 무림의 팔왕 중 셋이나 칠대세가 사람이기에 칠대세가회는 작은 무림 전체의 회라고도 불리고 있는 상태. 

그 회의 마지막에 도착한 모용세가 가주인 모용승겸은 미안한 얼굴로 접객당 안으로 들어섰다가 조금 놀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늦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분들이 계시니 괜찮소이다.” 

“예? 아직도 말입니까?” 

그가 놀라게 된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인데, 첫 번째는 늦었으리라 생각한 자기보다 더 늦은 두 가문의 가주가 있다는 사실. 

두 번째로는 남궁세가(南宮世家)를 필두로 모용세가(慕容世家), 독고세가(獨孤世家), 사천당가(四川唐家), 하북팽가(河北彭家), 제갈세가(諸葛世家), 황보세가(皇甫世家)까지 일곱 가문의 가주들이 모여야 하는 회인데, 접객당 안에 이름 모를 흰 머리의 여인이 제갈세가 가주 옆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자리 배치가 이상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자기 자리에 안내받은 모용승겸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일단 자신의 의문을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해보기로 했다. 

일단 접객당 내부를 둘러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폈다. 

‘어디 보자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것이 누구인가?’ 

원래는 며칠 전에 도착해서 다들 모이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리 늦은 것이면 오지 않겠다는 말이거나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남궁, 당가, 제갈가, 팽가의 가주들. 

‘그러면 독고와 황보세가가 오지 않은 것이군.’ 

빈자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알게 되자 모용승겸은 그 원인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수련에 미친 황보세가 가주는 또 어디 가서 수련하다가 까먹어 늦는 모양일 테고, 독고가는 모종의 이유로 늦는 느낌. 

황보가가 늦는 것은 자주 있었던 일이고, 독고가는 오늘 반드시 참석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 문제로 커지던 불화는 결국 독고가 가주의 행동으로 이어질 예정이었고, 오늘 남궁가주를 칠대세가의 수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예정이었으니까 말이다. 

남궁가가 그간 수장의 자리를 오래 해 먹었기도 했고,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그를 끌어내리기로 입이 모인 상태였던 것. 

이미 같은 무가인 황보, 독고, 팽가, 모용의 입이 모였고, 거기에 당가나 제갈가는 회 내에서 항상 소외당하였던 입장이라서 조금 처지를 올려주면 될 일. 

남궁가주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기에 독고가주는 반드시 참석해주어야 했다. 

더군다나 독고가의 가주가 남궁이 물러나면 다음 수장의 자리에 모용승겸을 밀어준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모용승겸이 입을 열어 제갈가의 가주에게 물었다. 

두 번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제갈가주,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 모용가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찌 제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역시 제갈가주는 사람의 속을 훤하게 들여다보십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모용승겸이 옆의 여자에게 눈인사하며 묻자, 씨익 미소 짓는 제갈 가주. 

그가 모용승겸에게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회가 시작하기 전에 소개를 드리려 했는데, 궁금하셨던 모양이군요? 이쪽은 이십 년 전에 헤어졌던 제 처로 이번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데려왔습니다. 부인 인사드리시오. 저쪽은 모용가의 모용승겸 가주님 이시오.” 

“아, 부인이셨구려. 모용가의 가주인 모용승겸이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 아, 그러고 보니 제갈 가주가 혼례도 안 치르고 딸을 하나 키우고 있었지? 응? 색목인?’ 

제갈가주의 소개에 여인을 마주 바라보자, 머리색도 그렇고 자신을 마주 보는 여인의 눈이 푸른빛이 도는 색목인인지라 제갈 가주의 처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랑캐 여자가 숨겨둔 부인이었던 모양. 

대수롭지 않게 상대방이 포권을 해오기에 마주 포권하자 여자가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모용가주. 전 북해빙궁주 빙설화라 합니다.” 

“부, 북해빙궁!?” 

전대 북해빙궁주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게 된 모용승겸. 

전대 북해빙궁주라면 중원 팔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위치이고, 제갈 가주의 부인이라면 중원 팔왕 중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검왕 남궁 가주보다 살짝 어린 느낌. 

‘그, 그러고 보니···.’ 

그제야 남겨진 자신의 마지막 궁금증도 같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상석은 이 칠대세가회의 수장인 남궁이 차지하고, 그 양옆을 전통적인 무가(武家)인 자신의 모용가와 독고세가가 차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난데없이 남궁의 좌우를 제갈가와 당가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의문이었는데, 남궁가주의 오른쪽을 제갈가가 차지한 이유가 있었던 것. 

‘크, 큰일이구나. 그간 제갈가가 무공으로는 칠대세가 회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는데, 이러면 큰 흐름이 변하겠구나.’ 

같은 위치의 칠대세가라도 내부에서의 다툼이 알게 모르게 있는 편인데, 그렇기에 전통적인 무가라 할 수 있는 남궁, 독고, 팽, 황보, 모용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었는데, 중원팔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전대 북해빙궁주가 제갈가주의 부인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항상 이인자에 머물던 모용가의 가주 모용승겸은 눈치 빠르게 오늘 거사가 실패할 것을 알아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가가 남궁 가주의 좌측에 앉은 것으로 봐서는 이미 포섭된 듯 보였고, 팽가의 가주는 당가와 혼례로 묶인 사람.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니 당가의 의견을 따를 것이 뻔했던 것. 

‘일이 대체 어찌 이리된 것이지?’ 

그렇게 모용 승겸이 당황할 때 당가의 가주가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남궁가와 제갈가의 가주를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두 분 들으셨습니까? 그 녀석이 또 제서를 받았다지 뭡니까? 그리고 저희가 같이 좋은 건물로 구해주려고 고민했던 요릿집도 제 손으로 구했고요.” 

“나도 서찰을 받았소. 당가주. 정말 자기 앞가림은 제대로 하는 놈이 아닙니까?” 

“껄껄. 정말 똘똘한 놈이 아닙니까? 어디서 그런 놈이 굴러왔는지. 십 년을 칼을 휘둘러도 못해낼 일을 저리 손쉽게 해내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남궁가주. 내 검을 무시한 것은 아니오.” 

“아하하하, 뭐 그런 일로 사과하고 그러십니까? 우리 사이에?” 

“그렇지요. 우리 사이에 하하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오가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용가 가주의 눈이 좌우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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