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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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게 솟은 오 층 전각 뒤편.
후원의 정자에 늘어진 미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하아···. 정말. 심심 하구나···.”
미미는 요즘 무척이나 심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쁜 아침이 지나면 정오쯤에는 다들 모여서 요리를 먹으며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저녁에 장사를 끝낼 때까지 전혀 짬이 나지 않았기 때문.
복주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일 이후로 류가반점의 손님이 점심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밀려들고 있었기에 모두 바빠 그럴 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이는 낭군님의 아내 넷 중에 셈이 제일 빠르기에 손님들이 나갈 때 음식값을 받아내는 일을 맡았고, 영영이는 뛰어난 코로 어전과 육전을 다니며 물건을 사들이는 일을 맡았다.
또한 소소는 뛰어난 검 실력이 있기에 고기와 뼈 같은 것을 자를 때 도움을 주고 있었으며, 영물인 덕구는 반점 입구에서 행패 부리는 사람을 쫓아내는 일을 맡았던 것.
낭군님의 요리가 잘 팔리는 것은 아주 기뻐할 일이지만, 가끔 복청의 본가에 갈 때 낭군님을 업고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반점에서 아무 일도 맡지 않은 것은 미미가 유일했기에 이렇게 심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도 뭔가 쓸모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좋았을 텐데···.’
왠지 소외되는 느낌에 미미의 마음속에서는 서운함이 솟아올랐다.
좀 전에는 몰려든 손님에 반점이 매우 바쁜 것 같기에 다른 하인들과 같이 그릇이라도 치우려 했는데, 다른 하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부인께서 할 일이 아니라며 손에서 그릇을 빼앗아 가니 서러워질 지경.
후원 정자에서 몸을 일으켜 쪼그리고 앉아 괜히 긴 막대기로 애꿎은 바닥에 글씨만 써댔다.
-슥슥.
「류청운 바보. 류청운사자(劉靑雲傻子)」
항상 잘해주는 낭군님인 것은 아는데, 자신에게만 일을 주지 않은 낭군님에게 서운했기에 나와버린 글자.
그때였다.
이 모든 서러움과 서운함의 근원인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미미! 미미!”
‘헉!’
미미는 얼른 쪼그리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서 발로 바닥에 쓴 글자를 슥 밀어버리고는 자신을 부르는 낭군님에게 대답했다.
“네, 나, 낭군님! 저, 여기 있어요!”
미미의 대답과 함께 열려있던 후원 쪽으로 난 문에서 낭군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 묶은 끈은 열심히 일하느라 땀으로 촉촉이 젖어있으며, 귀밑머리로 흘러내린 땀방울이 햇살에 반짝이며 떨어지는 모습.
자신을 발견하자 환하게 미소를 짓는 낭군님의 얼굴에 미미의 마음에 찾아왔던 서운함은, 언제 서운했냐는 듯 눈이 녹듯 사르르 풀려버렸다.
“미미를 부르셨나요?”
천천히 정자 쪽으로 다가오는 낭군님.
자기를 찾아준 낭군님의 부름에 미미가 기뻐 대답하자, 낭군님이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미미, 미안한데 구기순이 떨어져서 그런데 급하게 모 씨에게 급하게 좀 다녀와 주지 않겠소?”
심부름을 시키시려고 부른 것이 미안해했던 모양.
그러나 오히려 할 일이 생겨 기뻐진 미미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구기순 말이군요? 얼마나요?”
“두 근만 가져다주시오.”
“두 근 알겠어요. 낭군님.”
“갈 때 청이에게 돈 받아 가는 거 잊지 말아야 하오.”
“네!”
할 일이 생겼기에 기뻐하는 얼굴로 미미가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막 낭군님의 옆을 지나쳤을 때.
“응? 이것은?”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한 낭군님의 목소리.
미미가 뒤로 돌아 낭군님을 바라보자, 낭군님께서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확인하고 계셨다.
‘허억! 저, 저것은!’
낭군님이 쪼그려 앉은 곳은 좀 전에 미미가 글을 적었던 곳.
서운한 마음에 썼던 류청운 바보라는 글자가 다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기에, 미미는 얼른 쪼그리고 앉았던 낭군님의 두 눈을 가리고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제, 제가 다 서, 설명할 수 있어요. 낭군님! 저, 절대 낭군님이 생각하시는 것 그런 것 아니에요! 저, 정말이에요!”
그러자 아무 대답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낭군님.
낭군님이 몸을 일으키는 통에 미미의 손이 자연스레 딸려 올라가고, 미미가 등에 업힌 것 같은 모습이 되었을 때 낭군님께서 뒤로 돌아 미미를 품 안에 꼬옥 안으셨다.
“에?”
바보라고 써서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따듯한 포옹.
당황한 미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낭군님을 올려다보자, 낭군님께서 미미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미미를 한껏 안아주며 말씀하셨다.
“미안하오. 내 노력은 하고 있는데, 빨리 안 생기니···. 원래 자식은 하늘에서 점지해 주는 것이라 그런가 보오.”
“네?”
“내 밤에 좀 더 노력해 보리다. 그리고 나는 꼭 사내아이가 아니라 계집아이도 괜찮소. 미미를 닮아 예쁠 것 같거든.”
사내아이 계집아이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뭔가가 이상했다.
거기에 갑자기 밤에 뭔가를 노력해 보겠다는 말에 당황한 미미.
낭군님의 어깨에 머리가 눕혀진 미미가 시선을 발치로 내려 땅바닥에 자기가 써둔 글자를 확인했다.
‘응?’
그러자 바닥에 쓰여 있는 글자는 자신이 쓴 것과 다른 청운 자(靑雲 子).
아까 급하게 글을 지운다고 발을 슥 문질렀는데, 글자는 류청운사자(劉靑雲傻子)에서 류와 사자만 지워져 버려 청운 자(靑雲 子)라는 청운이의 아들이라는 뜻이 되어있었다.
낭군님의 아들을 낳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되어버린 상황.
부끄러움에 미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것이 아니고···.”
부끄러움에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거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밤에 노력(?)해 주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던 것.
오해가 분명하지만 오해이기에 더 좋아진 그런 느낌.
오해를 풀려면 바보라고 썼다고 해야 했는데, 그것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미미는 부끄러움 가득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 미미 낭군님만 미, 믿겠어요. 그···. 노력···.”
미미의 대답에 낭군님이 미미를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요! 내 힘닿는 데까지! 아주 힘껏!”
잠시 후.
부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버린 상황.
미미는 기쁜 마음으로 심부름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빨리 다녀와야 한다고 하셨지?’
분명히 빨리 다녀와야 한다고 하셨는데 낭군님의 품에서 이미 흘러버린 시진.
미미는 낭군님의 품속에 안겨 있느라 늦어진 것을 떠올리고는, 오 층 전각 제일 꼭대기로 올라갔다.
오 층에 오른 것은 몸 안의 기운을 폭발시켜 저자 쪽으로 한 번에 쏘아지기 위해서.
그편이 사람들의 눈에도 덜 띄고 더욱 빠르게 다녀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휘이잉!
그렇게 오 층 전각 꼭대기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미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미미는 그 바람을 맞으며 저자 방향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몸 안의 내공을 폭발시켜 조용히 저자 쪽으로 몸을 날렸다.
-탓! 씨잉!
그렇게 미미가 한 마리 매처럼 조용히 저자 쪽으로 쏘아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래쪽을 바라보며 주변을 살피는데 눈에 들어오는 이상한 느낌.
반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 이 층짜리 요릿집 창가의 남자.
다리 위에서 취해 주저앉은 젊은 남자.
민가 골목에 기대앉은 죽립을 쓴 남자.
셋의 시선이 흘깃흘깃 청운 반점을 향하고 있었다.
뭐 그냥 주변을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절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미미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으니까.
저런 것을 알아채는데 이 중원에서 미미를 따라갈 자는 없을 거라고 늙은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미미는 공중에서 몸을 날리며 생각했다.
이걸 심부름을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저놈들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일까?
그리고 빠른 결단.
비룡번신(飛龍翻身) 수법으로 공중에서 몸을 날려 방향을 튼 미미.
미미의 몸이 부드럽게 방향을 틀더니, 미미의 목적지는 곧바로 화화루로 변경되었다.
낭군님의 심부름이 중요하긴 해도 안전이 위협받는 것은 무엇보다 빨리 처리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방향을 튼 미미의 신영이 하늘을 날아 화화루 오 층 난간에 도착하고, 난간 쪽에 난 문 앞에 미미가 도착하자 안쪽에서 곧바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비연.
미미가 안쪽의 비연에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아마 자다 깨서 날카로운 모양이었으니까.
“저예요. 미미.”
“미미 언니?”
놀란 비연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하늘하늘한 흰옷을 입은 비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 자다가 일어난 느낌.
“여긴 갑자기 어떻게?”
비연이 잘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 놀랜 모양.
미미는 빠르게 비연에게 찾아온 연유를 설명했다.
“류가반점 외부에 저희를 살피는 눈이 있어요.”
“네? 눈이요? 아이들이 주변을 항상 확인하고 있는데···. 어, 어떻게? 아니, 확실한가요. 언니? 제가 주변에 뿌려둔 사람들과 반점 내부의 아이들이 먼저 알아채지 못했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정중하긴 했지만,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그런 말투.
저번에 비구니들이 이쪽을 살피는 것도 확인 못한 아이들 보다 미미의 실력이 못하다는 말이었다.
낭군님께서 미미가 투왕이라는 사실을 하오문 사람인 비연에게 알리지 못하게 해서, 비연은 미미를 경공을 익힌 신비문파의 여인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미미의 실력을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미미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후···. 낭군께서 비연이 좀 더 믿을만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알리지 말라 하셨지만, 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니 겁을 좀 주어야겠군요.’
겁을 주기 위해서라도 실력을 살짝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았기에 미미는 바로 출수했다.
-스륵.
미미의 신영이 순간 바람같이 움직이고, 난간 쪽 문 앞에 서 있던 미미가 비연의 등 뒤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그리고 비연의 등 뒤에서 나타난 미미가 약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죠. 비연?”
“네!? 어, 어떻게!?”
자신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신묘한 움직임에 놀란 듯해 보이는 비연.
비연이 놀라 고개를 돌릴 때, 미미는 비연을 향해 손에 넣은 것을 검지에 걸어 빙빙 돌렸다.
“그, 그것은!”
화들짝 놀라 자기의 가슴을 가리는 비연.
방안으로 숨어드는 틈을 타 비연이 속에 입고 있는 가슴 가리게 인 말흉을 훔쳤으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미미는 자기 가슴을 가리며 놀란 비연에게 조용히 자신의 정체와 함께 근엄한 경고를 남기기로 했다.
“낭군님께서 비연이 좀 더 믿을 만한 사람이 될 때까지 숨기라 하셨지만, 일이 급하니 어쩔 수 없네요. 저의 별호는 투왕. 제가 바로 오대 투왕 백미미. 좀 전에 신풍은 보았겠죠? 다음에 또 이런 무례를 저지른다면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는 설(亵)까지 훔쳐 화화루 앞에 걸어 버릴 테니 조심하세요. 알겠나요?”
그러자 눈을 부릅뜬 비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놀란 목소리로 머리를 조아렸다.
“투, 투왕! 죄, 죄송해요. 모, 몰라뵈었어요!”
“흥!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겁니다. 알겠나요?”
“예, 언니. 아니, 투왕님!”
“그럼 어서 빨리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도록 하세요. 반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 이 층짜리 요릿집 창가의 남자, 다리 위에서 취해 주저앉은 젊은 남자, 민가 골목에 기대앉은 죽립을 쓴 남자 총 세 명입니다.”
“예! 거기 누구 없나요! 아무나 얼른 오세요!”
잠시 소란 속에 비연이 사람을 불러오고, 그들이 비연의 지시에 감시하는 자들의 확인을 위해 자리를 나섰을 때.
미미가 밖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믿고 갑니다. 아, 그리고 제 신분은 절대 발설하지 않도록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예, 무, 물론이죠. 투왕님.”
“그리고 계속 언니라 불러도 좋아요.”
“저, 정말인가요!?”
“네. 그럼···.”
미미가 다시 들어왔던 난간 쪽 문으로 움직이려 할 때였다.
“저기, 투, 아니, 언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미미를 부르는 비연.
슬쩍 고개를 돌려 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지요?”
그러자 비연이 붉게 물든 얼굴 부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말흉···.”
“아, 아차!”
미미는 손가락에 걸고 있던 말흉을 얼른 비연의 손에 쥐여주고는 곧바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심부름 늦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